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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Jun 17. 2024

내 알을 낳아도!

며칠 전, 온 가족의 간절했던 바람이 이루어졌다. 그 바람이란, 김치의 몸에서 탄생한 알을 손에 품어보는 것. 그러니까 김치는, 회색빛 아파트들로 가득한 이곳에서 마침내 ‘찐 유기농 계란’을 생산해 내기 시작한 것이다.


지난 몇 주간 김치는 홀로 외로운 싸움을 이어온 것 같다. 대체로 암탉은 180일 전후로 무정란을 낳기 시작해서 일 년에 약 180~260개의 알을 낳는다고 하는데, 태어난 지 260일 가까이 되어서야 김치는 알토란 같은 첫 알을 세상에 내어놓았다.
꽤 오랜 시간 김치가 알을 낳을 것 같은 조짐은 있었다. 풍성해진 뒤태, 자꾸만 움찔거리는 엉덩이 근육, 달라진 변의 상태와 울음소리 등. 그리하여 우리 가족은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고 틈만 나면 김치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살피기 바빴다.


나는 바다 건너에서만 판매하고 있는, 산란을 위한 닭의 둥지를 급히 공수했고, 짝꿍은 마치 산모의 식단을 관리하는 영양사처럼, 김치에게 영양가 풍부한 음식을 바지런히 해다 날랐다. 첫 아이의 탄생을 기다릴 때와 같은 기대감과 설렘이 우리를 찾아왔고, 그 기대는 흡사 이스트가 첨가된 반죽처럼 점점 부풀어 올랐다.



하지만 김치에게서 기다리는 소식은 들려오지 않았다. 기다림에 지칠 때면,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구지가>의 개사 버전과, 오래전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유행했던 멘트를 소환하며 기다림 자체가 또 다른 즐거움과 행복의 순간이 되기를 바랐다.

"김치야, 김치야, 알을 내놓아라. 만약에 내놓지 않으면..."

"내 알을 낳아도!!"

우리는 마치 김치가, 어린 시절 동화책에서 봤던 금계란이라도 낳아줄 듯 그날이 오기를 손꼽아 기다렸다.



그러는 와중에 김치의 둥지는, 방구석에서 시골집에서나 풍겨 나올 법한, 지푸라기 내음을 폴폴 풍기며 인테리어 장식으로 전락해 갔다. 도통 둥지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는 김치를,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둥지에 슬쩍 밀어 넣어보려 치면, 바스락거리는 지푸라기 소리에 놀란 김치는 화들짝, 둥지 밖으로 도망쳐 나오곤 했다. 김치가, 집 안에 깔아 둔 댕댕이 배변패드에 알을 낳을 것 같지는 않은데 이를 어찌해야 하나, 혹여 몸이 건강하지 못한 상태는 아닌가, 불쑥불쑥 노파심이 일었다.



그런데 며칠 전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일주일 전쯤 쭈니가 거실 한편으로 옮겨 둔 산란둥지에 김치가 급작스럽게 관심을 보인 것이다. 그전까지는 흡사 못 볼 것을 본 듯 피해 다녔던 둥지였다. 그런데 그날의 김치는 확연히 달랐다. 묘한 움직임으로 둥지 앞을 서성이던 김치의 뒷모습에서는 여느 때와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두 아이의 엄마인 나는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어미가 되기 직전의 생명체에게서 볼 수 있는, 본능적이고 절박한 움직임이라는 것을. 아니나 다를까, 김치는 제 발로, 그야말로 펄쩍 뛰어, 둥지 안으로 입성했다. 오랜 시간 집안 곳곳을 두리번거리며 다니던 김치는 직감적으로 이 둥지야말로 자신의 알을 위한 최적의 공간임을 알아차린 것이다. 예전에 자몽이가 온 집 안을 탐색하다가 화장실 변기 뒤편 옴폭한 곳에 둥지를 틀었던 것처럼 말이다.



둥지 안으로 들어간 김치는 안절부절못하며 자세를 고쳐 잡기를 반복했다. 우리 가족은, 마치 귀한 장면을 비밀스럽게 포착하려는 파파라치처럼, 멀찌감치 서서 휴대폰 카메라를 켠 채로 몸을 숨기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산만하던 김치의 움직임이 잠시 고요해졌고, 어수선하게 널려있는 지푸라기들 사이로 김치의 첫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우리의 시선이 동시에 향한 그곳에는, 오랜 산고 끝에 김치가 이 세상에 내어놓은, 불그스레 핏기를 머금은, 반들반들한 알이 위풍도 당당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윽고 사진과 동영상을 찍느라 일어난 야단법석 소란스러움이 거실 가득 활기를 불어넣었다. 나는 무정란인 김치의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 순간 김치가 진정한 성체가 되었다는 신고식이라도 한 것 같아 가슴 뭉클했다. 마트에서 사 온 유정란에서 태어나 지난 9개월 간 우리와 함께 삶을 살아온 김치가, 알을 스스로 생산해 내는 생명체로 성장했다는 사실이 내게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안겨주었다.



비너스의 탄생을 지켜보던 이들의 기분이 이러했을까. 타인의 눈에는 그저 그런 계란처럼 보일 김치의 알이, 내겐 금계란이라고 해도 과하지 않을 만큼, 후광을 두른 듯 빛이 나 보였다. 알이 탄생될 때마다 차곡차곡 쌓여갈 우리의 설렘, 기쁨, 흐뭇함은 어쩌면 일순간 사라질 수도 있는 금보다 더 귀중한 자산이 되어줄지도 모르겠다.



그날 이후로 김치는 총 다섯 개의 알을 낳았다. 태어난 순서에 맞춰 네임펜으로 꼭꼭 눌러써 둔 숫자들이 사라지는 게 너무 아까워, 이 알들을 어떻게 구워 먹을 수 있을까 싶다. 아마도 한 알 한 알 계란프라이를 해 먹을 때마다, 김치에게 ‘일용할 계란을 주어 고맙다’라고 감사 인사를 올린 뒤 식탁에 올려야 할 것 같다.



초보자도 거뜬히 키워낸다는 화초하나 돌보지 못해 죽어나가게 만드는 이 똥손으로, 3세대에 걸친 장수풍뎅이를 키워내고, 구피들이 대를 이어 십 년 가까운 세월을 살아가게 하고, 마트유정란에서 부화한 김치를 건강한 알을 낳는, 의젓한 성체로 자라게 하다니….

생의 경이로움은, 내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일상의 작은 순간에, 그렇게 나를 찾아왔다.

김치의 첫 알이 세상으로 나오던 순간(ft.네안이 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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