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로롱도로롱 Nov 23. 2023

목욕탕에 가다


  주말에 아버지 손에 이끌려 목욕탕에 가는 어린 남자아이를 상상해 보자. 빼곡한 캐비닛 앞에서 아버지의 도움을 받아 옷을 벗고, 너무 뜨거워 온탕에도 못 들어가 발만 담근다. 작은 손으로 넓은 등을 밀고, 있는 힘껏 밀어도 붉어지지도 않는 등을 내어준 아버지는 웃는다.



  이것은 무언가 이상적인 부자(父子)의 모습이다. 물론 예전에 목욕탕을 다니시다 중이염을 앓아 목욕탕에 더 이상 가지 않으시는 나의 아버지와 나는 저런 추억은 없다. 그렇기에 나도 어려서부터 목욕탕에는 가본 적이 없다. 나이가 들고서 목욕탕에 갈 일은 사실 흔치 않다. 어쩐지 목욕탕이라 하면 나이가 지긋한 노인들이나 가는 곳 같고, 이른바 MZ세대에겐 자신의 알몸을 남에게 공개하며, 남의 알몸을 어쩔 수 없이 봐야 하는 공간이 썩 유쾌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목욕탕의 낭만은 늘 갖고 있었다. 그런 부정이 느껴지는 공간. 혹은 노인들의 애환(?) 같은 것이 풀리는 공간처럼 말이다. 요즘은 구닥다리에게 깊은 애정을 갖는 것을 '레트로'라고 부르며 좋아들 하니깐. 레트로한 라이프 스타일인 셈이다. 



  얼마 전 토요일 오후에 일확천금을 꿈꾸며 복권을 사러 갔다. 1등이 9명이나 나왔던 곳이라 점심에도 사람이 많았다. 면적 대비 가장 많은 숫자가 적힌 것 같은 '로또'라는 종이를 들고 얼마간 걷다 보니 겨울이 왔다는 것이 느껴질 만큼 추워졌다. 이런 날에도 어딘가 따뜻한 곳엔 모기가 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부러 골목으로 걷는다. 큰길은 시끄럽지만 골목은 조용하다. 물론 이어폰엔 시끄러운 노래가 나오기 때문에 들리는 것은 큰길이나 골목이나 시끄럽지만 골목은 어쩐지 조용함이 '보인다.' 그렇게 걷다 보니 저먼발치에 요즘 건물에선 보기 힘든 붉은 굴뚝이 보였다. 구름을 만드는 공장처럼 김을 뿜어내는 크고 붉은 벽돌 굴뚝말이다.



  그래서 홀린 듯이 그리로 들어갔다. 목욕탕은 어쩐지 지하에 있는 편이 어울린다. 물은 무척 무거우니깐 2,3층에 지어선 하중을 견디기 힘들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카운터엔 무척 젊은 남자가 앉아있었고, '대인'요금 9000원을 지불했다. 로또보다도 더 큰 소비다. 나야뭐 목욕탕에 가본 적이 있어야지, 뭐가 비싼지 싼 지도 모른다. 온 복도가 조그마한 캐비닛으로 가득 찬 곳을 지나니 우리가 익숙하게 아는 목욕탕 탈의공간에 들어섰다. 내부자들에서 이경영이 뺨을 때리던 곳과 거의 똑같다. 신기한 것은 그 안에 이발소가 있다는 것이다. 호텔 경력 25년이라고 자랑스레 적힌 이발소에, 의사 가운을 입고 자신은 머리가 없어 이발을 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 이발사가, 백발의 노인의 머리를 자르고 있었다. 나는 어느 커다란 관광호텔에서 샤워가운을 입고 어디 지방에서 큰 사업을 하는 배 나온 아저씨의 머리를 자르는 그의 파란만장한 25년 전성기를 상상했다. 그렇다면 어쩐지 이발사가 측은해진다. 그래서 다시 25년 일했던 호텔이 사실 말이 호텔이지 지방에 그저 호텔이란 이름을 쓰는 모텔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초라한 현실과 마주할 때 과거는 빛나야 좋을까 초라해야 좋을까 알 수 없다.



  목욕탕엔 온탕, 냉탕, 열탕, 폭포수탕 총 4개의 수조와 건식, 습식 사우나가 있었다. 줄 없는 샤워기가 달린 공간도 마련되어 있다. 목욕탕 초보자인 나는 초보자처럼 보이지 않기 위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샤워기에서 몸을 씻었다. 하지만 금세 개인 세면도구도 없는 나를 보며 초보자인 게 무척 티 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대충 씻고 온탕에 들어갔다. 보통의 사람에겐 온탕은 열탕이며, 열탕은 고문이나 다름없다. 온탕에 아주 어린 사람, 아주 나이 많은 사람, 중년, 그리고 청년이 내가 몸의 반을 담그고 앉아있다. 다들 가운데서 보글보글 올라오는 거품을 보고, 풍기인삼인지 뭔지로 만든 물에서 나는 인삼향을 맡는다. 알몸인 상태로 서로를 쳐다보기 민망하니깐 다들 눈을 내리깔고, 웃지도 않는다. 무엇보다 색달랐던 건 이어폰을 안 끼고 이렇게 조용하게 앉아있어 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안 해도 되는, 그야말로 명상과 같은 행위가 목욕탕에선 가능하다. 시간이 아주 느리게 흐르고, 불편하면서도 편하다. 



  온탕에 다녀왔으니 다음은 냉탕이다. 요새 무슨 찬물 샤워가 도파민이 어쩌고, 동기부여가 어쩌고 하는 유튜브가 너무 자주 올라와서 찬물에 들어가면 기분이 좋아지나? 하는 의문이 있었다. 당연하게도 기분이 좋아질 리가 없다. 그저 차갑다. 하지만 견디면 어느새 몸 안에서 열이 올라옴을 옅게나마 느낀다. 가만히 있으면 내 몸 주변 물만 좀 데워지는 것인지 춥지 않고, 몸을 움직이면 다시 무척 차가워진다. 폭포수탕도 냉탕과 비슷한데 버튼을 누르면 천장에서 물이 쏟아지는 구조인 듯하다. 하지만 무척 큰소리가 날 것 같은데, 그럼 나에게로 이목이 집중될까 두려워 눌러보진 않았다. 사우나는 문에 서린 더운 공기만 봐도 들어가기 싫어져 이용하지 않았다. 대신 옆에서 세신사가 때를 미는 모습을 몰래 구경했다. 메뉴가 생각보다 많았고 가장 저렴한 게 22000원이었다. 얼마나 오래 해주시는 건진 모르겠지만 초임 교사의 시급은 가뿐하게 뛰어넘으실 것 같다. 세신사라는 직업은 어떻게 생겨난 것일까. 떼는 언제부터 밀기 시작했지. 왜 타월은 이태리일까 이태리에도 세신사가 있는 건가. 이런 고민이 막 들었지만 휴대폰도 이어폰도 없는 곳이라 공상에만 그친다.


 

  목욕탕에서 나오니 시간이 별로 지나지도 않았었다. 40분 정도인 거 같다. 난 아직 목욕탕 콘텐츠를 모두 즐길 만큼 숙련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 탈의공간 곳곳에 '바나나우유'의 홍보포스터가 무척 많다. 말이 좋아 포스터지 눈이 안 좋은 사람들 보라고 글자포인트 80pt정도로 적어놓은 것들이다. "목욕탕에선 바나나 우유가 국룰(國rule)"이렇게 써둔 걸 보고, 비웃음인지 그냥 웃음인지 하는 웃음도 나왔다. 그래서 예의상 먹어야겠다 싶어 굉장히 인상이 험한 카운터 할아버지에게 어렵게 질문드렸더니 퉁명스럽게 "없어"라고 하셨다. 없는데 왜 저렇게 광고를? 세상엔 정말 알 수 없는 일들 투성이다. 지상으로 올라오니 다시 냉기가 도는 서울이다. 모든 이들이 두꺼운 옷을 입고 있고 차는 쌩쌩 달리며 건조하고 시끄럽다. 목욕탕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비록 바나나 우유는 있지만 말이다. 또 목욕탕에 가는 날은 아마 아들이 대여섯 살이 되었을 때 일지도 모르겠다. 이상 속의 부정(父情)을 실현하러 말이다.



Cat Stevens - Father & Son

https://youtu.be/P6zaCV4niKk?si=A4gBSGY1YHBQy08l 

작가의 이전글 우울증 걸린 참치와 김광석이 전하는 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