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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혜진 May 21. 2023

출항

왜 쳐다보시죠? 제가 곧 취업할 사람처럼 생겼나요?



방이 아주 개판이다. 일주일 동안 입었던 옷은 허물처럼, 아니 무덤처럼, 아니 내 마음처럼 잔뜩 쌓여있다. 책상 위는 빈 단백질 음료병 네댓 개, 먹다 남은 초코우유 한 곽이 자리했다. 방 내부는 솜이불에서 피어오른 쿰쿰한 냄새로 어지러웠다. 얄팍한 취준생의 지갑 속은 언제 받은 지도 모르는 영수증이 한가득이었고, 찢어진 장판 위로 휴지조각, 머리카락, 회색 먼지가 굴러다녔다.     


한 달 동안 치렀던 전투의 흔적이다. 아주 치열했던.     


포트폴리오를 만드느라. 그러니까 내가 먹고 살아갈 밥줄의 반석이 될 귀한 아이를 출산하느라 이렇게 됐다. 무슨 일이 그렇게 많은지 쳐내도 쳐내도 끝이 없더라. 날 밤 까는 것은 기본이요, 주말은 꼼짝 않고 8시간 이상 앉아 있어야 했다. 이미 힘에 부치고 다크서클은 허벅지까지 내려왔는데 잠은 오지 않았다. 완성하지 못했다는 불안감에, 빨리 완성하고 싶다는 조급함에. 그 길고 짧은 과정을 오늘 정리 한 것이다.  

   

후련하다. 끝이다. 끝인데 시작이다. 끝을 맞이 한 사람은 사실 세상에서 가장 많은 것을 가진 존재 아닐까?왜냐하면 끝을 가진 동시에 시작을 가졌잖아. 그러니까 죽음에 다다른 사람은 사실 생명에 다다른 걸지도 모른다.


여유가 있으니 이런 저런 생각이 난다. 고작 포트폴리오 작업만 마무리했는데 취업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나는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입천장에 난 염증을 혀로 깔짝거렸다. 피곤함이 뿌린 씨앗은 염증으로 만개했다. 컴퓨터를 끄고 가장 먼저 들었던 생각은.     


일단 방을 치우자.     


바벨탑 같은 옷거지를 한 품에 안아 빨래 바구니에 던졌다. 모서리에 부스럼이 일은 플라스틱 통에 내 빨래뿐이었다. 그 후에는 책상 위를 치웠다. 음료수병과 우유 곽을 거두어내서 분리수거장에 던졌다. 가방 속에 더 이상 안 쓰는 책들을 꺼내서 책장에 꽂았다. 연습장은 써야하니까 어두고. 지갑에 영수증을 빼고 지폐와 동전을 정갈하게 정리했다. 도시락통은 전자레인지 옆 좁은 빈 공간에 두고. 그래. 그래. 좋아.  

    

내일 입을 옷을 방문 앞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녹색 치마와 검은 셔츠로. 꽤나 깜찍하다. 내일 사용할 덴탈 마스크는 그 옆 고리에. 드라이기는 전선을 잘 말아서 서랍에 넣었다. 그리고 까는 이불과 덮는 이불과 베개에 덮여있는 먼지를 탈탈 털었다.     

 

반 정도 남은 커피 음료는 싱크대에 흘려보냈다. 나는 커피를 먹으면 첫사랑을 시작하는 아이처럼 심장이 뛴다. 나중에는 불안해서 뛰는 건지, 설레어서 뛰는 건지 모를 정도로 심장이 뜀박질한다. 그래도 커피 음료는 꼭 사 먹는다. 미련하다는 게 커피와 사랑이 꼭 닮은 점이다. 지금은 다른 의미로 심장이 뛴다. 빈 병을 흐르는 물에 씻어내고 분리수거장으로 향했다.      


햇살이 내려쬐인다. 해가 아니다. 이건 햇살이고, 해님이다. 해와 햇살은 다른 거다. 해야만 하는 것을 끝내고 나니 세상 만물이 아름다웠다. 무덥지근한 더위가 벌써 고개를 내밀고 안녕하는데, 그게 참 아름다워 보였다. 내용물이 없는 커피병에 햇살이 쏟아졌다. 방울방울 맺힌 수돗물이 반짝였다. 가슴이 일렁인다.    

 

취업 준비 기간이 유독 길었다. 1년 8개월 정도한 것 같다. 어떻게 취업 준비를 2년 가까이할 수 있냐고 하겠지만, 취준이란 방황하는 시간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을 하면 좋을지 고민하는 시간은 목적지 없는 바다를 항해하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할만한 것을 찾아서 준비한다는 것은, 운 좋게 항구에 다다른 것이다. 나는 그곳에 잠깐 정착해 부서진 배를 수리하고 먹을 양식을 배에 싣는다. 이 양식은 내가 준비가 되어 떠날 때 나를 살려줄 것이다.  어쩌면 친구보다 더 믿음직한 녀석이다.


이제 때가 되었다. 날은 해맑게 개어 이마에 땀이 맺힐 정도이고, 배에 양식은 충분하다. 노력했으니까, 정말로 최선을 다해왔으니까. 지겨울 정도로 휘청거렸으니까. 내가 이 작은 섬에서 배운 것은 휘청여도 다시 일어나는 법, 간절한 인간은 필사적이라는 사실, 노력, 눈물, 감동 같은 것들.   

   

닻을 올려. 이제 떠날 거야. 그곳이 어디든 환하게 돛을 펼치고 바람처럼 나아가리. 가슴이 떨려왔다.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건 첫사랑의 떨림도, 커피를 먹었을 때 두근거림도 아니었다. 그저 필사적인 노력을 인지한 순간의 울림이었다.     


나는 살짝 뒤돌아 보았다. 긴 시간 어둠 속을 헤매는 작은 영혼을 보았다. 외롭고, 슬프고, 가난하고, 조금은 즐거웠던 어리고 약한 소녀였다. 나의 과거였다. 소녀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했다. 다시 뒤돌아보지 않을 테니, 다시 만날 일 없는 아이니까. 아쉽거나 슬프지 않았다. 그건 소녀도 마찬가지인지 작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녀와 내가 동시에 서로에게 말했다.     


수고했어. 잘 버텼어. 고마워.          









 안녕하세요 구독자님들 ㅎㅎ 이번 달은 개인적으로 포트폴리오를 준비한다고 매우 바쁜시기였습니다..ㅜㅜ 이 글은 안예은님의 출항이라는 곡을 듣고 쓴곡입니다. 포트폴리오를 마무리하니 정말 행복하고 아드레날린이 분비가 되더라고요. 어디든지 떠날 수 있을 것만 같고 이제 곧 취업하겠구나 하는 안도감과 그동안 했던 고생이 지나치면서 눈물이 찔끔 났답니다. 곡의 가사가 정말 저의 마음을 대변해주는 듯했습니다. 그걸 담은 글이니 재미있게 봐주십시오 ㅎㅎ 아래에 안예은 님의 '출항'이라는 곡의 링크를 둘테니 시간 있으시다면 한번 들어보세요! *^^*


안예은 - 출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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