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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07. 2024

낯선 행성 위를 걷는 듯

빅아일랜드를 방문하기 위해  항공편, 숙소, 그리고 화산국립공원에 가야겠다는 두루뭉술한 일정 말고 우리가 딱히 준비한 것은 없었다. 덕분에, 겨우 2박 3일의 짧은 여정이었지만, 그때그때마다 여유롭게, 마음이 허락하는 대로 오롯한 시간을 즐길 수 있었다.



힐로의 숙소 밖 풍경을 음미하며 잠깐의 휴식을 취한 후 차를 몰고 화산국립공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오후 5시 무렵이었다. 다행히, 간발의 차이로 오후 5시에 문을 닫는 방문자 센터에 입장했고, 친절한 직원의 설명을 들으며 공원 전체 지도를 훑어볼 기회를 얻었다.


  “엄마, 우리 여긴 왜 온 거야?”


잠이 덜 깬 딸이, 별 다른 시설 하나 없어 보이는 곳에서 도대체 무얼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기다려 봐. 곧 그 이유를 알게 될 테니까."


짝꿍에 이어 아이에게까지 희망이 실린 설득을 하며 문득, 이건 나 자신에게 하는 말인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일상에서는 희망이 고문이 되어 돌아오곤 했지만, 신기하게도, 여기에서만큼은 다를 거라는 예감이 내게 기분 좋은 확신을 불어넣어 주었다.



방문자 센터에서 차를 타고 5분 남짓 이동하자, 근거 없어 보였던 내 자신감이 현실의 풍광이 되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959년에 마지막으로 폭발한 화산이 여전히 활기를 부리고 있는 스팀 벤츠(Steam Vents)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아들내미는 땅밑에서 쉴 새 없이 올라오고 있는 연기로 심령사진 찍기 놀이를 하느라 웃음이 가시질 않았고, 우리 부부는 빅아일랜드가 선사하는 새로운 감흥에 대해 대화를 나누느라 바빴다. 그 와중에도 사춘기 소녀는 골똘히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 있는 표정이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발걸음만은 점점 더 부지런해지고 있었다.



그 길 끝에서 우리는 드디어, 킬라우에아 칼데라(Kilauea Caldera)가 내려다 보이는 광활한 공간과 마주했다. 거대한 혜성이 행성과 충돌해 남긴 상흔이 이러한 모습이지 않을까 싶었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온통 황톳빛이었단 풍경. 황량하고도 적막한 공간으로 날아드는 거센 바람은, 마치 우리가 지구 밖 행성 어딘가에 불시착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시야를 압도하는 대자연의 모습 앞에서 감탄사도 제대로 내지르지 못한 채 잠시 멈춰 서 있었다. 인간을 그저 한 점도 되지 않는 미물처럼 만들어버리는 광경을 영접한 순간, 비현실적인 경이로움에 빠져든 것이었다.

  "이야~~~”

현실의 감각이 돌아오고 나서야 뒤늦은 감탄이 따라 나왔다.



킬라우에아 칼데라 일대를 잠시 걷다가 숙소로 되돌아가려 했던 우리는, 칼데라와 조우한 뒤로, 그곳의 대지를 음미하듯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나아가던 그 길에서, 청춘의 설렘이 깃든 눈빛으로 칼데라의 노을을 기다리고 있던 현지 어르신을 만나 대화를 나누고, 이름 모를 생명체들을 눈에 담으며, 선홍빛으로 젖어드는 대기만큼이나 따뜻한 기운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것을 느꼈다.


  "저기 아래에 내려갔다 왔나요?"

칼데라 너머로 물들 석양을 기다리고 있던 어르신이, 손수 챙겨 온 듯한 의자에 앉은 채로 짝꿍에게 물었다.

  "아니요. 저희는 아직 못 내려가봤어요."



한 걸음 떨어져 있던 내가 칼데라의 풍경을 내려다보고 있던 사이, 짝꿍은 어르신과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오아후에 있던 기간 동안 현지인들과 소통하려 애쓰던 짝꿍의 모습과는 어딘지 좀 달라 보였다. 좀 더 편안해진 자신감이 스며 나오는 것 같았다. "ma'am, bla bla ~~"라고 말하는 발음은 흡사 뒷골목 어딘가에서 영어로 랩 좀 해본 사람 같은 분위기를 풍기기도 했다.



  "뭐라셔?"

잠시 후 내가 물었다.

  "가족을 기다리고 있대. 여기서 함께 노을을 볼 거라고. 그래서 내가, 이 지점이 노을을 감상하기 가장 적합한 위치인 것 같다고 말했어…”

  "즐겁게 얘기 나누는 것 같더라?"

  "영어가 제법 편하게 나오네. 역시 대화 나누는 상대가 중요한 것 같아."

오아후에서 아쉬움이 묻어나던 짝꿍의 표정이 흐뭇함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짝꿍의 말에, 언젠가 이곳 브런치에서 읽었던 이웃 작가님의 글이 생각났다. 외국어 실력을 늘리고 싶다면 현지 어르신들과 대화를 나누라는. 세월이 갈수록 사람들과의 대화가 그리워지는 어르신이 우리 같은 이방인에게도 마음을 너그러이 내어준 것일까. 먼 훗날, 온화한 눈빛과 열린 마음으로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는 할머니가 되고 싶은 내게, 어르신의 맑은 얼굴이 예사롭지 않게 다가왔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내려오기 전 어르신의 모습을 잠시 돌아보았다. 노을이 임박한 하늘을 마주하고 앉아 있는 그분의 뒷모습에서 <<어린 왕자>>의 한 대목이 떠올랐다.

기다려야 해.
뭘 기다려?
해가 지기를 기다려야지.
어린 왕자는 순간 깜짝 놀란 것 같더니, 이내 웃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어느 날인가 해 지는 걸 마흔세 번이나 본 적이 있어.
그는 잠시 뒤 말을 덧붙였다.
아저씨도 알지? 마음이 아주 슬플 때 해 지는 모습을 보는 걸 좋아하게 된다는 걸.
마흔세 번이나 해 지는 걸 본 날은 그렇게나 많이 슬펐던 거야?
어린 왕자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르신과의 짧은 인연 덕분에 칼데라의 노을이 보고 싶어졌다. 그렇게 우리는, 성글었던 애초의 계획에는 없었던 '볼케이노 하우스'에 가게 되었고, 놓치면 후회할 뻔했던 칼데라의 노을과 함께 저녁을 즐겼다. 그리고, 식사를 마치고 나오던 길, 마침내 맞닥뜨리고야 말았다. 칼데라를 소복이 덮고 있던 별빛의 향연을. 풀벌레 소리만이 가까스로 적막을 에워싸고 있었던 까마득히 열린 공간. 그 위로 점점이 불을 밝히고 있는 별들을 마주한 우리 부부와 아들 녀석에게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탄성이 터져 나왔다.



밤하늘을 온몸으로 담아내기라도 하려는 듯, 한껏 뒤로 젖힌 얼굴 가득 빛을 발하던 짝꿍과 아들을 보다가 문득 궁금한 마음이 일어, 가만히 서 있던 딸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 순간,


  "와!!!!" 


짧고 굵직한 감탄과 함께 밤하늘을 마주하고 있던 딸의 두 눈으로, 별빛이 은은하게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지난 십 여 년간 딸에게서 들었던 감탄사 중 가장 깊고도, 진심 어린 탄성이었다.

심령사진 찍기 놀이
엄마, 우리 화성에 온 것 같아!
저 안에 어떤 생명체가 살고 있을까?
볼케이노 하우스에서 바라본 노을
사진으로 차마 담아낼 수 없었던 킬라우에아의 밤하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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