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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뉴 Dec 19. 2024

기울어진 추 앞의 중립이란

4학년 개구쟁이들이 교실로 몰려들더니, 오후의 햇살이 비쳐드는 교실 바닥에 옹기종기 앉아 향기도 고소한 주전부리를 나눠먹고 있다. 녀석들이 내가 있는 교과전담실에 찾아온 이유인즉슨 '선생님을 도와주고 싶다'는 것. 하지만 아이들의 관심사는 교실을 장식하는 것보다 친구들과 조잘조잘 수다를 떨며 선생님이 무얼 하고 계신지 관찰하는 일인 듯하다.


"선생님, 저희 장식하는 거 너무너무 좋아해요!!"


시국마저 어수선한 팍팍한 학교 현장에서 조촐하게 연말 분위기라도 내보고자 크리스마스 장식을 하려는 내게 아이들이 떼로 달려와 입을 모아 외친 말이다. 하기야 얼마 전 핼러윈 때도 이와 비슷한 풍경이 펼쳐졌었다. 원래 핼러윈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나였지만, 이태원 참사 이후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지나치지 못하는 핼러윈, 나는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나만의 방식으로 핼러윈을 즐기고 동참하며 그날을 잊지 않으려 한다.


왁자지껄 아이들의 활기가 떠나간 텅 빈 교실에 홀로 앉아 있자면, 문득 내가 지금 이곳에 있는 게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중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다 지자체 공무원을 거쳐 초등학교 교사의 자리로. 스스로 미련 없이 떠나갔던 학교 현장에 다시 교사로 돌아와 있는 내 모습이 어리둥절하다가, 재미있다가, 실소가 나왔다가, 궁극에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 그나마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일까, 하는 생각에 이른다. 그러다 이내 얼마 전 있었던 일이 떠오른다.

그날, 수업을 마치고 교실 뒷정리를 하고 있던 나를 교감선생님이 찾아왔다. 교감이 개인적으로 교사를 보러 오는 대부분의 상황에는 그리 좋지 못한 소식이 동반되는 것이기에, 교감의 얼굴을 보자마자 나는 무엇이든 씩씩하게 대처하겠노라 마음을 다잡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교감에게서 나온 말은,


"학부모님에게서 민원이 들어왔어요."였다.


그 민원의 요지는, 내가 교사로서의 '중립성'을 지키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당 학부모가 말하는 교사의 중립이란 그 어떤 정치적 상황에서도 옳고 그른 것에 '똑같은' 비중을 두어 얘기해야 한다는 것. 그러니까, 전시 상황도 아닌 평화로운 어느 날, 급작스럽게 발표된 대통령의, 말도 되지 않는 계엄령에 전 국민이 가슴을 쓸어내렸던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도 어느 것이 더 옳고 그르다고 무게를 두어 아이들에게 이야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정치적으로 많이 편향되신 분들이 이런 민원을 넣는 것 같습니다…”


앞으로의 수업에 참고해 달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조심스럽게 덧붙이며 교감이 교실을 나서던 순간, 나도 모르게 짙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중립'이라는 두 글자가 이토록 부당하고 불합리하게 느껴지게 하는 일부 국민의 이 같은 상황 인식이라니. 고통 앞에서 중립을 논한다는 그 자체가 힘없는 자에게 가해지는 억압이자 폭력과도 같은 것일 텐데,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무게가 확연히 다른 추 사이에서, ‘기계적인’ 중립을 지킨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며, 어찌 온당하고 정의로운 일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럼에도 그 학부모의 요구는, 교사로서 아이에게 무엇이 옳다고 말하려 들지 말고 그저 침묵하고 있거나, 양비론적인 입장을 취하라는 것이었다.


탄핵 가결의 순간 내질렀던 기쁨의 환호성도 잠시, 뉴스나 신문 기사를 보며 다시금 답답한 마음이 올라온다. 전 국민을 두려움에 떨게 한 자들은 반성을 하기는커녕 자신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목소리를 높이고, 오히려 탄핵 가결에 동참한 이들을 공격하며 탄핵 절차를 고의적으로 지연시키고, 자신들에게 유리한 지형을 만들기 위해 갖은 수단과 방법을 쓰고 있다. 탄핵촉구 집회에 참여한 시민들을 위해 '선결제' 행렬에 동참한 연예인들의 리스트를 만들어 비난하고 위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믿기 힘든 기사까지 눈에 띈다. 민주국가라고 믿고 있던 조국에서, 주권자로서 이토록 섬뜩한 위협을 경험하게 될 줄이야….


건강한 보수가 사라진 자리에 어른거리던 극우의 그림자가, 이제 완전히 정체를 드러내고 그 자리를 꿰찬 채, 이 사회를 몰상식과 비합리의 극단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 같다. 길지 않은 시간 내에 제발 이 나라의 불행이 끝나기를, 그리하여 무거운 마음으로 저 해맑은 아이들의 얼굴을 마주해야 하는 고통의 시간을 더 이상 겪지 않아도 되기를, 오늘도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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