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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밤 산책길에는

by 지뉴

나는 산책중독자다. 하루를 산책으로 마무리하지 않으면 어쩐지 갓 지은 옷을, 마감을 제대로 하지 않은 채로 세상에 내어놓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렇기에 거의 매일 밤 산책을 즐긴다. 혹독한 추위로 입김마저 금세 얼어붙을 것 같은 겨울밤이나, 거센 빗줄기가 눈을 흐리게 하는 날이 아니고서는.



산책은 심신의 건강과 수면의 질을 개선시켜 주는 효과가 있고, 뇌에 충분한 산소를 공급해 주어 집중력과 사고력을 향상해 새로운 아이디어를 떠올리는 데 도움을 준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이야기를 구상하고자 할 때의 나는, 평소보다 더 긴 산책을 하며 이제껏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세계를 다녀오기도, 설레는 맘으로 주인공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엿듣는 기회를 즐기기도 한다.




오늘도 나는 짝꿍과 함께 산책을 나선다. 한여름 낮의 더위가 슬며시 물러나간 뒤, 습기의 끝자락이 살짝 걸쳐져 있는 밤공기에는 청명한 풀벌레 소리가, 비 온 뒤 흙에서 날 법한 정겨운 내음이 떠돌고 있다. 하루치의 무더위를 잘 견뎌낸 나에게 이 계절이 매일 주는 선물과도 같다. 여름밤 대기에 잔잔하게 출렁이는 자연의 소리는, 이제 곧 우렁찬 매미의 울음소리를 파도처럼 실어 올 것이다. 마침내 지상의 성충이 된 매미가 자신에게 남은 마지막 열정을 발산하는 찰나의 시간, 암컷을 향한 외침에는 가슴을 먹먹하게 하는 뒷 이야기가 실려 있다.



산들바람 같은 여름의 손길이 행복의 감탄사를 이끌어 낼 때, 길 건너편에 서 있는 반려견 가족들의 모습이 시야에 걸려든다. 덩치 좋은 누렁이와 꼬맹이 몰티즈가 서로 반갑게 인사 나누는 사이, 녀석들을 흐뭇하게 지켜보는 사람 가족의 얼굴에는 웃음이 넘실넘실 차오르고, 그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곧 터질 듯한 탄산수만큼이나 경쾌하다. 멀리서 바라보는 우리의 입꼬리가 마치 그들의 자기장에 걸려들기라도 한 듯 요동친다.



천천히 내딛는 발걸음은, 한낮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대지에 살포시 온기를 더하며 공명하고, 대지에서 스며 나온 건강한 기운이 발끝으로, 몸으로, 이내 머리 위까지 부드러운 모포처럼 나를 감싼다. 편의점 앞 테이블에서 알싸하게 코를 찌르던 맥주 거품에 괜스레 분주해지던 마음이 사그라들 때쯤, 이웃 아파트 단지의 무지갯빛 분수가 축포처럼 솟아오르며 개구리의 합창에 형형색색 멋진 배경을 더한다. 낮의 소란함은 조명이 아스라이 남은 도서관 뒤로 자취를 감추고, 간간이 도서를 반납하는 이들의 손끝에는 성미 급한 가을의 정취가 아른거리는 듯하다. 근처 너른 잔디밭 한켠 허수아비처럼 서 있는 '텐트 금지' 표시판은, 밤을 지새워 캠핑하고픈 청개구리의 마음을 불쑥 소환해 낸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 서늘한 달빛을 맞으며 되돌아가는 길에 쉬이 곁드는 아쉬움이, 윙윙, 거대한 날갯짓과도 같은 소리를 내며 빛을 내뿜는 아이스크림 가게로 발걸음을 끌어당긴다.

무더위와 잘 공생한 하루, 차가운 감각에 혀를 내맡기고 기쁜 마음으로 오늘에 작별을 고해 본다. 스르르 녹아 사라지는 감촉을 따라, 잊고 싶은 순간들을 떠나보내며.



산책을 좋아하시나요?

당신이 좋아하는 산책길의 풍경은 어떤지 궁금해지는 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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