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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Aug 23. 2024

ABC 스토어에서 만난 한국어

하와이의 아름다운 열대의 풍경 뒤에서, 위협적일 만큼 사악한 물가가 호시탐탐 우리를 노리고 있었다. 만약 하와이에 ABC 스토어가 없었다면 아마도 우리 가족은 하루에 한 끼만으로 버티며 여행을 이어갔을는지도 모르겠다. ABC 스토어는 우리에게 가뭄 속 단비이자 사막의 오아시스, 어두운 구렁텅이에 비쳐드는 햇살 같은 존재였다. ABC 스토어에 들를 때면, 우리는 구수한 곡식 냄새로 가득한 방앗간을 들르는 굶주린 참새의 심정이 되었다.



하와이는 특히 먹을거리의 가격이 혀를 내두르게 만들었는데, 다음에 하와이를 다시 방문하게 된다면 여행 가방 하나는 과자와 라면으로 가득 채워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국의 편의점 이상으로 많이 분포하고 있는 ABC 스토어였지만, 점포마다 손님들이 끊이질 않았다. 흡사 '만물상회'와도 같은 ABC 스토어의 다양한 상품들은, 주머니 사정이 넉넉지 않은 관광객들에게  이상적인 곳이었다. 게다가 가게의 크기나 가게가 비치하고 있는 구성품들이 조금씩 달라서, 세부적인 차이점을 즐기는 나름의 재미가 있었다.



6박 8일의 기간 동안 우리 가족이 현지 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한 경우는 채 몇 번 되지 않았다. 우리는 호텔에 거주했던 날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경우에, ABC 스토어의 포장된 음식을 구입해 레인지에 데워 먹는 것으로 끼니를 해결했다. 기쁘게도 ABC 스토어에는 하와이 현지의 대표적 음식인 '포케'가 꽤 다양하게 구비되어 있었다. 어떤 때는 조금 초라한 기분이 들기도 했지만, 조금만 달리 생각하면 가족들과 함께 엠티를 온 것 같은 분위기가 느껴져 오히려 즐거운 마음이 되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ABC 스토어를 들르며 단골고객이 되어가고 있던 어느 순간, 무심히 마주한 가게 계산대의 한국어 설명문이 시선을 붙들었다.


 '담배 및 주류제품을 구입하실 때 연령 40세 이하로 보이시면 신원 확인을 요청합니다'


처음엔 내가 숫자 '24'를 '40'으로 잘못 본 건가, 싶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눈을 부릅뜨고 다시 보아도 그건 분명 '40'이었다. 미국은 만 21세부터 담배와 주류구입이 가능한 걸로 알고 있는데 왜 이런 안내문이 붙어있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렇다고 직원에게 물어보기에는 쑥스러웠기에 나와 짝꿍은 나름의 이런저런 추측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우리는 최종적으로, 관광객들이 많은 그곳에서 외국인들 -특히 동양인들-의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워 아예 제한 연령을 넉넉하게 잡은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도 진실은 알지 못한다. 다만 우리가 확실히 기억하고 있는 건, 계산대 직원들이, 우리가 여러 차례 현지 맥주를 구입하는 동안 단 한 번도 신원 확인을 요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신원 확인 요청을 안 한다는 건, 딱 봐도 우리가 마흔 넘게 생겼다는 얘기인가? 정말 그런 건가?!"


둘 다 마흔을 지나온 지 여러 해가 지났건만, 어쩐지 직원의 태도가 마뜩잖았던 내가 구시렁거리자 잠시 생각에 잠긴 듯했던 짝꿍이 답했다.


  "아마 우리가 아이들과 같이 있어서 그러려니, 한 게 아닐까?"

  "그럼 지난번에는? 그때는 우리 둘이서만 갔었잖아?"

  "아, 그러네. 나도 잘 모르겠다..."


이러나저러나 우리 둘은, 우리가 신원 확인의 범위를 일말의 의심 없이 벗어났다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자유로운 청춘의 기운 가득한 그곳에서 여전히 그리고 간절히, 청춘이고 싶었던 걸까.




하와이는 가는 곳마다 일본의 영향력이 눈에 밟혔다. 때론 답답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 정도로.

그 누가 뭐라 해도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토종 한국인임에도 불구하고, “아 유 저패니즈?"라는 질문을 받기 일쑤였고, *렌터카를 빌리기 위해 끔찍하게 긴 대기줄에 서 있었을 때, 짝꿍 앞으로 무턱대고 새치기를 하고 들어온 한 일본인 여성에게 순서가 밀려나 항의를 하자, 오히려 현지 직원에게 위협적인 언사를 듣기도 했으며, 손님들로 불티나는 건 일본 음식점이었고, 우리가 애정해 마지않던 ABC 스토어에도 '무스비'가 절찬리에 판매되고 있었으며, 길거리에서 어깨를 스친 대다수의 동양인들이 일본어를 쓰고 있었다. 이따금 들려오는 한국어가 무척 반가울 정도로, 동양인 관광객 중에서도 우리는 마치 소수인종이 된 듯한 기분이었다.



그래서였나 보다. ABC 스토어에서 마주한, 이해불가하면서도 흥미로운 저 한국어 문구가 내 눈을 사로잡았던 이유는. 생각지도 못했던 삶의 어느 순간, 멀리 떠나온 타국에서 나의 조국을 떠올리며 간절히 생각했다. 지금으로부터 머지않은 미래의 어느 날 방문한 이역만리에서, “아 유 코리안?"이라고 내게 거리낌 없이 질문을 던지며 눈빛을 반짝이는 누군가를 꼭 만나고 싶다고.



*우리가 예약했던 렌터카는 H사의 것이었는데, 최종적으로 차를 인도받기까지의 그 모든 과정을 직접 겪은 짝꿍의 말에 의하면, H사의 시스템과 서비스는 엉망진창이어서 두 번 다시는 H사의 렌터카를 이용하고 싶지 않다고 한다. 미리 랜선으로 예약하고 가면 5분 내로 끝나는 일인데, 예약 없이 온 사람들 때문에 대기 시간이 엄청나게 길어졌다고도.

한국인들은 대체로 접수 들어간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업무를 마치고 나왔던 데 반해, 많은 고객들이 한 사람당 30분 이상 현장에서 상담을 받고 계약을 하는 분위기였고, 정작 미리 예약하고 온 이들은 뒤로 밀려나 결국 우리처럼 여행 스케줄에 타격을 입는 경우가 종종 발생하는 듯했다.
‘빨리빨리' 문화에 익숙한 한국인들이 이상한 나라에서 온 사람들인 걸까? 다수의 사람들이 그렇지 않은 곳에서 우리가 낯설게 느껴지기까지 한 풍경이었다.

아무튼, 신속 정확하면서 친절하기까지 한 서비스 하나는 우리나라가 최고인 것 같다.


<사진과 함께 하는, 즐거운 하와이 여행을 위한 팁>

밤의 ABC 스토어. 그 앞에서 열정적 선교활동을 하던 청년의 뒷모습이..

미식가가 아니라면 먹을거리를 해결하기 위해 ABC 스토어를 적극 활용할 것을 추천하고 싶다.

티셔츠나 기타 제품들도 다른 곳에 비해 가격이 착하다. 이 사실을 미처 파악하지 못했던 우리 가족은 아들내미의 티셔츠를 공항 면세점에서 구입했는데, 가격이나 다양성 면에서 ABC 스토어가 훨씬 더 훌륭했기에 배가 아플 뻔한 기억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ABC 스토어의 계산대에 비치되어 있던, 하와이 지도가 그려진 비닐 쇼핑백(유료 but 저렴&튼튼)이 너무 예뻐 기념품 삼아 사 들고 왔는데, 하와이에서 가장 잘한 일 중 하나인 것 같다.

1 & 2
3 & 4

맥주와 함께 하는 하와이의 여름밤은 달콤했다. 하루의 여정을 기분 좋게 마무리하게 해주는 우리의 동반자였다.

국내에서 만나기 힘든 하와이 현지 맥주 맛이 일품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3번 제품에 가장 높은 점수를 주고 싶다. 모두 ABC 스토어에서 구입한 것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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