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사춘기에 들어 선 이후로 가족여행은, 거의 예외 없이, 설득의 과정을 거쳐야 성사되는 귀한 행사가 되어버렸다. 아이가 엄마 껌딱지였던 시절, 집 앞 마트에 가자고만 해도 아이는 눈을 반짝이며 신이 나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폴짝폴짝 뛰어댔건만, 무심히 흐른 세월이 아이를 제 방 한편에 단단히 붙들어 맨 것인지, 집을 벗어나는 것 자체가 아이에게 몹시 하기 싫지만 해내야 하는, 버거운 미션이 되어버린 모양이다.
연휴를 맞아 오래간만에 남산으로 가족 나들이를 가자고 말을 꺼낸 순간에도 그랬다. 딸램은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으로 가겠다는 것인지 안 가겠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을 내비쳤고, 아들램은 '가고 싶지 않은데...'라는 말을 반복했다. 휴일의 대부분을 컴퓨터 게임의 세상 속에 빠져지낼 요량이었을 것이다. 심술궂은 엄마의 마음이 그 욕망에 딴지를 걸고 싶어 했다. 아이들을 꼬드길 수완이, 지금 남산에 가야 할 적절한 맥락이 간절했다. 가족나들이를 갈 운이 작용한 것일까, 그 순간 최근 전 세계적으로 인기몰이 중인 ‘케이팝 데몬 헌터스(케데헌)'가 흐뭇한 미소와 함께 떠올랐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에 남산타워 나오잖아. 요즘 관광지로 아주 인기가 좋대!"
"엄마는 뭘 그런 걸로 호들갑들이야. 사람들 바글바글 할 텐데. 으휴..”
아들램의 입에서 나온 '호들갑'이란 세 글자에 순식간에 나는 애니메이션 보고, 주책맞게 호들갑이나 떨어대는 철딱서니 없는 엄마가 되어버렸고, 당일치기 가족 여행은 산 넘고 바다 건너가 버리는 듯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건 딸램이 관심을 보였다는 사실이다. 얼마 전에 둘이 함께 '케데헌'을 본 보람이 느껴졌다. 나는 딸램부터 확실히 내편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필사적으로 한 마디를 덧붙였다. 기특하게도 딸이 내게 넘어와준 덕에 결국 혼자 남은 아들램도 마지못해 남산행에 동참하기로 했다. 딸은 남산이 케데헌의 배경이라는 사실과 더불어, 산 정상에서 먹는 컵라면과 빙수 그리고 멋진 사진으로 남길 만한 야경에 마음이 동한 모양이었다.
사실, 얼마 전에도 나와 짝꿍은 남산에 올랐다. 남산도서관 근처에 있는 독일문화원(Goethe-Institut)에 가기 위해서였다. 우리는 평소 독일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 생각해 보니 둘 다 독일문화원에 가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몇 해 전 함께 했던 '남산다크투어(dark tourism)'의 즐거운 여운, ‘왕돈가스’와 온 가족 독일여행에 대한 기대감이 더운 날씨에도 우리를 남산으로 이끌었던 것 같다. 게다가 어쩐지 아이들이 유아기였던 어느 밤의 남산 풍경이 자꾸만 떠올랐다.
몇 해 만에 다시 찾은 저녁 무렵의 남산은 아들램의 예상대로 사람들로 북적였다. 신기한 건 우리가 마치 외국에 와 있는 듯 느껴졌다는 점이다. 애니메이션 한 편의 영향력이 이 현상을 이끌어낸 전부는 아니겠지만, 분명 제법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남산을 오르며 심심치 않게 케데헌을 언급하는 이들을 목격했다) 케데헌의 주요 캐릭터인 '루미'처럼 보랏빛 머리를 땋은 관광객도 눈에 띄었다. 다시금 콘텐츠의 힘을 느끼던 순간, 이야기의 세계가 지닌 무한한 가능성에 가슴이 벅차올랐다.
'국립극장 해오름극장'에서 '01A' 버스를 타고 남산으로 향한 건 해가 지기 전, 저녁 여섯 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남산타워에 이르기 전 버스를 내려, 삼십 여 분 대기 끝에 저녁식사를 해결하고 나니 해는 이미 산 아래로 사라져 있었다. 케이블카를 타기 위해 다시 한 시간 가까이 기다리다가 마침내 남산타워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타워가 파란빛 조명에 물들어 있었는데, 아래에서 올려다 보이는 웅장한 탑의 자태에는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마주할 때처럼 그저 묵묵히 빠져들게 하는 마력이 느껴졌다.
탑에 오르지는 않았다. 최종 목적지로 여겼던 그곳 대신 우리는 정상을 눈앞에 둔 기분 좋은 설렘을 만끽했다. 행복한 표정의 사람들에 섞여 들어 고급 호텔의 코스 요리도 부럽지 않은 남산타워표 컵라면과 추로스가 들어간 아이스크림(이름이 '딸기아이스츄'였는데 추천할 만한 맛이었다)을 나눠 먹었다. 거기에는 가성비를 두드려 본 세속적 계산이 작용했다. 그러나 열린 공간에서, 거대도시가 빚어낸 광활한 불빛의 바다에 시선을 흠뻑 담그고, 왜 ‘남산타워'를 ‘N서울타워'라는 이상한 이름으로 바꾼 걸까, 하는 시답잖은 질문과 대답을 나누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야경에 심드렁한 아들램도 야경을 바라보며 먹는 '아이스츄'에는 만족해했고, 키링 뽑기와 은은한 조명이 밝혀진 정자에서 먹는 컵라면은 딸램 안에 잠들어 있던 흥세포를 자극하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딸과의 멋진 인생샷을 건져냈다. 왠지 모르겠지만, 야경을 담아내느라 분주한 딸과 나란히 서 있는 나의 뒷모습을 보며 밀려든, 무어라 명명하기 힘든 감정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머무를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한 시간쯤 머무르다 우리는 남산을 내려왔다. 이번에는 케이블카를 타지 않고, 어둠이 파고든 산책로를 조심조심 걸어서. 드문드문 불빛이 있었지만, 남산에서 해오름극장으로 이어자는 밤의 산책로는 담력테스트를 하기에 적합할 정도로 스릴이 넘치는 코스였다. 산책로로 갑자기 뛰어드는 풀벌레, 무시로 얼굴로 난입하는 날개 달린 작은 생명체들, ‘전설의 고향’을 소환시키는, 자연이 들려주는 요상한 소리까지..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긴긴 줄이 섬뜩해 들어선 산책로에서 우리는 없는 솜털마저 돋아나는 듯한 긴장감을 맛보았다. 언젠가 함께 했던 '귀신의 집'에서보다 더 서로에게 밀착해서 손을 꼭 잡고, 괴성 끝에 웃음을 터뜨렸다.
흥건해진 땀이, 산책로를 벗어나 해오름극장이 보일 때쯤에야 현실의 감각으로 느껴졌다. 이윽고 커다란 태극기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러닝크루'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더위와 치열하게 싸우며 긴 러닝 코스를 완주했을 그들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동시에 떠올랐다. 건강한 성취의 기쁨을 벗들과 나누는 그들의 모습이 아름다워 보였다.
선득하고 고요하게 불 밝히고 있는 해오름극장을 스쳐온 바람이 등 뒤의 땀을 훔쳐 달아났다. 셔츠는 꿉꿉하고 종아리 근육은 당겨왔지만, 바로 앞 주차장에서 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고,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민들레홀씨처럼 산들산들 공기를 떠돌았다.
살아있는 게 이런 거지,라고 마음속으로 읊조리며 나는 집으로 돌아가 무엇으로 하루를 마무리할까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