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아일랜드의 코나(Kona)는 커피로 유명한 도시로, ‘코나 커피’를 생산하는 '그린웰 농장(Greenwell Farms)'이 있는 곳이다. 커피맛을 잘 모르는 내게 어떤 지역의 어느 원두가 어떻다,라는 사실은 특별한 관심사가 아니다. 그렇기에 코나 커피도 그다지 유의미하게 다가오지는 않았다. 하와이 여행 일정에 그린웰 농장을 넣은 건 순전히 짝꿍의 선택이었다. 그렇지만 유명하다는데, 게다가 '무료 투어'라는데, 나도 빅아일랜드까지 온 마당에 그곳을 그냥 지나치고 싶지 않았다.
짝꿍은 커피를 대하는 태도가 나와 판이하다. 몇 해 전, 꿈에 그리던 커피머신을 부엌 한편 자기만의 공간에 장만한 짝꿍은, 종종 커피 향 달달한 홈카페의 주인장이 되곤 한다. 그럴 때면, 커알못인 나도 은근슬쩍 주문을 넣는다.
"난 카페라테로 부탁해~"
우유를 좋아하는 나는, 종종 우유의 맛을 빌려 커피를 음미한다. 향만큼은 커피가 지구상 그 어떤 것의 냄새보다 향기롭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커피에 꽤나 진심인 짝꿍은, 겉으로 드러내진 않지만, 은퇴 후 ‘실버 바리스타'가 되는 꿈을 가슴 한 구석에 품고 사는 것 같다.
아이들에게 커피는 그저 ‘니 맛도 내 맛도 없는’, 거무죽죽한 음료다. 커피농장에 방문하자는 말에 아이들의 표정이 마치 몹쓸 것을 본 것처럼 구겨졌다. 역시나 사춘기 딸에게서는 "거길 굳이 왜 가?"라는 말이 또다시 튀어나왔다. 설득할 만한 핑곗거리를 찾으려 했으나 나는 성공하지 못했고, "잠깐만 있다가 올 거야."라는, 나중에 거짓으로 드러난 말로 애면글면 아이들을 구슬려야 했다.
그렇게 찾아간 그린웰 농장은, 풍경하나만큼은 기가 막히게 좋은 곳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무료 투어와 함께 할 수 있다니, '착한 가성비' 생각에 투어를 시작하기도 전에 만족감에 젖어들었다. 본격적인 투어에 들어서기 전까지 말이다.
그린웰 농장에는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발그레한 커피 열매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그러니까 농장의 무료투어는, 그 탐스러운 열매들이 초콜릿 빛깔의 향긋한 커피 원두로 탈바꿈하게 되는 과정을 생산 현장의 풍경과 함께 아주 세심하게 설명해 주는 코스였다.
문제는, '아주 세심하다'는 것에 있었다. 관광객들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많았던 가이드는, 우리처럼 원어민이 아닌 외국인이 알아듣기에 상당히 고난도의 속도와 억양으로, 숨 쉴 틈조차 제대로 없을 정도로, 커피가 만들어지는 과정에 대해 설명을 이어갔고, 미국 본토에서 온 듯한 옆의 관광객들이 함께 웃고 떠들고 있던 사이, 단어 하나라도 주워 담기 위해, 학창 시절 영어 듣기 평가를 할 때처럼 안간힘을 쓰고 있어야 하는 그 상황이 나는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그 와중에도 짝꿍은 열혈 학생처럼 귀를 쫑긋한 채, 하와이 언니의 입에 시선을 집중하려 애쓰는 모습이었다. 어떤 대상에 애정을 줄 때 필연적으로 깃드는 간절함이 짝꿍을 그리 만든 것일 테다.
커피 농장에서의 짝꿍은 뒤통수마저 행복해 보이는 사람이었다.
반면, 어느 순간부터인가 ‘에라 모르겠다'는 심정이 되어버린 나는, 가이드의 말을 줄줄 흘려들으며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데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엄마, 이제 그만 돌아가면 안 돼?!"
때마침, 아들 녀석이 지루해 죽을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울고 싶은 사람 뺨 때려준 격이라고나 할까. 아들을 핑계 삼아 나는 짝꿍을 설득해 투어의 3분의 2 지점쯤에서 포기하고 '방문객 센터'로 되돌아왔다.
중도에 돌아온 아쉬움을, 방문자 센터에 세팅되어 있는 커피 원두를 구경하는 것으로 달랬다. 그곳에는 독특하고 고급져 보이는 커피 구성품들이 여럿 있었는데, 기념품으로 구입하거나, 지인들에게 선물로 주기에 제법 매력적인 것들이었다.
그러던 차에 센터 한편을 차지하고 있던, 특이한 맛의 아이스크림들이 아들의 눈에 띈 것이었다.
그린웰 농장의 값비싼 아이스크림이 아들의 혀에서 살살 녹기 시작했을 때, 농장 주인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우리를 향해 너털웃음을 지으며, 귀에 알알이 박히는 ‘정확한 발음’으로 말을 건넸다.
"Finally, he is happy. Ha ha~~"
그가 'he'라고 지칭한 인물은 다름 아닌 아들 녀석이었다. 입에 아이스크림을 가득 문 채, 그제야 행복한 미소를 내밀어 보이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