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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14. 2024

하와이안 쓰레기 스케일

힐로(Hilo)에서 코나(Kona)까지

빅아일랜드의 동부 힐로에서 서부의 코나까지 가는 길은 초보운전자를 위한 코스 같았다. 섬을 가로지르며 직선으로 쭉 이어지는 도로는, 한 손으로 운전해도 될 정도로 단조로웠고, 자칫 잘못하면 졸음운전에 빠질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라디오 주파수마저 잘 잡히지 않는 적적한 그곳에서, 짜릿한 풍경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짝꿍의 '가성비 측정기'를 만족 수치 가까이로 올라가게 만든 풍경은, 중간중간 팝업창처럼 튀어나오던 괴물체들을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우리가 빅아일랜드의 대자연 속에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조차 못한 것들이었다.



그 괴물체들의 정체는 바로, 수명을 다한 전자제품이었다. 휴일 아침이면 파란 트럭을 몰고 와 동네 어귀에서 확성기를 틀어대던, 구릿빛 얼굴의 고물상 아저씨가 탐낼 만한.



화산 지대의 신비로운 잿빛 들판이 마치 뫼비우스의 띠에 펼쳐져 있는 듯한 풍경에 시선을 담그고 있던 어느 순간, 잠시 잊고 있던 일상으로부터 난입한 것 같은 물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땅 위에 비스듬히 몸을 기대고 있던 그것은, 하얀 몸통의 냉장고였다. 사람의 손때를 탄 모습이 얼마 전까지 사용된 제품인 것 같았다.


  "어라, 저건... 냉장고?"


라고 내가 중얼거리자, 운전을 하고 있던 짝꿍이 믿기 힘들다는 표정을 지었다.


  "잘못 본 거 아니야?"


그 사이 냉장고는 저 뒤편으로 사라져 버렸고, 나는 내 눈을 의심하며 잠시 전의 장면을 되감아봤다. 이런 내게 확신이라도 주고 싶었던 걸까. 또 다른 녀석이 짠 하고 등장했다.



이번에는 세탁기였다. 우리나라에서 인기 있는 드럼형이 아닌, 일반형의.

세탁기의 등장에 어리둥절함이 가시고 웃음이 나기 시작했다. 고요하게만 보였던 자연의 무대가 일순간 대형 쓰레기의 대환장파티로 탈바꿈한 것 같았다. 한 번 터져 나온 웃음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얼마 지나지 않아 커다란 오븐이 모습을 드러냈고, 이대로 쭉 가다가는 빈티지 부엌 하나를 차려도 되겠다 싶은 상황이 뒤를 따랐다.



빅아일랜드는 웅장한 자연만큼이나 도로변의 쓰레기 스케일도 남달랐던 것이다. 그것도 주택가 주변이 아닌, 인적도 드문 대자연의 품속에 통째로 버려진 쓰레기라니… 오아후에서는 대로변에 노숙인들의 천막이 줄지어 서 있더니, 빅아일랜드에서는 대형 폐기물들이, 마치 가상의 게임 속 줍줍 하는 포인트처럼, 별안간 등장해 우리를 반겼다. 만약 일상 속에서 맞닥뜨린 장면이었다면 혀를 차며 개탄했을지도 모르겠으나, 잠시 머물다 가는 여행자의 입장에서는 그저 놀랍고, 신기하고, 흥미로운 마음이 앞섰다.



그러던 어느 순간, 어쭙잖은 우려가 풍경 속으로 끼어들기 시작했다.

개발에 혈안이 된 업자들조차 감히 손댈 생각을 하지 못할 것 같은, 압도적인 풍경의 자연에서 나뒹굴고 있는 문명의 이기들을 바라보며, 저 녀석들이 썩기까지 과연 얼마의 세월이 필요할까, 궁금해졌다. 일회용 마스크 하나가 분해되기까지도 무려 450년의 시간이 든다고 하니, 어쩌면 인류가 사라지고 지구가 생을 다할 때까지 녀석들의 일부는 이곳에 건재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행히, 이런 내 걱정은 기우였다.

내 우려를 씻어준 녀석은, 도로변에 서 있던 조그만 픽업트럭이었다. 정겨운 고물 아저씨의 트럭처럼, 빅아일랜드에서는 픽업트럭이 버려진 가전들을 수거하고 있었다. 내게 웃음을 선사해 준 폐기물들을 실어 나르는 픽업트럭을 스쳐 지나가며, 양가적인 감정이 들었다. 다행이다 싶으면서 한편으론, 연극이 끝난 무대 위에서 하나 둘 사라져 가는 소품들을 지켜보는 듯 아쉬운 마음이 들었달까.



그 마음은, 코나에 도착해 드넓은 바다를 마주할 때까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내 안에 머물렀다.

숙소 밖으로 내다보이는 풍경과 인사를 나누던 그제야, 나는 다시금 단순 여행자가 되었다.

그저 아름답고 좋은 것들을 느끼고, 생각하는….

힐로 - 코나의 풍경 어디메쯤
코나의 숙소 앞 풍경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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