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벗들에게 보내는
신우를 천천히 떠나보내고 지난주부터는 다시 일상의 얘기들이 담긴 브런치 글을 올려야겠다고 마음먹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러질 못했고, 저는 브런치 작가 생활 3년이 다 되어가는 시점에 브런치로부터 처음으로 '글쓰기 근력을 키우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글을 오랫동안 올리지 않으면 브런치에서 글쓰기 독려 메시지가 날아온다는 사실을 다른 작가님들에게서 듣고 어떤 모습일까, 조금 궁금했었는데, 생각보다는 좀 밋밋한 느낌이었어요. 제 기대(?)가 컸던 탓인지는 모르겠지만요. ㅎㅎ
브런치의 메시지를 받고서도 글을 올리지 못했어요. 지난주 화요일 밤 이후 혼란스럽게 들끓던 마음 때문에 도무지 글쓰기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날 밤 딸아이에게서 들었던 말이 제 그런 마음을 더 돋우었던 것 같아요.
"엄마, 내 인생 아무래도 종 친 것 같아!"
화요일 밤, 자기 방을 다급하게 뛰쳐나온 딸이, 잠자리에 들려는 제게 했던 말이었습니다. 요즘 한창 고등학교 입학 원서를 쓰는 기간이라 혹여 그와 관련된 일인가, 순간 생각했는데 웬걸, 딸이 던진 말은 제 귀를 의심케 했습니다.
"대통령이 계엄 선포했다는데? 큰일 났어. 우리 이 나라 탈출해야 하는 거 아니야, 엄마?"
이렇게 말하는 딸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중했고, 목소리에서는 절망감이 섞인 듯한 다급함이 묻어 나왔습니다. 저는 곧바로 텔레비전을 켰고, 화면에는 포고령을 선포하고 있는 대통령의 모습이 등장했습니다. 포고문 낭독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지만, 그동안 제 머릿속에는 역사책이나 영화에서나 봤던, '계엄령'과 관련된 온갖 끔찍한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지나가며 동시에 절체절명의 순간에 선 사람처럼 심장이 제멋대로 날뛰기 시작했습니다. 포고문중에서 특히 제 귀에 꽂혔던 건, 여러 번 반복해서 등장했던 '처단한다'라는 무시무시한 단어와 '선량한 국민'이라는 표현이었습니다.
'처단한다'는 단어가 제게 불러일으키는 이미지는, 일제강점기 시절의 일제나 공산국가의 절대권력이 휘두르는 총칼이었습니다. 눈을 가린 채 총살을 당하거나 죽창에 찔리거나, 그 어떤 대응을 할 위치에 있지 못한 힘없는 사람들이 무자비한 힘에 의해 소중한 목숨을 무참히 빼앗기는 그런 상황....
선량한 국민에게는 최대한 불편이 없게 하겠다는 그 표현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권력이 무슨 횡포를 부리더라도 너희는 눈 감고, 귀 막고 있으라는 말. 그저 평범한 어느 날처럼, 내 이웃이, 같은 국민이 불법적이고 불의한 힘에 의해 목숨을 빼앗기는 극악무도한 상황이 벌어지더라도 그저 숨죽이고 가만히 있으라는 말. 우리의 역사는 이러한 상황을 이미 숱하게 겪어 왔으니까요.
어느 날인가 함께 살고 있는 친정엄마에게 물었습니다.
"엄마 세대는 독재정권을 경험했으면서 왜 또 그 후예들에게 표를 주는 거야? 그 시절이 좋았던 거야?"
"평범한 시민들은 괜찮았어. 우리는 크게 불편하거나 그런 건 없었어. 기자들이나 정치인들, 그런 사람들에게나 힘든 시절이었지...."
그때에도 저는 '평범한 시민'이라는 엄마의 말에 화가 났습니다. 엄마가 말하는 평범한 시민이 어떤 뜻을 내포하고 있는지 알기 때문이었죠. 이 땅에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 엄마가 말하는 평범한 시민은 그 반대에 서 있는, 이 사회에서 벌어지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하고 그로서 불의의 세력에 동조하는 집단에 속하고야 마는 그런 시민을 가리키는 것이었으니까요.
저는 제가 특별히 정의로운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저는 평범한 주부로서 제 아이들이 살아갈 이 사회의 미래가 지금 보다 더 나은, 정의롭고 건강한 곳이기를 바라는, 대한민국을 사랑하는 국민의 한 사람일 뿐입니다. 이제 겨우 중학생인 딸아이가 '내 인생 종 친 것 같다'라고 절망적인 표정으로 개탄하는 나라가 아닌, 안심하고 꿈을 펼쳐나가며 몸도 마음도 건강한 성인으로 살 수 있는, 평화롭고 상식적인 나라이길 소망하고 있는 엄마일 뿐입니다.
그래서 지난 토요일 국회 앞으로 달려갔습니다. 사실 그간 집권당의 행태 때문에 좋은 소식을 들으리라는 큰 기대는 걸지 않고 나갔습니다. 다만, 아이들을 생각하며 포기하지 않고 꺾이지 않으리라는 마음으로 그 자리에 함께 했습니다. 차가운 아스팔트 위에서 해가 저물고 밤이 깊어가도록 소리 높여 외치는 시민들과 함께 하며, 그 아름다운 연대에 가슴이 북받치는 경험을 하며, 실망스러운 결과였음에도 이곳에 나오길 정말 잘했다 생각하며, 다음번에는 짝꿍과 함께 더 굳센 모습으로 다시 나오리라 다짐하며 돌아 나왔습니다.
위기의 이 나라를 구했던 건 언제나 함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하는 '평범한 시민'들이었습니다. 이 평범한 시민들을 거리의 애국자로 만들고야 마는 권력의 말로는 분명 비참할 것입니다.
토요일 밤의 실망스러운 결과를 지켜본 더 많은 시민들이 길거리로 광장으로 달려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이 외침은 오로지 국민의 뜻이 정치로 실현될 때에야 끝이 날 것임을, 한 줌도 안 될 유한한 권력을 쥐고 있는 그들이 하루빨리 깨우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입니다.
그날 서울에는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듯 차가운 비가 내렸습니다. 우산을 미처 준비하지 못한 많은 시민들이 내리는 비를 온몸으로 맞으며 목이 터져라 구호를 외쳤습니다.
개중 어떤 분들은 2년이 넘도록, 주말도 반납하고 거리 위로 나서는 분도 계셨습니다. 이태원 참사 유가족들도 함께였습니다. 비인지 눈물인지 모를, 무수한 줄기들이 시민들의 얼굴을 타고 흐를 때도 소리 높여 외치는 목소리는 결코 잦아들지 않았습니다.
그저 일상을 열심히 살아낸 시민들이 왜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몸을 부여잡고 거리로 나서야 했을까요.
그들을 이렇게 만든 건 도대체 무엇이었나요? 이제 그들을 거리로 불러 낸 사악한 민낯들이 수면 위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도 더 명징해지고 있습니다.
12월 7일, 국회의사당 앞. 이 섬뜩하고 비극적인 상황조차도 웃음으로 승화시키며, 차가운 아스팔트마저 뜨거운 열기로 데우던 시민들의 모습에 울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살을 에이는 추위 속에서도 '탄핵!'을 외치며 모여있던 시민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따뜻한 의사당 안의 그들은, 주권자 국민들이 그들에게 부여한 기본적인 의무조차 행사하지 않고 도망쳐 버렸습니다. 등을 보이고 도망간 건 그들입니다. 결국 국민들이 이길 것입니다.
솔직히 저는 20대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회적 이슈에는 관심이 없고, 본인 위주의 삶을 즐기고 있을 거라는... 하지만 이번 집회를 계기로 그러한 제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의 말과 행동을 지켜보며 우리 사회의 희망을 보았습니다. 그들이 치켜든 각종 응원봉들, 아이돌 음악에 맞춰 신명 나게 몸을 흔들며 추위와 좌절감을 이겨나가는 모습.. 사리사욕에 눈먼 자들의 어둠이 결코 국회 앞의 청춘들이 발하는 빛을 이길 수 없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 12월 7일 9호선 국회의사당역 안내방송 *
- 소중한 주말시간 할애하여 시위 가시는 여러분들께.. 날씨가 많이 춥습니다. 따뜻한 옷 챙겨 입으시길 바라시며, 차가운 바람이 여러분들의 촛불을 비껴가길 바랍니다... (시민들의 박수 소리)... 파이팅입니다.
- 천주교 사제단 시국선언문 중에서 -
어째서 사람이 이 모양인가! (중략)
그는 있는 것도 없다 하고, 없는 것도 있다고 우기는 '거짓의 사람'입니다.
꼭 있어야 할 것은 다 없애고, 쳐서 없애야 할 것은 유독 아끼는 '어둠의 사람'입니다.
무엇이 모두에게 좋고 무엇이 모두에게 나쁜 지조차 가리지 못하고 그저 주먹만 앞세우는 '폭력의 사람'입니다.
이어야 할 것을 싹둑 끊어버리고, 하나로 모아야 할 것을 마구 흩어버리는 '분열의 사람'입니다.
자기가 무엇하는 누구인지도 모르고 국민이 맡긴 권한을 여자에게 넘겨준 사익의 허수아비요 꼭두각시. 그러잖아도 배부른 극소수만 살찌게 그 외는 모조리 나락에 빠뜨리는 '이상한 지도자'입니다.
어디서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파괴와 폭정, 혼돈의 권력자를 성경은 "끔찍하고 무시무시하고 아주 튼튼한 네 번째 짐승"(다니 7.7)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는 통에 독립을 위해, 민주주의를 위해, 생존과 번영을 위해 몸과 마음과 정성을 다 바친 선열과 선배들의 희생과 수고는 물거품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우리의 양심과 이성은 그가 벌이는 일들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중략)
힘없는 사람들을 업신여기고 사회의 기초인 친교를 파괴하면서 궁극적으로 하느님을 조롱하고 하느님 나라를 거부하고 있으니 어떤 이유로도 그를 용납할 수 없습니다. 버젓이 나도 세례 받은 천주교인이오, 드러냈지만 악한 표양만 늘어놓으니 교회로서도 무거운 매를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략)
우리는 뽑을 권한뿐 아니라 뽑아버릴 권한도 함께 지닌 주권자이니 늦기 전에 결단합시다. 헌법준수와 국가보위부터 조국의 평화통일과 국민의 복리증진까지 대통령의 사명을 모조리 저버린 책임을 물어 파면을 선고합시다! (이하 생략)
- 2024. 11. 28. 하느님 나라와 민주주의를 위해 기도하며 천주교 사제 1,466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