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하고도 11월. 거리는 곧 연말 분위기로 갈아입느라 분주해지겠지요. 시간은 사정없이 흐르고, 그럴수록 저는 언젠가 다가올 노년의 삶에 대한 생각이 깊어집니다. 가능한 오래도록 사회생활을 하고 싶은 저로서는, 정년이 없는 일을 생의 마지막 업으로 삼고 싶은 소망이 있어요. 동거 중인 친정 노모를 지켜보며 책이야말로 오랜 벗으로 삼기 참으로 좋은 대상이라는 믿음이 쌓여갑니다. 덕분에 새로운 꿈이 생겼어요. 작은 도서관의 주인장이 되어보리라는 꿈이요. 도서관에 관심을 갖다 보니 시니어도서관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어요. 우리나라는 이미 한 해 전 초고령사회에 진입했고, 앞으로 노년 인구는 더 늘어나겠지요. 자칫 사회에서 소외되기 쉬운 노년층을 위해 도서관이 만남과 연대의 훌륭한 구심점이자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다리가 불편한 분들에게는, 도서관이 한계가 없는 세상의 다리가 되어줄 것이라고도요. 그렇기에 제 꿈에 대한 신뢰와 그만큼의 간절함이 함께 커지고 있는 것 같아요.
도서관 관련 소식에 안테나를 세우고 있다 보니, 경기도서관이 문을 연다는 사실을 일찍이 알게 되었어요. 지난 10월 25일 광교신도시에 문을 연 경기도서관은 국내 지방자치단체 도서관 중 최대규모라고 합니다. 현재 소장하고 있는 장서들만 34만여 권(전자책 14만 8천여 권 포함)인데 점진적으로 늘려갈 예정이라고 하네요. 제가 무엇보다 경기도서관에 관심이 갔던 건, 경기도서관이 '열린 플랫폼'으로서 기능하겠다고 선언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이는 경기도서관의 독특한 내부구조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지상 1~5층, 연면적 2만 7795제곱미터 방대한 면적을 자랑하는 경기도서관에는, 각 층이나 공간을 분리하는 (가)벽을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거대한 나선형 구조로 연결되어 있는, 계단 같지 않은 계단을 오르다 보면, 내가 지금 있는 곳이 몇 층인지 아리송해지고, 층을 오르고 내려왔다는 감각도 거의 느껴지지 않아요. 마치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의 공간 어딘가를 걷고 있는 듯한 기분에 빠져드는데, 공간 전체를 아우르는 빛깔이 초록초록해서, 산뜻한 숲 속을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해요.
공공도서관이라고 하면 대개 경직된 분위기 속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 책을 보거나 공부를 하는 이들을 떠올리게 되는데, 경기도서관은 햇살이 그윽하게 비쳐드는 아름다운 갤러리같은 곳곳에서, 자유로운 표정과 자세로 책을 보는 이용자들마저 마치 멋진 작품 속 오브제처럼 다가옵니다. 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의자들조차 예술작품의 면모를 띠고 있어요. '친환경 도서관'답게 쓰레기를 재활용해 만든 의자가 시선을 끌고, 버려진 재활용 쓰레기가 새로운 가치를 얻는 공간이 창작자들에게 열려 있습니다. 위에서 말씀드린, 경기도서관을 초록숲처럼 만들어주고 있는 것도, 벽에 그림처럼 심어져 있는 '스칸디아 모스'덕분이에요. (이 이끼는 공기를 정화하고 소음을 줄여준다고 하네요)
제가 짝꿍과 함께 경기도서관을 찾은 건 평일 점심 무렵이었어요. 그럼에도 근처에서 온 직장인들로 도서관은 붐볐습니다. 경기도서관 바로 뒤편에 경기도 신청사와 경기도교육청이 자리하고 있거든요. 한 가지 재미있었던 장면은, 도서관에 마실 나온 직장인들의 표정이었어요. 저와 짝꿍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긴 하지만, 그들의 얼굴에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이의 얼굴에서 볼 수 있을 법한 표정이 떠올라 있었는데, 스스로는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았어요. 상상해 보세요. 한 손에는 도서관 1층 카페에서 테이크아웃한 커피를 들고, 감탄하느라 살짝 열린 입술에 휘둥그레 해진 눈으로 주변을 연신 두리번거리는 직장인들을요. 얼마나 사무실로 돌아가기 싫었을까요. 그도 그럴 것이, 경기도서관에는 볼거리도 정말 많고, 휴식공간도 이보다 더 훌륭할 수없겠다 싶을 정도로 잘 갖춰져 있어요.
어린이도서코너를 지나노라면 시원하게 물이 낙하하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도서관 중앙 홀 전면에 설치된 인공폭포에서 나는 소리랍니다. 물 흐르듯 이동하게 설계되어 있는 공간에서 이용자들의 발걸음이 흘러가고, 서가마다 책과 풀잎이 어우러진 향기가 부유하고,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차이코프스키의 피아노 협주곡 연주가 대기를 부드럽게 감쌉니다. (클래식한 대형 스피커가 도서관 한편에 세워져 있었어요) 가을 오후의 햇살이 스며드는 창가에서 이용자들은 안락의자에 편안한 자세로 기대어 음악에 귀를 기울이고, 표지만큼이나 어여쁜 이름을 얻은 책들을 곁에 끼고선 독서삼매경에 빠져들지요. 하루가 48시간이라고 해도 모자랄 것 같은 느낌입니다. 이러니 점심시간에 잠시 들렀다 가는 인근의 회사원들은 도서관을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울 수밖에 없겠다 싶어요.
경기도서관에서 제 마음을 가장 사로잡았던 건, 도서의 종류를 구분해 놓은 방식이었어요. 보통 도서관에서는 문학파트, 역사철학 파트와 같이 도서를 분류해 놓잖아요. 하지만 경기도서관에서는 도서를 분류하는 데에도 문학적 고심을 들였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예를 들어, 여행 서적 코너는 '길 위에서 배우는 삶-세상을 걷는 시간' 그리고 고전서적코너에는 '고전, 삶의 문장들-시간을 건너온 이야기, 여전히 현재인 책'이라는 문구가 표지판에 새겨져 있어요. 이 짧은 문구 자체만 해도 얼마나 아름답고도 훌륭한 문학적 표현인지요! 이렇게 정성스러운 안내판들이 층층마다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로 있으니, 요 녀석들만 찾아다녀도 몇 시간이 훌쩍 지나갈 듯합니다.
지역도서관에 자주 들러 책구경하는 것을 즐기는 편인지라, '새롭고 신기하다'라는 느낌을 받게 되는 책은 흔하지 않아요. 그런데 경기도서관의 어린이도서코너에서 아주 흥미로운 책을 발견했답니다. 여러분은 혹시 심해에도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시나요? 보통 '심해'라고 하면, 햇빛이 들지 않아 생명체의 광합성이 가능하지 않은, 수심 200미터 이하를 말한다고 해요. 100미터 전력 달리기의 출발선에서 보이는 결승선과의 거리마저도 아득하게 느껴지는 저로서는, 바닷속 200미터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깊이로 다가오는데요, 무려 수심 3천 미터 이하에 사는 상어가 있다고 합니다. 이름하여 '그린란드상어'. 녀석의 수명은 자그마치 오백 년도 더 된다고 해요. 의아한 점이, 녀석이 최초로 발견된 때가 1801년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수명이 오백 년 이상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을까 하는 것이에요. 탄소측정 같은 과학적 방법들이 동원되었으리라 어렴풋이 짐작은 가지만요.
경기도서관은, 공간 작은 부분 하나하나에서도 세심한 손길이 느껴졌어요. 우리나라가 시민들의 문화 공간에 많은 공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이 감동스러울 정도였습니다. 최근 제가 사는 시에 개관한 도서관에서도 감탄을 멈출 수가 없었는데, 경기도서관은 시민들에게 그야말로 빛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현 대통령이 도지사시절 경기도서관 건립을 추진하기 시작했다고 들은지라, 투표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되기도 했고요.
바쁜 일정 관계로 그리 오래 머무르지는 못했지만, 다음을 기약하며 도서관 1층의 카페로 향했습니다. 그런데 커피 포장조차도 신박한 것이 아니겠어요! 재활용하기 딱 좋은 소재로, 심플하고 날렵하고도 휴대하기 참으로 좋은 포장에 담긴 커피를 기분 좋게 홀짝이며, 짝꿍과 저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이끌고 도서관을 나섰습니다.
참고로, 경기도서관은 주차공간이 광활해 자차 이용도 추천드리고 싶어요. 주차는 기본 두 시간 무료이고요.
하고 싶은 말을 다 쓰려들면 글이 너무 길어질 듯하여 나머지 생각나는 것들은 사진으로 보여 드릴게요. 지방에 계시는 분들은 방문이 쉽지 않으시겠지만, 언젠가 소풍 삼아 (아이와 함께) 느긋하게 들러 보시면 즐거운 시간 보내실 수 있을 거예요. 그만큼 책을 애정하는 이들에게 경이로운 공간이랍니다. 추측컨대, 머지않아 경기도서관은 책과 이야기를 사랑하는 이들의 성지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비록 한 시간 남짓밖에 머무르지 못했지만, 제게 일 년치 행복을 선물해 준 곳이었어요. 다음번에 경기도서관에 가게 되면 좀 더 여유롭게, 아니, 하루 종일 개기다가 와야겠습니다. 해 질 녘까지 뛰놀던 어린 시절 골목길에서처럼요.
* 대중교통: 지하철 신분당선 광교중앙역 4번 출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