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과 외출을 하고 돌아온 집, 귀가하지 얼마 되지 않아 딸아이 방에서 짜증 섞인 외침이 들려왔다.
"엄마! 내 방 이불이 왜 이래?!!"
평소 벌레가 출몰해야지 그 정도의 데시벨로 나를 찾는 딸인지라, 나는 순간적으로 딸의 이불 위에 정체 모를 벌레의 사체라도 놓여있는 것인가 보다,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렇게 달려간 딸아이 방 침대 위에는, 내가 상상한 다리 열 개의 벌레 대신, 딸이 어린 시절 덮던 진분홍빛 헬로키티 이불이 단정하게 펼쳐져 있었다.
"원래 내가 덮던 이불은 어디로 간 거야? 또 할머니가 나 몰래 내 방 들어온 건가?!"
우리가 외출한 사이 집에 있었던 단 한 명의 인물은 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친정 엄마였으니, 딸의 추측은 백 퍼센트 사실로 판명될 터였다. 나도 모르게 묵직한 한숨이 단전으로부터 올라왔다.
이전에도 친정 엄마는 수차례 딸아이의 방에 몰래 들어가 딸아이 물건을 만지다가 들킨 적이 있었다. 지갑을 뒤적이며 용돈을 얼마나 썼나 확인하고, 성적표를 들추어 본 뒤 딸아이의 용돈 관리와 시험 점수에 대해 우려를 내비치다가, 할머니에 대한 손녀의 불편함과 반발의식을 부추긴다던지 하는 식으로 상황은 결론이 나곤 했다. 친정 엄마에게는 그러한 행동이, 몇 명 되지도 않는 손주들을 향한 관심에서 비롯된 것이었고, 일종의 애정 표시와도 같았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표출되는 할머니의 관심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없다. 마음이야 어떻든 간에, 자신의 표현 방식에 상대가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낀다면 그것을 바꾸려 노력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칠순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지금에 와서 자신의 생각과 태도를 바꾼다는 건, 오른손잡이가 왼손으로 밥을 먹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인 듯하다. 자기의 사적 공간이 침범당하는 것을 몹시도 싫어하는 사춘기 여학생의 방이란, 엄마인 나도 쉬이 접근하지 못하는 영역인지라, 할머니의 반복되는 이런 행동은 꽤 난감한 문제적 상황을 반복적으로 발생시킨다. 짧지 않은 기간 동안 딸아이가 방문을 굳게 걸어 잠근 데에는 친정 엄마의, 습관에 가까운 이런 행동이 가장 큰 이유로 작용했었다.
어쩌면 이건 나와 내 (남)동생의 성장 과정에서부터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지극히 가부장적이고, 힘으로 가족을 억누르던 아빠의 영향 아래에서, 우리는 사춘기의 반항기는커녕 목소리 한 번 제대로 내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어른들 말 잘 듣는 아이로 자라났다. 그런 세월을 거쳐 오며 나의 친정 엄마는, 사춘기 아이들이 어떻다는 것도, 그 아이들과 대화하는 법도 전혀 배우고 익히지 못한 채로 할머니가 되어버렸다. 문제는, 할머니가 된 친정 엄마가 앞으로도 손주들과 제대로 된 교류를 하지 못하리라는 것이 갈수록 더욱 분명해 보인다는 사실이다. 내가 아무리 잔소리하고 이해시키려고 해도 그때뿐, 나의 말들은 친정 엄마의 뇌리를 그저 옅은 바람처럼 스쳐 지나갈 뿐이다. 내 면전에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안 그럴 것처럼 말하다가도, 며칠이 지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비슷한 상황을 만드는 엄마와 나는 또다시 맞닥뜨려야 한다. 그런 과정을 수십 번 되풀이하다 보니 이제는 거의 체념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사춘기 아이들도 곧잘 말을 안 듣고 제 고집을 피우지만, 오춘기를 지나 육춘기에 이른 친정 엄마야 말로 지지리도 말을 안 듣고 청개구리처럼 굴어, 어떤 땐 정말 답답하다 못해 부아가 치밀어 올라, 끓는 물에 발 담근 개구리처럼 내가 폴짝폴짝 뛸 노릇이 되어버린다.
손녀의 사라진 이불은 할머니 방 옷장에 고이 모셔져 있었다. 나는 '이번이 마지막이다'라는 심정으로, 친정 엄마에게 먹히지도 않을 또 한 번의 잔소리를 한 후, 헬로키티 이불을 딸의 이불로 슬그머니 바꿔놓았다. 자신의 이불이 어디에 있었는지는 딸에게 함구한 채로. 그러고 난 후, 자꾸만 뛰어오르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소설책을 집어 들었다. 마침 읽고 있던 작품이 청소년 소설이었는데, 몇 장을 읽어 내려가자니, ‘할머니 내 방에 못 들어오게 해 줘.’라는 대사가 내 눈을 활짝 뜨이게 했다. 소설이 나를 위로해 주려는 것일까. 당신만 그리 사는 건 아니니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그도 그럴 것이, 작품 속 손녀의 대사에는 할머니가 '용의자 엑스'로 등장하고 있었다. 어쩜 우리 집이랑 상황이 이다지 똑같을까! 일련의 반복되는 과정을 거치며 딸아이는, 본인이 없는 사이 방 안의 무엇인가가 바뀐 느낌이 들 때면 일단 할머니부터 용의 선상에 올린다. 이제는 중학교 일 학년인 아들램도 할머니를 용의자 X로 여기는 경우가 드물지 않게 발생하고 있다.
차마 친정 엄마에게 당신이 손주들의 '용의자 X’가 되어가고 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언젠가 내가 추천해 준,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 "용의자 X의 헌신"을 재미있게 봤다고, 덕분에 더운 여름을 잠시나마 잊고 보냈다고 말했던, 어느 날의 엄마 모습이 문득 떠올랐다. 나의 엄마는 눈치라도 채고 있을까. 내 잔소리의 반의 반만 들어줬어도 이런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을 텐데, 한집에 사는, 그리고 아마 앞으로도 함께 살아가야 할 할머니가 손주들에게 부동의 용의자 X가 되어가고 있다니.. 웃픈, 하지만 '픈'에 더 방점이 찍히는 이 상황을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지, 참으로 난감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