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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급류” 그리고 쓰는 마음

by 지뉴

때때로 나를 둘러싼 세상 모든 것에서 문학적 향기가 뿜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나무 한 그루, 뺨을 스치는 바람 한 줄기, 도로를 오가는 자동차들에서도. 이 모든 것들이 제 안에 담긴 각자의 귀한 이야기들을 내게 속삭여주는 듯한 느낌이 들 때면 '구름빵'을 먹은 홍비라도 된 듯 몸도 마음도 지상에서 둥둥 떠오른 기분에 빠져든다. 소설 "급류"를 쓴 정대건 작가의 강연을 듣고 온 날 밤에도 그랬다.


정대건 작가가, 종종 들르는 지역도서관에서 흥미로운 주제로 강연을 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참가신청한 것이, (주최 측에 따르면) 높은 경쟁률에도 불구하고, 운 좋게 당첨이 되어 가게 된 자리였다. 소설을 애정한다면서 부끄럽게도 나는, 불과 몇 주 전까지 그의 이름도, 작품도 알지 못했다. 3년 전쯤 나온 그의 장편소설 "급류"가 작년 하반기부터 2030 여성들에게 폭발적 인기를 얻으며 역주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에야 호기심에 그의 소설을 구입해 읽어 보았고, 때마침 근처에서 예정된 그의 강연에 가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마음이 되어버린 것이었다.


소설 “급류”의 역주행은, 한 인플루언서가 "급류"를 읽고 눈물 흘리는 모습을 영상으로 올린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솔직히 나는 이 이야기를 읽으며 눈물을 흘릴 만큼 감정 이입이 되지는 않았다. 살짝 울컥해지는 순간들이 있긴 했으나. 스스로 문학적 감수성이 메마른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함에도 이런 반응이 나오는 것은, 어쩌면 2030이 아닌 나의 세대적 위치 때문일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정대건 작가의 소설 "급류"는 흥미로운 지점들이 꽤 있는 작품이다. 무엇보다 “급류”가 숏폼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기꺼이 지갑을 열어 책을 구매하게 한다는 점, 대형서점의 문학 코너에서 "급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청년들의 목소리를 다른 세대의 누군가가 기분 좋게 흘려듣는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이 나는 무척 흥미롭다. 게다가 그의 이야기는 앞으로 소설을 계속 쓰고 싶은 내게 희망처럼 다가오기도 했다.


청년 감독 정대건을 소설가로서의 길을 걷게 만든 건 그가 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한 짧은 문구였다.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고군분투했던 그는, 그간 쌓아온 커리어와 감독으로서의 꿈을 접어야 할 만큼 큰 실패를 겪고 실의에 빠졌을 때 도서관을 찾았다. 그곳에서 그는 ‘다독다독. 꿈을 응원해.'라는 문구를 운명처럼 맞닥뜨렸고, 상처받은 그의 마음이 토닥토닥 위로와 격려를 받는 듯 느꼈으며, 그 이후 '다독'을 하며 그동안 영상으로 이야기를 풀어내던 그의 삶을 소설에 던져보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영화감독 출신인 그의 문장들은 시나리오를 읽는 듯 장면 중심으로 속도감 있게 전개된다. 다가가기 쉽고 편안한 느낌을 준다. 우리가 통상적으로 신춘문예 출신들에게서-그는 한경신춘문예로 등단했다-기대하는 수려한 문장들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렇기에, 긴 호흡의 문장에 익숙하지 않은 2030 세대가 그의 작품에 열광하고 있는 것일 테다. 이 지점에서 나는 글을 쓰며 무시로 찾아오는 좌절감 뒤에 숨어 있는 희망이 보이는 것 같았다. 범접하기 힘들 만큼 아름다운 문장을 창조해 내는 이들로 가득한 문학의 세상이지만, 당신도 계속 써도 된다고, 앞으로 나아가다 보면 이리도 멋진 세계 어딘가에는 당신을 위한 자리도 있으리라고 그의 삶이, 그의 이야기가 응원을 보내주는 것 같았다.


한류가 전 세계적으로 큰 파급효과를 일으키고 있는 지금, 한류만의 멋에 빠진 외국인들이 하는 이야기가 있다. 어렸을 적부터 할리우드 영화를 보고 자랐고, 여전히 미국 드라마나 영화를 쉽게 접하지만, K 콘텐츠들이야말로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거리를 좁혀주는 매력이 있다는 것. 먼 나라에서 건너온 서사이지만 깊은 공감대를 형성해 준다는 것. 단순히 허구가 아닌, 지금 이곳, 나와 너에게 포개어지는 이야기임을 일깨워준다는 것이다.


정대건 작가의 강연을 듣고 돌아오는 길, 나도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간절함이 끓어올랐다. 너와 나, 그와 그녀 그리고 우리를 떠올리게 만드는 핍진성 있는 이야기를… 그 마음이 식어 내리지 않아, 나는 지름길을 놔두고 부러 먼 길을 돌고 돌아, 평소보다 두세 배쯤 더 느리고 긴 걸음을 걸었다. 밤이 내려앉은 거리, 조명 아래 모습을 드러내는 모든 것들이 내게 나지막이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러자 글을 쓰겠다고 다짐했던 어느 날의 두근거리던 마음이, 그즈음 내 안 깊이 와닿았던 책의 글귀들이, 마음이 팽창하다 못해 폭발할 것만 같았던 순간들이 선연하게 되살아났다. 인생의 장애물이, 잘 풀리지 않는 삶이 결국 자신에게 소중한 문학적 자산이 되었다는 정대건 작가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매미울음소리가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열대의 밤이었지만, 나는 귀가를 미루고 싶었다. 문학의 향기가 온통 퍼져있는 듯한 거리를 오래도록, 음미하며 걷고 싶었다.

바로 그거다. 인생을 을이 아닌 갑으로 사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내 삶을 내 뜻대로 지휘하는 기분을 느끼고 싶어서 우리는 무언가에 몰두한다.
작은 것일지라도, 능동적으로 몰두하는 창작 행위에는 인생을 손으로 쥐고 가는 자의 기쁨이 밴다... 결과를 생각하지 않고 일단 뛰어드는 일의 귀함이여.


나는 완벽주의와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기로 한 뒤에야 마음이 편해졌다...
글쓰기의 즐거움은 치밀어 오르는 이야기를 사심 없이 꺼내놓는데서 시작한다고 믿는 까닭이다. 가능하다면 즐거운 마음으로 훨훨 쓴 다음, 시간을 들여 마음에 들 때까지 공들여 수정하는 게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안목을 믿고, 찬찬히 퇴고해 밖으로 내놓기. 이 과정 역시 즐겨야 한다. 물론 고단할 테지만, 창작의 고통 속에서도 충만함이 느껴진다면 잘하고 있는 것일 테다.
- 박연준 시인의 "쓰는 기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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