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권, 가사분담, 양가예절, 개인시간
결혼 첫날밤. 말만 들어도 괜히 미소가 번진다. 두 사람이 부부 연을 맺고 처음 함께 하는 특별한 시간이다. 사귄 기간, 성격, 가치관에 따라 분위기는 다르겠지만, 웃음기 거두고 꼭 해야 할 일이 있다. 바로 앞으로 살아갈 실생활에 대한 '규칙 정하기'다.
첫날밤 제일 먼저 한 일은 폐백 때 들어온 돈봉투를 정리하는 일이었다. 폐백은 결혼식에서 신부가 시댁 어른들에게 첫인사를 드리는 의식이다. 이 의식을 통해 신부는 시부모님과 가족들에게 절을 드리고, 시댁에서는 신부를 가족으로 따뜻하게 받아들이면서, 잘 살라는 의미로 한복 치마폭에 돈 봉투를 한 움큼 던져주신다. 어떤 분께 얼마 받았는지 리스트를 정리해야 나중에 감사 인사를 드릴 수 있으니 첫날밤 처음 한 일이 되었다. 그러고 나서 남편에게 차 한잔 하자고 했다. 100세 시대 일부일처제는 쉬운 제도가 아니다. 살다 보면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올 때도 있을 것이다. 만약,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기면 보내주겠다. 단, 조건이 있다. 모든 것을 놓고 떠나라. 재산도, 자식도 모두 놓고 맨 몸으로 떠날 수 있다면 그게 진정한 사랑이다. 나 또한 그렇게 하겠다. 낮고 단호한 나의 말에 몹시 굳어졌던 남편의 얼굴이 떠오른다. 사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다. 그런데 정작, 첫날밤에 꼭 해야 할 '생활 규칙 정하기'를 하지 못했다. 못 참는 사람이 하면 된다는 생각으로 살다 보니, 쏜살같이 세월은 흐르고, 정신 차려보니 대부분의 역할을 다 내가 하고 있었다.
결혼 초반에는 서로의 생활습관과 가치관을 맞춰가는 과정이 중요하다. 특히, 원활한 결혼생활을 위해 초기에 규칙을 정하면 갈등을 줄이고,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하는데 도움이 된다.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는 안된다. 그래서 결혼 첫날밤은 앞으로 살아갈 생활방식에 대한 규칙을 정하는 날로 아주 좋다. 수입배분, 집안일, 양가 관리, 축의금 등 세부적인 규칙을 정하고, 문서로 정리해 놓도록 하라. 눈에 잘 띄는 곳에 붙여 놓으면 금상첨화다.
먼저 경제권 관련 규칙이다. 과거 우리나라는 남성이 돈 벌고, 여성이 가정을 관리하는 전통적인 역할이 대부분이었다. 가사와 육아를 책임지는 아내가 곳간열쇠를 관리하는 것이 당연했다. 아버지가 어머니께 통째로 월급봉투를 드리는 모습을 보며 자랐으니, 매우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나 이제는 아니다. 만약 맞벌이를 한다면 각자 연봉을 공개하고 일정비율을 공동통장에 입금하자. 연봉의 80~90%를 공동통장에 넣고, 그 안에서 생활비, 외식비, 양육비, 저축, 품위유지비 등 모든 비용이 나가도록 투명하게 공개하자. 나머지 10~20%는 각자의 몫으로 두어라. 그 돈으로 무엇을 하든 서로 존중해 주어야 한다. 홑벌이도 마찬가지다. 10~20% 정도는 돈을 벌어온 사람의 몫으로 자유를 주어야 한다. 운동을 하든, 취미생활을 하든, 영화를 보든 배우자의 자유다. 월급 전액을 한 사람에게 주면 ATM기가 된 느낌을 받는다. 일정 금액 이상의 큰돈을 소비하기 전에는 반드시 서로 상의 후 결정하도록 하자.
가사분담도 중요하다. 일단, 집안일을 잘게 쪼개서 체크리스트를 만들자. 서로의 강점과 선호도를 고려해서 역할을 나눠보자. 요리는 부인이 하고, 쓰레기를 버리거나 화장실 청소는 남편이 해야 하는 기준은 없다. 남녀 구분 없이 요리를 좋아하는지, 정리정돈과 청소를 좋아하는지 등으로 나누고, 나머지 하기 싫은 일이 남았을 경우 번갈아 하도록 하자. 요즘 주변에서는 요리를 남편이 전담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서로 관심 있고, 덜 힘든 일을 우선적으로 배정하면 좀 참을만하다.
양가에 대한 규칙도 잡아보자. 양가에는 무조건 똑같이 해야 한다. 용돈도, 선물도, 전화도, 방문도 똑같이 맞추자. 양가의 부모님을 설득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규칙을 정해놓고 잘 지키며 실천하자. 명절과 가족행사도 일정을 조율하고, 계획을 미리 상의하자. 명절에는 양가 중 어디를 먼저 갈 것인지, 가족행사는 어디까지 챙길 것인지, 행사마다 얼마만큼의 금액을 쓸 것인지도 미리 결정하자.
마지막으로 개인시간에 대한 규칙이다. 각자의 취미를 존중하고, 규칙적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도록 하자. 아무리 바빠도 일주일에 반나절 정도는 각자의 시간을 갖게 배려해 주는 것이 좋다. 아이가 생겨도 서로 교대하면서 개인시간을 갖자. 토요일 오전에는 아내가 자유시간을, 일요일 오전에 는 남편이 자유시간을 갖는 식으로 말이다. 카페에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친구를 만나는 등 아무리 결혼했어도 숨 쉴 구멍을 줘야 한다. 그래야 개인으로도 성장하고, 에너지도 얻을 수 있다. 이 시간만큼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는지 관여하지 말자. '고슴도치 딜레마'라는 말이 있다. '두 마리의 고슴도치가 추운 겨울날 서로 따뜻함을 나누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지만, 가까워질수록 서로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는다. 결국 상처를 최소화하고 온기를 나눌 수 있는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부부관계도 똑같다. 너무 가까워지면 상처를 주고받게 되고, 너무 멀어지면 정서적인 온기가 사그라든다. 사랑이 구속이 되어서는 안 된다. 한쪽이 매달리는 사랑은 오래가지 못한다.
결혼생활은 길고 긴 마라톤이다. 햇살도 비치고, 바람도 불고, 눈비도 맞으며, 때로는 벼락도 친다. 성격 급한 남편만 설거지하고, 깔끔한 부인만 청소를 하면 언젠가는 폭발한다. 참고 참다가 억울함을 터뜨리는 것이다. 완벽한 결혼생활이 없듯, 완벽한 규칙도 없다. 그래도 서로 규칙을 정하고, 지키고, 수정하면서 다듬어 가야 한다. 굳이 결혼 첫날 이런 딱딱한 얘기를 해야 하냐고 하겠지만, 결혼 다음 날부터 실전이기 때문이다. 일단 규칙을 정해놓고 3개월에 한 번씩 대화를 통해 서로의 불만을 조율해 가자. 시간이 지나면서 필요한 부분은 추가하고, 불필요한 부분은 수정하거나 없애면서 부부만의 규칙을 만들어 가자. 반드시 문서로 작성해서 벽에 붙여놓는 게 좋다. 오다가다 읽으면서 마음을 다잡도록 말이다. 결혼생활의 행복은 저절로 오지 않는다. 끊임없는 서로의 노력으로 하나씩 만들어 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