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격적인 하와의 여행은 하남의 한 농장으로 가는 길에서 시작되었다. 호텔의 코스요리로 치자면 흡사 애피타이저와도 같은, 짧은 여정이었다.
지난 글을 읽어보신 분들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우리 집에는 세 마리의 조류 가족이 동거하고 있다. 이름하여 김치, 두부 그리고 망고다. 이번 여행 기간 동안 두부와 망고를 맡아줄 곳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집 근처에 앵무새 카페가 있는 데다가, 워낙에 건강하고, 환경에 구애를 받지 않는 녀석들이라 걱정할 거리가 별로 없었다. 문제는 반려닭 김치였다. 최근까지도 건강에 대해 염려하게 만든, 조류지만 땅에서만 생활하는 김치가, 일주일 넘게 뛰어놀 곳을 찾기가 마땅치 않았다.
그런데 고심을 거듭하던 어느 날 불현듯, 예전에 온 가족이 함께 방문했던 하남의 한 농장이 떠올랐고, 나는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농장에 문의 전화를 걸었다. 왕관앵무 호텔링에 대해 흔쾌히 수긍하던 농장주는 김치 이야기에 이르러서 그만 말문이 막힌 것 같았다.
"혹시 반려닭도 함께 봐주실 수 있을까요? 정말 얌전한 아이에요. 맡길 곳이 없어 고심하던 중에 사장님 농장이 떠올랐어요."
휴대폰 너머 약 3초간의 정적이 흐른 후 대답이 돌아왔다.
"하루만 생각을 좀 해볼게요."
혹시라도 단호히 안된다고 하면 어떡하나, 싶었는데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다음 날, 다행히 사장님은 김치를 돌봐주시겠다며 너른 아량을 보여주셨다. 어떡하겠어요, 제가 맡아볼게요,라는 말과 함께. 그렇게 세 녀석을 데리고 도로 위를 달리던 그때, 쨍한 코발트 빛 하늘과 차창 밖으로 눈에 담기는 풍경은 그 어느 때보다 싱그러워 보였다.
농장에 도착하니 웬 '괴생명체’'가 우리를 반겼다. 소리는 분명 병아리인데, 생김새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조류. 핑크와 초록으로 물든 녀석들은, 발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흙 위에서 천방지축 노닐다가 김치를 발견하고는 마치 새 친구를 반갑게 맞이하는 것처럼 깊은 관심을 표명했다. 태어나서부터 거의 혼자 자라오다시피 한 김치를 두고 오려니 마음 한편이 무거웠는데, 알록달록한 개구쟁이 녀석들의 김치에 대한 관심에 한시름이 덜어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여행 떠나기 전 마지막 미션을 완수한 우리는, 최종적으로 짐을 확인한 뒤 마침내 인천국제공항으로 향했다.
굵직한 스케줄만 계획하고 나머지는 여백으로 남겨둔 채 시작한 여행이었다. 큰 점들만 두루뭉술하게 찍어두고 나머지 작은 점들은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채워가며, 기본적인 방향은 벗어나지 않는 여행이었다고나 할까. 이런 여행에는 불안감이 동반되곤 하지만, 그 이상의 설렘과 기대감이 따라오는 것 같다. 언제, 어디서, 어떤 풍경과 사람을 접하게 될지 모르는 상황. 전체적 틀은 어느 정도 정해져 있지만, 그 외의 것들은 나의 자유에 맡겨져 있는 여정. 적당히 불안정하고, 꽤나 자유로운. 이런 여행이라면 그까짓 불안감쯤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게 나와 짝꿍이 여행에 임할 때 부리는 소소한 배포다.
실로 오래간만에 타는 국제선이라, 시골에서 도시로 갓 상경한 농촌 아낙처럼 공항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며 사람들을 구경하기 바빴다. (개인적으로 사람 구경을 좋아한다) 생각보다 여행객들이 눈에 많이 띄지 않아서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우리가 간 곳이 2 터미널이라서 그런 거라고, 이곳이 일터이기도 한 짝꿍이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러고 보니 공항 청사가 지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것처럼 반들반들했다. 점점 상승하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체크인을 하려는데 티켓에 'SSSS'라는 수상한 기호가 찍혀 나왔다. 처음 보는, 암호 같은 낯선 기호에 머릿속 단어들을 총 동원해 어떤 단어의 이니셜일까 추측해 보았다. 교직에 있었을 당시 받았던 성과급 등급이 'S, A, B'(S가 가장 윗 등급이다)로 나뉘었던 기억이 남아있었던 탓인지, 'S'가 네 개나 붙어있는 표시가 '특별히 좋은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회심의 미소를 지으려는 순간, 직원이 던진 말에 기대감이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SSSS'표시는, 내가 '2차 보안검색 대상자'라는 말이란다. 그러니까, 출국을 하면서 나는 다른 승객들과 달리 보안검색을 두 번이나 거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제껏 미국을 방문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데다가, 꽤나 모범적인 해외여행 연대기를 일궈온 나를 왜 '특별히 주목해서 보안 검색을 하겠다'는 것인지, 옅은 불쾌감이 올라왔다. 여객터미널 천장 높은 줄 모르고 솟아오르던 내 텐션이 순간 급강하하며 나도 모르는 사이에 투덜투덜, 불평불만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거 그냥 랜덤으로 선택된 거 맞겠지?"
공항 전반의 사정을 잘 아는 짝꿍에게 물었다.
"아마, 아닐걸? 자기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어떤 사람이, 미국이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요주의 인물일 수도 있어. 크크크. 하지만 별일은 아닐 테니까, 너무 신경 쓰지는 마."
위로인지 염장을 지르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말을 하던 짝꿍은 어쩐지 표정이 너무나도 밝아 보였다. 혹시 '나만 아니면 돼~~!'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어쨌든, 다행히, 짝꿍의 말대로 별일 없이 간단한 2차 보안검색을 마치고, 내가 타 본 비행기 중 가장 거대한 동체의 입구로 들어서던 순간, 마침내 하와이 여행이 제대로 실감 나기 시작했다.
개인적으로 비행기가 이륙하는 순간의 스릴을 즐긴다. 천둥소리를 무서워하는 짝꿍은 비행기가 이륙할 때의 느낌도 좋아하지 않는다. 이런 성향도 각기 유전이 되는 것인지, 아들 녀석은 나와, 딸은 아빠와 궤를 같이한다. 어떡하다 보니 모자와 부녀가 앞뒤로 따로 앉게 되었는데, 의도치 않게 텐션이 높은 모자와 그렇지 않은 부녀의 두 그룹으로 나뉜 모양새가 되었다. 이상적인 자리배치였다. 그렇지 않았다면, 옆사람의 눈치를 보느라 이륙의 순간에 찾아오는 감정 상승의 기류를 마음껏 즐기지 못했을 테니 말이다. 모자가 함께 웃고 소곤소곤 떠들던 그 순간, 뒷 좌석의 부녀는 이미, 묵언수행을 하는 사람처럼 고요히 잠에 빠져들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와이와 한국의 시차는 19시간이다. (한국이 19시간 빠르다) 그리하여 우리는 어둠이 내려앉던 인천공항을 출발한 뒤, 별빛이 점점이 부서지던 태평양의 밤하늘을 8시간 반동안 날아, 오전의 햇살이 눈부신 하와이의 호놀룰루에 도착했다. 진득하니 독서를 하겠다며 야심 차게 챙겨 간 소설은 펼쳐보지도 못했지만, 두 번의 훌륭한 기내식과 다섯 시간의 숙면, 그리고 앞 좌석 등받이에 비치된 화면 속 비행기 항로를 머리에 새겨지도록 보고 또 보았다. 신기한 것이, 비행기 항로는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육상의 생명체로 태어나 하늘을 난다는 것에는 늘 근원적 두려움이 수반되는데, 내가 어디에서 어떻게 이동하고 있는지 친절하고 부지런히 안내해 주는 환한 불빛에 시선을 담그고 있다 보면, 왠지 모를 안도감마저 느껴졌다.
그렇게 맞이한 하와이의 쨍한 하늘은 감동적일 만큼 아름다웠다. 출입국 심사대의 한국어 안내판도, 손가락 지문을 찍으라며 친절한 한국어로, "(손가락) 네 개 (올려 주세요)", "엄지~~"라고 안내해 주던 심사관 언니도 그저 반가웠다.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예전처럼 비자가 필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고마웠고, - ESTA만 랜선으로 발급받으면 된다 - 그 옛날 낭만 어린 전차처럼 길쭉한 버스도 신기했고, 결정적으로 버스에서 내린 후 처음으로 마주한, 푸르른 하늘을 향해 머리를 휘날리던 키다리 야자수들도 모두 반가운 내 친구 같아 마음속으로 인사를 건넸다.
‘알로~하 하와이!!’
- 어른 둘, 아이 둘의 버스비가 총 9달러였는데, 거스름돈은 포기하고 현금으로 십 달러를 지불했다. 자판기에 지폐를 넣을 때처럼 현금이 요금통에 자동으로 밀려들어가게 되어있었다.
- 호놀룰루 중심가의 풍경. 버스를 내리자마자 쨍한 하늘과 키 큰 야자수가 우리를 반겼다. 호놀룰루는 대중교통이 잘 되어있는 편이라 굳이 비싼 택시를 타거나 렌터카로 하는 여행을 추천하지 않는다.
- 7,8월은 성수기라 가급적 일찍 숙소 예약을 하는 것이 좋다. 아이들을 동반한 가족여행이라면 호텔과 리조트보다는 레지던스 형태의 숙소를 추천한다. 물가-특히 먹거리-가 사악한 하와이에서 그나마 상대적으로 저렴하며, 음식을 다양하게 요리해 먹기 편리하기 때문이다.
- 하와이 거리에는 가로등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대신에 사진처럼 밤이 내린 거리를 '횃불등'이 밝힌다. 비가 와도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는. 열대의 하와이 풍경에 잘 어우러지며 예술적인 미를 더해주는 듯했다. 대부분의 숙소들이 와이키키 근처에 몰려있기 때문에 시내 중심가까지 걸어서 이동하기 무난하며, 거리 곳곳의 다양한 버스킹 공연들이 꽤 볼 만하다.
내일부터 일주일에 두 편씩 장편소설을 연재하려고 합니다. 청소년들이 주인공인 성장소설입니다.
어쩌다 보니 여행기와 소설 연재를 동시에 올리게 되었어요. 평소의 저라면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 같은데, 하와이에서 뭔가 단단히 씌어 온 것이 아닌가 싶어요. ㅎㅎ
소설의 댓글창은 간헐적으로 열어둘게요. 이야기를 함께 해주실 독자님들께 미리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