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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Sep 27. 2024

코나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90년대 중반, 코나의 '우리의 밤은 당신의 낮보다 아름답다'는 노래를 즐겨 불렀다. 그 곡을 듣고 있으면, 한적한 해변 위로 내려앉는 오렌지빛 석양이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았고, 가수 이소라의 몽환적인 목소리가 덧입혀진 가사에 팽팽했던 마음이 느슨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하와이 코나의 밤도 마찬가지였다. 관광객들의 왁자지껄한 소음이 물러간 해변가, 수평선이 노을에 물들기 시작하면, 뛰어놀던 사람들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석양을 즐기는 연인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다. 여행지에서 나의 또 다른 '일상'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아이들 저녁 챙기기에서부터 시작된 저녁 일상은, 마트에서 필요한 물품 구입하기, 다음 날을 위한 각종 빨랫감 세탁하기와 샤워로 이어졌고, 이 모든 과정이 끝나고 난 후에야 나와 짝꿍은 편안한 마음으로 마주 앉아 하와이안 맥주를 즐겼다.



코나(Kona)는, 직전에 머물렀던 빅아일랜드 동부의 힐로(Hilo)보다 일상에 필요한 물품들이 다양하게 갖춰져 있었다. 특히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KTA 슈퍼스토어'는 한국 음식과 관련 제품들이 많아서 저녁거리를 구입하거나, 기타 필요한 것들을 구입하는 데에 매우 유용한 곳이었다. 각종 도시락, 아이들이 좋아하는 불닭볶음면 - 아쉽게도 컵에 든 제품은 없었다 -, 한국의 소주와 눈길을 끄는 싱싱한 열대의 과일들까지. 덕분에 코나에서는 ABC스토어를 기웃거리지 않고도 꽤 만족할 만한 '일상 쇼핑'을 즐길 수 있었다.

여행지에서의 일상을 시작할 때
KTA 슈퍼스토어의 매대

코나의 밤, 가장 기억 남는 순간은, 뜻밖에도, 세탁기를 돌리던 시간이었다. 우리 가족이 머물렀던 '로열 코나 리조트(Royal Kona Resort)'는 숙소와 세탁실이 꽤 멀리 떨어져 있었는데, 세탁실까지 가는 길의 풍경과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나는 좋았다. 코나의 밤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라운지에 앉아 세상 평화로운 표정으로 담소를 나누던 사람들, 미소를 머금은 어르신을 앞에 두고 홀로 춤을 추고 있던 젊은이, 상냥한 미소가 인상적이었던 카운터의 '실버 직원'까지. 횃불로 된 조명이 신비로이 어른거리던 그곳에서 내가 목도하고 있는 모든 풍경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세탁하러 가는 길이 이렇게 즐겁고 아름다울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신통방통한 녀석들

그렇게 도착한 세탁실에서 우리를 맞이한 세탁기와 건조기의 첫인상은 다소 실망스러웠다. 리조트의 규모나 이름에 걸맞지 않게 너무 소박한 모습이었달까. 한국이었으면 벌써 고물상에 들어가 있을 것 같은, 힐로-코나 간 도로를 드라이브하던 중에 목격했던, 버려진 세탁기와도 흡사한 외양을 한 세탁기는, 과연 제대로 작동이 될까 싶은 의심마저 불러일으켰다.  게다가, 그 작동 방법이란 것이 몹시도 생경해 친절한 '실버 직원'의 도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우리는 그날 안으로 세탁을 마치지 못했을는지도 모르겠다. (세탁실 사용 시간이 제한되어 있는 것으로 안내문이 붙어 있지만, 실제로는 24시간 운영되는 것 같다. 세탁기 코인은 카운터에서 오십 센트 단위로 교환해 주며, 세제는 카운터에서 따로 구입해야 한다. 세탁과 건조 각 삼 달러)



그러나 내일모레면 수명이 다할 것 같았던 세탁기와 건조기가, 내게 '서프라이즈’를 시연하듯, 집 근처 코인빨래방의 멀끔한 대형 세탁기와 건조기보다 훨씬 더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안겨주었다. 내가 이제껏 손에 받아 든 그 어떤 세탁물보다도 더 보송보송하고 향긋한. 외양만 보고 그 기능을 지레 평가절하한 나 자신이 무안해질 정도였다. 카운터의 실버 직원이 교환해 준 동전들이 요술을 부린 것이었을까. 거기에 더해, 실수인지 고의인지, 누군가가 세탁기 안에 일 달러를 남겨둔 채 떠난 덕분에, 지폐를 동전으로 한 번 더 바꾸어야 하는 수고스러움도 덜 수 있었으니, 뜻밖에 맞닥뜨린 소소한 행복이, 그날의 피로를 몰아내고 하루의 끝을 아름답게 마감해 주는 듯했다.

그런데,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세탁을 마치고 돌아간 숙소에서 헤어드라이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샤워를 끝낸 후 욕실 한 구석에서 간신히 찾아낸 헤어드라이어는, 마치 80년대를 배경으로 하는 드라마 소품으로 어울릴 만한 것이었는데, 초라한 모습만큼이나 소리도 요란스러웠다. 하지만, 숱 많은 내 머리칼을 만난 드라이어는, 선입견을 기분 좋게 배반하는 반전을 보여주었다. 웬만큼 드라이를 해서는 제대로 건조되지 않는 머리가, 구식 드라이어 앞에서 금세 바삭해지는 느낌이었다. 낡은 건조기에서 빠져나온 우리의 세탁물처럼 말이다.

여행지에서의 일상을 기분 좋게 끝맺으며 마신 맥주 한 캔은, 목을 축여주는 상쾌함 그 이상이었다. 코나의 깊어가는 밤이 그토록 아쉬울 줄 과거의 우리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화산 지대의 아름다움과 노을이 내리는 연인들의 해변이 선연한 장면으로 남았다면, 그 밤의 맥주는 짜릿한 혀끝, 시원한 목 넘김과 다정한 대화가 더해진 오감으로 내 마음속에 각인되었다. 파도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기울이던 맥주는 진정, 사랑이자 행복이었다.



 빅아일랜드에서의 마지막 밤이 아쉬워 잠자리에 들고 싶지 않았지만, 내일의 여행을 위해 억지로 잠을 청하던 그때, 나를 유혹이라도 하듯 창밖에서 끊임없이 경쾌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음악 중간중간 디제이의 흥 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고, 그럴 때마다 젊은 남녀들이, 신선한 거품으로 가득한 맥주와 음악에 몸을 맡긴 채 신나게 춤추는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파도마저 잠들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던 그 밤, 나는 밤새도록 해변을 걷고 싶은 마음을, 음악 소리에 맞춰 흔들리고 싶어하는 육신을, 파도 소리에 실어 오래도록 달래야만 했다.

코나의 밤이 깊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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