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귀한 경험들을 하느라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있던 사이 어느덧, 하와이 여행의 끝이 다가오고 있었다.
귀국을 하루 앞둔 밤, 하와이의 산들바람은 이곳에서 첫날 맞이했던 그것과 사뭇 달라진 느낌을 주었다. 낯설고 수줍었던 미소를 걷어낸 채 좀 더 친숙한 얼굴을 하고선 우리를 마주하고 있는 듯했달까.
하와이에서의 마지막 시간은 느린 듯 빠르게 흘러갔다. 여행의 끝자락에서 맛보는 아쉬움이 밀려들던 시간, 우리는 마지막으로 와이키키 해변을 거닐다가, 마감 시간을 얼마 앞두고 돌아온 숙소의 야외 수영장에서, 은은한 조명을 배경 삼아 평화로운 마지막 밤을 즐겼다.
먼저 숙소로 돌아간 딸이 홀로 피로를 풀고 있던 사이, 짝꿍과 아들내미는 수영장에서 신나게 '잠수 타는 연습'을 했고, 나는 그 광경을 휴대폰 카메라로 열심히 담아냈다. 수영장 주변을 둘러싼 채 천천히 흐르던 풍경과 그것을 감싸고 있던 기분 좋은 소음이 잔잔하게 흘러들어 내 안에서 일렁이는 듯했다.
수영장의 선배드에 기댄 채 눈을 들어 위를 바라보니, 색색깔의 조명으로 물들어 있는 숙소 테라스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저마다의 이야기를 꽃피우고 있을 사람들의 모습을 그려보며, 우리의 마지막 밤을 어떻게 마무리 지을까,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인생이라는 게 본디 의도한 대로 흘러가는 법이 흔치 않은 것이라, 그 밤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빛깔로 물들어 갔다.
일찍 잠자리에 들 줄 알았지만, 마지막이라는 아쉬움 때문인지, 집으로 돌아갈 설렘 때문인지, 여느 때와 달리 이불을 박차고 나와 숙소를 거닐던 사춘기 딸내미와, 실내 수영을 즐기고 숙소의 밤풍경을 감상하며 들떠 있었던 나머지 세 가족은, 마지막으로 ABC 스토어에서 사 온 음식 거리들을, 호놀룰루의 밤이 내려다보이는 테이블에 잔뜩 늘어놓은 채, 뜻하지 않은 캠프 파이어를 벌이게 되었다. 학교 수련회의 마지막 날 떠들썩하게 펼쳐지는 그것에 비하면 평화롭기 그지없었지만.
하와이안 스낵, 치킨과 파스타 그리고 과일들로 꾸려진, 그 어떤 산해진미도 부럽지 않던 하와이에서의 최후의 만찬을 앞에 두고서, 온 가족을 위한 허심탄회한 대화의 장이 마련되었다. 하와이를 곧 떠나야 한다는 아쉬움과 무사히 여행을 마쳤다는 안도감이 교차하던 그때, 좀 더 밝아진 아이들과, 조금 더 열린 마음의 엄마, 아빠는 동네 아는 언니와 동생이 함께하면 이러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발랄한 수다쟁이가 되어갔다.
사실 우리가 어떤 이야기를 나누었는지 상세한 기억은 나질 않는다. 지금 생각나는 건, 칡냉면 집의 무서운 언니, 하와이의 아름다운 풍경, 야생닭과 거대한 사람들에 대한 놀라움, 비행기를 타며 느꼈던 것들, 이를 테면, 장시간 비행기를 타는 게 힘들었고 옆 좌석의 아저씨 때문에 화장실도 제대로 가지 못해 불편했다는 딸내미의 투덜거림, 비행기 타는 것은 언제나 스릴 넘치고 즐겁다는 아들내미의 이야기 등이 오갔다는 것이다.
다만 선명하게 떠오르는 건, 분명 하와이로 떠나오기 며칠 전까지만 해도 굳게 닫혀 있던 사춘기 딸의 ‘문’이 어느샌가 고개를 빼꼼 내밀만큼 슬며시 열려있었다는 것, 평소보다 우리 모두 더 많이 웃고 떠들었다는 것, 그리고 온 가족이 함께 오순도순, 오랫동안 이야기를 나누며 ‘화목한 감각'을 느껴본 게 실로 오래간만이었다는 사실이다.
그 어떤 성대한 캠프 파이어도 부럽지 않았던 여행의 마지막 날, 하와이 여행을 통해 우리 안에 비밀스럽게 찾아든 그 무엇인가가 하와이의 산들바람과 함께 기분 좋은 변화를 느끼게 해 주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는 미묘한 차이가, 인간의 주파수 영역 밖에 존재하는 소리와 호흡으로만 느낄 수 있는 산소처럼, 우리와 고요히 함께하고 있다는 것을 온몸으로 감지할 수 있었다.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가족여행을 하게 되면 이런 순간을 또 경험할 수 있겠구나, 쉽지만은 않았던 과정이었지만, 하와이에서의 추억이 우리의 일상을 오래도록 따뜻이 덥혀주겠구나, 하는 것을.
그러자 어린 시절 그림일기의 마지막 한 줄을 채우던 심정으로 문장을 꾹꾹, 눌러 적고 싶어졌다.
‘참 즐겁고 재미있는 하와이 여행이었다. 언젠가 또다시 오고 싶다.’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