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연재에 미처 담지 못했지만, 자투리 이야기로 나누고 싶은 장면들이 있어요. 잠깐이라도 언급하지 않고 연재를 마치면 뭔가 아쉬울 것 같은.
그럼 지금부터, 이미지들에 간단한(?) 이야기를 덧붙여 전해드릴게요.
1) 히스토리 채널의 'Alone'
저는 여행지 숙소에서 종종 텔레비전을 봐요. 관광지로 유명한 곳을 돌아다니다가 현지인들의 일상이 묻어있는 듯한 프로그램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곳의 주민이 된 것 같은 착각에 빠져 들며, 여행지에서의 또 다른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 들기도 하거든요. 소설로 치자면 '액자식 구성'을 맛보는 기분이랄까요.
이번 하와이 여행에서는 히스토리 채널의 'Alone'이라는 프로그램을 재미있게 봤어요. 우리나라의 '정글의 법칙'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을 주는 프로그램이었는데, 숙소에서 잠시 무언가 보고 싶어질 때 화면에 멍 때리고 있기 딱 좋더라고요.
일단, 영어 자막을 달아보기에 이상적이었어요. 극한상황에 지쳐서 그런 건지, 아니면 혼자 하는 이야기라 서두를 필요가 없어서인지, 참가자들 대다수가 듣기 평가에 이골이 난 제가 알아듣기 쉬운 말투로 차분하게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을 전해주더군요.
듣기와 읽기 공부를 하며 동시에, 전 세계 오지에서 살아남기 위해 홀로 고군분투하는 참가자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재미가 꽤 쏠쏠했어요.
2) 리조트의 낯선 입간판
코나 리조트에서 제 시선을 끈 입간판입니다.
마치 휴전선을 표시해 놓은 듯, 사인판을 기준으로 이쪽 영역에서는 음주가 허락되고 저쪽 편에서는 음주가 불허되는 상황이었어요. 굳이 떡하니 사인까지 세워놓은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백주 대낮에 술병 들고 길거리에서 추태를 부린 관광객들이 있지 않았을까, 추측해 봅니다. 여러분 생각은 어떨지 궁금해지네요.
아무튼, 리조트 앞의 잔디밭이 탐나도록 고왔는데, 코나리조트에서는 잔디밭에서의 '낭만 음주'는 기대하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대학 시절 이따금 즐겼던 잔디밭의 낭만이 떠올라서인지, 저 입간판이 조금 비인간적으로 느껴지기까지 했던 순간을 포착해 봤어요.
3) 호텔을 방문한 비둘기
와이키키 '하얏트리젠시'호텔을 방문한 비둘기 녀석입니다. 어린 천사처럼 어찌나 자태가 사랑스러운지, 혹여 날아갈세라 조심조심 다가가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었어요.
사실 이 시간, 짝꿍은 렌터카 때문에 혈압이 상승하고 있는 중이었어요. 저도 렌터카 사무실 앞에서 함께 대기를 타고 있다가, 볼일이 급해 잠시 자리를 빠져나온 사이 녀석을 맞닥뜨리게 된 거죠. 하얏트리젠시에서는 와이키키 해변이 마치 앞마당처럼 내려다 보여요. 와이키키 근처에서 놀다가 화장실이 급해지면 이곳에서 해결해도 괜찮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어요. 호텔 내 대부분의 화장실은 비밀번호를 눌러야 들어갈 수 있는 구조였는데, 3층 (여자) 화장실은 외부인에게도 열려 있더군요. 호텔 직원에게 물어물어 간신히 알아낸 장소였지요. 아주 중요한 정보를 알아낸 것 같아 무척 흐뭇해했더랬죠. ㅎㅎ
4) 시조새의 뷰가 궁금하다면
제 인생 버킷리스트 중엔 '패러글라이딩'이 들어있어요. 아직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지만 언젠가 꼭 한 번은 해 볼 작정입니다.
하와이에서 우연히 패러글라이딩 하는 장면을 목격했어요. 그런데 그 순간, 나의 버킷리스트 장소가 이곳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번뜩 스치더군요. 쭉 뻗은 야자수 너머로 평화로이 떠다니는 패러글라이더의 모습에 엉뚱하게도 '시조새'가 생각났어요. 아마도 ‘쿠알로아 랜치'를 방문한 날 들른 곳이라서 그랬나 봐요. 쥐라기 공원의 하늘엔 시조새들이 자유롭게 날아다녔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든 순간 시조새의 뷰(view)로 내려다보는 하와이의 풍경은 어땠을까 궁금하더라고요.
5) 리즈 시절의 디카프리오를 떠올리게 한 '블로우홀'
이곳은 '할로나 블로우홀'이라는 곳이에요.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렌터카로 오아후를 드라이브하던 중 만난 곳이랍니다. (이런 풍경이라도 보지 못했더라면 렌터카 회사를 저주했을는지도 모르겠어요. ㅠ)
바위 사이로 옴폭하게 들어앉은 청자빛 바다에서 사람들이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즐기고 있었어요. 멀리서 이곳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자니 오래전, 그러니까, 우리의 디카프리오 오빠가 미모를 날리던 시절 보았던 '더 비치(The Beach, 2000)'라는 영화가 소환되었어요. 정작 영화 촬영지는 푸껫 피피섬에 있는 '마야베이'라는 곳이라는데, 어쩐지 저는 블로우홀과 마야베이가 겹쳐 보이면서, 소년의 모습을 하고 있던 디카프리오와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던 제가 생각났어요.
6) 쿠히오(Kuhio) 해변에 비쳐 든 달빛
여기는 와이키키 해변과 인접한 쿠히오 해변입니다. 가고자 했던 의도는 없었는데 발길 닿는 대로 걷다가 도착한 곳이에요. 때마침 수면 위로 달빛이 은은하게 반사되고 있었어요. 그 빛이 어찌나 환하던지 해도 달도 아닌, 내가 모르던 제3의 행성이 내려보내는 빛처럼 느껴졌답니다.
신비로운 풍경이 넘쳐흐르고 흘러 짝꿍의 작은 카메라에도 환상적일 만큼 아름답게 담겼어요.
7) 훌라춤과 이미자 선생님
와이키키의 반얀트리 앞에서 열린다는 무료 훌라 공연을 놓치고 난 후 마음이 허했었어요.
그런데, 하와이를 떠나기 직전 공항에서 훌라공연을 볼 수 있었지 뭐예요. 훌라 공연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고 있던 상태였는데 말이지요. 화려한 꽃으로 장식된 하와이 전통의상에다, 여유만만한 우쿨렐레 소리와 함께 어우러진 두 여인의 훌라공연은 기대이상으로 훌륭했어요.
그보다 더 흥미로웠던 건, 비행기 탑승 대기 중에 우리 가족이 이미자 선생님을 마주하고 앉아있었다는 사실이에요. 사실 그분 노래라고는 '동백아가씨' 말고는 잘 모르지만, 익숙한 그분의 모습이 어찌나 반갑던지요. 인사드리고 사인이라도 받고 싶었으나, 좀 피곤해 보이셔서 그저 안 보는 척, 몰래 훔쳐보며 혼자서 즐거워하고 있었어요.
비행기 탑승 시간이 계속 늦쳐줘서 점점 지쳐가고 있던 어느 순간, 비즈니스석 승객들이 먼저 탑승을 하더군요. 탑승구로 사라지는 이미자 선생님의 뒷모습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았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 방법은 잘 모르겠지만, 언젠가 돈 많이 벌면 저도, 위풍도 당당하게 비즈니스석 타고 여행 떠나보렵니다. 그럼 다리에 쥐 날 것 같은 고통과는 작별할 수 있겠지요? ^^
하와이 여행이 변화시킨 건 비단 사춘기 딸내미만은 아니었어요.
우리의 반려닭, 김치가 달라졌어요. 사춘기 딸이 미묘하게 변했다면, 우리의 김치양은 눈에 확 띌 정도로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답니다.
여행 떠나기 전 맡겼던 하남의 농장에 김치를 데리러 간 날, 짝꿍과 나는 김치를 보자마자 깜짝 놀랐어요. 며칠 전 농장에 처음 갔을 때만 해도 제법 오동통했던 김치인데, 그 사이 몰라보게 날씬하고 날렵해져 있었거든요. 알록달록 병아리 친구들과도 잘 지냈는지, 한 공간에서 평온하게 동거하고 있는 중이더라고요.
"닭이 참 신기하네요. 시간 되면 둥지에 들어가서 얌전히 자더라고요. 원래 닭은 알 낳을 때 말고는 둥지에 잘 안 들어가는데..."
농장 주인아주머니가 놀랍다는 듯 말씀하셨어요. 괜스레 흐뭇한 마음에 어깨뽕이 솟아났지요.(사실 닭은 횟대에서 자야 하는 건데.. ㅎㅎ ㅠ)
열흘 만에 본 우리 얼굴을 김치는 알아보는 것 같았어요. 역시, 닭은 사람들의 편견과 다르게 제법 똑똑한 생명체라는 걸 알 수 있었지요.
무엇보다도 김치가 건강해졌다는 사실이 우리를 기쁘게 했어요. 자세가 곧아졌고, 그래서인지 몸도 걸음걸이도 가벼워 보였어요. 아마도 농장에서 제한된 자연식만 먹으면서, 병아리들과 부대끼며 활동적으로 지내서 그런 게 아닐까 싶어요. 그 이후로 지금까지 쭉, 김치는 튼튼한 계란을 세상에 내어놓으며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답니다.
예전에 김치가 아팠던 이유는 '비만닭'이었기 때문일까요. 수의사의 말을 듣고는 비장한 마음을 다졌던 우리였건만, 기껏 비만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헛웃음이 나려 합니다.
날씬해진 김치는 이제 소파에도 풀쩍, 뛰어오르고 '먹보대왕'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식성을 자랑하고 있어요. 김치에 대한 걱정을 한시름 덜어 낸 우리는 이제 그저 흐뭇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김치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어요.
우리가 그때 하와이에 가겠다는 마음을 먹지 않았다면, 그 마음을 실행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면 이런 건강한 변화가 우리를 찾아왔을까요.
끝으로, 우리 가족 하와이 여행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래와 같이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 그동안 <별 준비 없이 떠난 하와이 여행기>의 독자가 되어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