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아일랜드에서 다시 오아후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실감한 건, 지난번 묵었던 와이키키 근처의 숙소로 되돌아와 하룻밤을 자고 난 다음 날 아침이었다. 그 아침,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건, 물로 가득 채워진 커피포트와 컵 그리고 그릇들이었다.
에어비앤비를 통해 예약한 호놀룰루의 숙소는 우리가 그곳에 묵었던 기간 내내 ‘배관공사'를 진행했고, 오전 8시 30분부터 오후 5시까지 물이 나오지 않았다. 엘리베이터에 붙어 있던 관련 안내를 미처 확인하지 못한 우리로서는 꽤나 당황스러운 상황이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숙소 예약 시에도 그에 관한 안내는 일절 없었기 때문이다. 친절한 듯 보였던 숙소 주인에게 속은 기분이 들어, 숙박비 할인을 요구해야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했지만, 주인장도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지는 못했으리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한국의 찜통더위를 탈출한 뒤 만난, 반가운 하와이의 산들바람이, 그 바람에 신나게 머리를 흔들어대던 야자수가 나를 그렇게 만든 게 아니었을까.
처음 그 상황을 맞닥뜨렸던 아침에는, 거품 잔뜩 묻은 칫솔을 치켜든 채 어찌할 바를 모르고 한참을 서성였는데, 웬걸, 이튿날부터는 오히려 물이 나오지 않는 순간을 나름 기분 좋게 즐겼던 것 같다. 추위가 극성을 부리던 어느 겨울날, 아파트 배관이 얼어붙어버린 통에, 어린 아들내미와 근처 상가의 화장실에서 물을 퍼다 나르던 순간을, 생수통에 담긴 물을 아껴가며 화장실 변기에 조금씩 흘려보내던, 웃픈 기억들을 떠올리면서.
오아후로 돌아온 다음 날 우리의 첫 방문 예약지는, 파인애플로 유명한 '돌플랜테이션(Dole Plantation)’이었다. 그러나 이번 연재의 세 번째 에피소드에서 언급했던 'H사'에서의 렌터카 소동 때문에 여정이 지체되어, 우리는 그날 오전에 계획했던 ‘돌농장’에서의 일정을 건너뛸 수밖에 없었고, 다음 여정으로 고려하고 있던 ‘씨 라이프 파크(Sea Life Park)’로 직행해야만 했다.
오후 일정으로 '씨라이프파크'를 잡아 둔 것은 가히 흡족할 만한 선택이었다. 그곳을 방문하기 전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불합리하고 부당한 상황에 다소 기분이 가라앉아 있는 상태였건만, 태평양 바다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아쿠아리움에 들어서자, 눈과 마음이 시원하게 열리며 언제 '그런 일'이 있었나 싶게, 머무르던 내내 입가에 미소가 맴돌았다.
문득 근래 홍보에 열을 올리던 일본 소설의 제목이 떠올랐다. 씨라이프파크는 '바다가 보이는(들리는) 아쿠아리움'이었다. 그래서인지, 평소라면 수족관에 갇혀 있는 바다 동물들이 애달프게 보이기도 했으련만, 씨라이프파크에 있는 녀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이웃해 있는 드넓은 태평양 바다로 탈출을 감행할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나는 좀 더 홀가분한 마음으로 여행자의 지위를 즐길 수 있었다.
씨라이프파크에서 가장 기대되었던 건 돌고래들을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치명적으로 저지른 실수 때문에 우리는 돌고래쇼 시간을 놓쳐 버렸다. 그 실수란, 씨라이프파크 입구에 붙어 있던, '상세 스케줄표' 사진을 찍지 않고 들어간 것이었다. 사실, 실수라고 하기엔 내 능력과 집중력의 문제였다. 지난번 '그린웰 커피농장'이어 이번에도 듣기 평가를 제대로 치르지 못한 탓이었다. 매표소 직원이 '블라블라~~'열심히 설명하던 말 중 '픽처(picture)'라는 단어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걸러 듣는 바람에, '들어가서 사진 많이 찍으라는 말인가 보다’라고만 생각하며 아쿠아리움으로 들어섰던 것이다. 실은 '스케줄표' 사진을 찍고 입장하라는 안내를 한 것이었건만.
돌고래쇼를 보지 못해 남은 미련을, 다른 동물들을 더 세심히 살펴보고, 열심히 머릿속에 주워 담는 것으로 달랬다. 사육사가 없는 빈 공간에서도 부지런히 재주넘기를 하고 있던 물개들도, 백 년은 족히 살았을 것 같은 모습으로 유유히 물살을 가르던 바다거북들도, 몇 해전 우리 곁을 떠난 '초롱이'를 똑 닮은 쌍둥이 모란앵무 녀석들도 어찌나 어여쁜지, 할 수만 있다면 모두 다 집으로 데리고 오고 싶은 심정이었다.
햇살 짱짱한 한낮의 태평양과 인접해 있어서였을까. 간간이 불어오던 시원한 바닷바람에도 시간이 흐를수록 땀방울이 송골송골 솟아났고, 우리는 땀을 식힐 겸 잠시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갖가지 진열품들 중 마그네틱 기념품과 앵무새 인형을 골라 계산을 치르고,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문 채 출구로 나오던 길이었다. 태평양 저 너머에 놓인 수평선을 바라보려다가 기막히도록 아름다운 장면을 맞닥뜨렸다.
떨치지 못하고 있던 아쉬움을 만회해 주려는 '여행신'의 조화였을까. 한 사람당 이십만 원은 족히 드는 '돌고래와의 조우(Dolphin encounters)'가 바로 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공짜로 그 광경을 지켜보자니 누군가가 우리를 제재하지는 않을까 불안한 마음이 일었는데, 눈치 보는 건 우리뿐, 그곳의 누구도 타인이 무얼 하든 신경 쓰지 않는 분위기였다. 덕분에 우리 가족은, 느긋한 마음으로, 돌고래들이 푸르디푸른 바다를 배경으로 사람들과 함께 노니는 광경을 눈에 실컷 담을 수 있었다.
하늘빛을 닮아있던 그날의 바다는, 진주만에서 마주했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태평양을 끼고 있는 아쿠아리움이 여기 말고 또 있을까. 바다 곁으로 곧이라도 뛰어들 것 같던 돌고래 녀석들에게 시선을 내어주고 있으려니, 오전 나절 졸였던 내 가슴도 함께 태평양 저 멀리 실려나가는 것 같았다. 눈앞으로 뛰어드는 것들은 온통 웃음 띤 얼굴들과 여리고 귀여운 생명체들, 그리고 보석보다 찬란하게 빛나던 자연의 모습이었다. 평화로운 풍광 속 우아한 돌핀킥을 지켜보며, 바닷속 인어를 목격했다는 사람도 부럽지 않을 마음이 내 안에 서서히 차오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서 있기를 이십 여분. 땀으로 촉촉해졌던 등이 기분 좋게 건조되어 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오후를 평화로이 음미했다. 지금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모든 것이, 기억에 남을 하와이의 마지막 풍경일지도 모른다는 아쉬움에 젖어들며.
* 돌고래 체험 프로그램 예약 사이트:
https://www.sealifeparkhawaii.com/plan-your-visit/things-to-do/animal-encount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