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둥그레 Apr 23. 2019

03. 일단, 멈춰서 있는 중입니다만

일단 멈춰서도 괜찮아

 생각해 보면, 나의 슬픔을 대하는 태도는 예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 것 같다. 너무 슬프고 힘든 감정은 한 번에 소화해내지 못하기에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특정 시점까지 차곡차곡(또는 꾸역꾸역) 쌓아 두었다가 터진 둑처럼 쏟아내곤 했다. 고등학생 때에는 모의고사 날이나 중간고사, 기말고사가 끝난 다음날이 그랬고, 대학생 때에는 역시 시험기간과 공모전 마감일, 어떤 중요한 행사의 발표일들이 그랬다. 직장인이 된 이후로는, 글쎄, 그때그때 다르긴 했지만 내가 기획한 상품의 론칭일이라든지, 중요한 프로젝트가 끝나는 시점에 감정들이 쏟아져 내리곤 했던 것 같다. 사람마다 슬픔을 받아들이는 방식은 다 다르니까, 내 방식이 특별히 나쁘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이번 일을 겪으면서는 그 일종의 회피 기간이 평소보다 조금 많이 길었다. 실체가 없는 그 커다란 상실감과 슬픔과 당혹감의 무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할 수가 없었기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콩벌레처럼 느리지만 꾸물꾸물 쉴 새 없이 움직이다가, 어둠이 나를 덮치려 할 때 마음을 둥글게 말아내어 그 순간이 지나갈 때까지 숨죽이고 가만히 있는 것뿐이었다. 


 결국 내가 스스로에게 내린 궁극의 처방은 새로운 환경에 조그마한 피난처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 예비 신랑이 나의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곤 했던 거실 소파와 식탁, 그의 차에서 타고 내렸던 집 앞 주차장과 함께 거닐던 동네 곳곳들. 그리고 결혼 준비라는 명목 하에 다녔던 마사지 샵과 필라테스 센터 등……. 보통의 연애라면 좀 더 신중을 기했을 테지만 결혼할 사이라는 생각에 방심했다. 내가 있는 환경 대부분이 그와 관련되어 있었고, 파혼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로 끝난 상황에서 그 흔적들 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이 어느 순간부터인가 너무 지긋지긋했다. 더욱이 하루 종일 부모님과 한 집에 있으면서 계속 내 눈치를 보시는 그분들의 마음을 헤아리고 괜찮은 척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그래서 결심한 게 이사였다. 내 나이 서른 살, 부모님으로부터 독립하기에 너무 이른 나이도 아니었고, 어차피 예정되었던 결혼을 했더라면 곧 따로 살게 될 것이었기 때문에 집을 빠져나오는 건 생각보다 어렵지 않았다. 방에서 시체처럼 하루 종일 축 늘어져 있는 딸을 보며 ‘그렇게라도 네가 조금 나아질 것 같으면 할 수 없지’라는 마음이었을 것도 같다. 


 이사를 결심하고부터는 바랐던 대로 오로지 밤낮 이사 생각만 하며 지역을 고르고, 직*과 커뮤니티 검색으로 괜찮은 매물을 탐색하고, 집을 보러 다니고 하다가 그로부터 약 2주 뒤, 집 임대차 계약을 했다. 그 후로는 또 집 꾸밀 생각에 온/오프라인으로 각종 살림을 사들이고, 짐을 싸고… 그렇게 파혼한 지 1달 만에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감행했다. 이사 가서는 또 짐 풀고 추가적으로 필요한 것들을 사고… 그러다가 급기야 몸살이 나서 끙끙 앓기도 했다. 그렇지만 사실 앞서 말했듯이 정말 힘든 시기는 그 뒤에 왔다. 더 이상 집에 뭔가를 들이지 않아도 되고, 결혼 준비한다며 겸사겸사 회사도 그만뒀기에 직장에 나가지도 않고(누가 뭐라 하든 당시의 나는 전업 주부가 로망이었다), 드디어 미뤄두었던 슬픔과 절망을 정면으로 마주할 때가 왔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4월은 월말에 결혼 예정일이 잡혀 있었기에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꾸 그날로부터 며칠 남았는지 날짜를 헤아리게 되어 너무 괴로웠다. (조금 더 솔직하자면 아직 4월이기 때문에 이 글을 쓰는 지금도 괴롭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편으로는, 파혼으로부터 2달, 뭔가 다시 시작해야 한다는 압박감이 온몸을 짓눌렀다. 평소에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챔피언 급인 나조차도, 아닌 걸 알면서도 스스로가 괜히 반품 처리된 하자품처럼 여겨지고 자존감이 자꾸 바닥을 쳤다. 


 “요즘은 뭐가 제일 힘들어?”라고 누군가 나에게 물어봐 준다면 이렇게 대답하고 싶다. “요즘 뭐하고 지내냐는 질문이나 앞으로는 뭐할 거냐는 질문이 제일 힘들어”라고. 이 또한 낮아져 있는 내 자존감과 관계가 있는데, 보통의 나라면 그런 질문을 딱히 불편해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오히려 각자 살기 바쁜 와중에 나를 들여다봐 주어 고마워했을 테다.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려고 의식적으로 노력은 한다.) 하지만 절망 속에서 허우적거려 본 적 있는 사람이라면 알 거라고 생각한다. 삼시 세끼 나 자신을 위한 밥을 짓고, 설거지를 하고, 청소를 하는 것. 그것만으로도 나는 하루를 무사히 보냈음에 안도하고, 남들이 말하는 건설적인 생각과 앞으로의 계획을 세우기엔 아직 숨이 차다. 그래서 오늘도 나는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일단, 멈춰서도 괜찮아. 좀 더 지친 마음 내려놓고 쉬어가도 괜찮아.”

(계속)


[덧붙이는 말]

내 잘못이 아닌데, 적어도 내 잘못만은 아닌데 자꾸 자존감이 낮아질 때, 이노래 들어 보세요.

노르웨이 숲 - 당신 참 좋은 사람이에요 


작가의 이전글 02. 파혼 후, 이제 뭘 해야 하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