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아일랜드의 서부지역에 있는 코나(Kona)로 넘어가기 전 하룻밤 머물렀던 힐로(Hilo)는, 고적한 즐거움을 느끼기에 좋은 곳이었다. 사람들로 북적였던 코나의 리조트와 달리, 힐로의 호텔은 숙소 창 너머로 물놀이를 즐기는 이들 외에 별다른 인적조차 드물었다.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나무들이 터줏대감처럼 자리 잡고 있는 힐로에는 특히, 오색 천을 두른 '성황당'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반얀트리'가 가는 길마다 긴 행렬을 이루며 늘어서 있었다.
하와이에 산재하는 반얀트리는 본디 인도의 국목(國木)이라고 한다. 소만큼이나 반얀트리를 신성하게 여기는 인도인들은 사원을 지을 때 반드시 반얀트리를 주변에 심는다고도. 그러고 보니, 몇 해 전 캄보디아 앙코르와트 사원에서 보았던 나무들도 반얀트리와 유사한 모습을 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20세기 초반 인도에서 하와이로 들여온 반얀트리는 이제 하와이의 토착 나무라고 해도 믿을 만큼 하와이의 주된 풍경을 이루고 있다.
처음 반얀트리의 모습을 봤을 땐 기괴한 기운이 느껴졌다. 장대한 기골, 비밀스러운 생명체를 품고 있을 것 같은 외양, 모든 것을 사정없이 휘감으며 끝도 없이 뻗어나갈 것 같은 뿌리가, 상대를 압도하는 음산한 분위기를 자아냈기 때문이다. 반얀트리의 특성*을 전해 들은 후로 이러한 첫인상은 더 공고해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힐로의 숙소에서 나선 처음이자 마지막 밤산책길에서, 나는 반얀트리에 반하고야 말았다.
그 밤, 이름 모를 청아한 새소리와 어우러진 반얀트리는, 흡사 드라마 <호텔 델루나>에 등장했던 커다란 나무처럼 나를 판타지의 세계로 이끄는 듯했고, 반얀트리가 펼쳐 보이는 마법에 잠시 걸려든 나는, 지상을 내딛는 발걸음의 무게를 제대로 느끼지 못할 정도로 몽환적인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리하여 밤의 반얀트리는, 순식간에 공포에서 판타지의 영역으로 건너가 버렸다. 아니, 어쩌면 나는 반얀트리라는, 아름다운 요물에게 홀린 것인지도 모르겠다.
반얀트리와 새들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마음을 내어주다 다시 숙소로 들어서던 길, 뒤통수에서 누군가가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 같은 묘한 기운이 느껴졌다. 발걸음을 멈칫 한 내가 뒤를 돌아봤을 때, 호텔 정문 앞 어둠 속에 서 있는 반얀트리 한 그루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왠지 그냥 지나치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가까이 다가서자, 나무 아래 숨어 있던 오래된 푯말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GEO. HERMAN BABE RUTH
OCT. 29. 1933'
야구의 역사를 잘 알지 못하는 나도 여러 번 들어보았던 그 이름, '베이브 루스'.
푯말에는, 그가 1933년에 심은 나무라는 표식이 새겨져 있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마치 내가 세계 대공황이 끝나고 2차 세계 대전이 시작되기 직전의 어느 날로 초대된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 시대를 살았던 한 인물이 심은 나무 한 그루가, 오랜 시간이 흘러 거리의 풍경을 가득 채우고, 미래의 또 다른 이에게 기분 좋은 감각을 불러일으킨 것이다. 반얀트리가 나와 과거를 이어주는 매개체처럼 느껴졌던 그 순간, 제 각각의 사연을 품고 서 있을 그 거리의 반얀트리들을 두고 차마 그대로 발걸음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짝꿍과 나는, 변변한 조명 하나 없이 어둠에 젖어든 길 위를 한동안 거닐었다. 반얀트리와 함께 여전히 이곳에 머무르고 있는 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눈에 담으며.
그렇게 우리는, 힐로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밤에 서서히 스며들어갔고, 하와이섬 어디에나 존재했던 반얀트리는, 우리에게 잊지 못할 힐로의 추억으로 아로새겨졌다.
* 반얀트리는 마치 뱀이 똬리를 틀듯 다른 나무를 칭칭 감아 영양분을 빼앗고, 햇빛을 가려 광합성을 못 하게 하여 결국 나무들을 고사하게 만드는 '교살목’이다.
** 성황당의 오색천처럼 늘어진 반얀트리의 '공기뿌리(Arial Roots)'가 내려와 땅에 닿으면 줄기처럼 변한다. 그렇게 줄기처럼 변한 공기뿌리에서 우리가 흔히 접하는 형태의 뿌리가 나와 땅을 파고들고, 땅아래 자리 잡은 뿌리는 또 다른 나무로 자라나 여러 그루의 나무가 되어 급기야 작은 숲을 이루게 된다고.
뿌리가 공중에서 땅을 향해 내려오는 나무라니... 이토록 놀라운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