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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철현 Aug 18. 2023

LA부터 뉴욕까지 8000km 미국 횡단 2편

디트로이트에서 친구 브라이언 만나고 뉴욕에서 보낸 일주일

2년 만에 만난 브라이언, 이리 부자라니 깜놀


동행 셋과 시카고에서 헤어지고 혼자 차를 몰고 브라이언 집에 왔다. 시카고 도심에서는 1시간만 보냈다. 주차비가 한 시간에 26달러. 사악하다. 도저히 견디지 못하고 차를 빼서 브라이언이 사는 미시간주 로체스터힐을 향했다. 생각보다 오래 걸렸다. 밤 9시에 도착했다. 브라이언과 그의 아내 진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집에서 만든 수제 햄버거를 허겁지겁 입에 넣고 맥주와 함께 먹었다. 미시간 주 고급 주택가에 있는 브라이언의 저택에는 금요일 저녁을 맞아 이웃들이 모여 있었다. 한 커플과 여성 2명 총 4명이 낯선 여행자에게 여행지 곳곳에 대해 집요하게 물었다. 모두 호기심이 가득했다. 

파타고니아부터 중남미까지 여행담을 한참 떠들었다. 그간 촬영한 사진도 보여주었다. 사진에 감탄했다. 일부는 파타고니아에 가야겠다고 다짐했다. 브라이언과 진은 내년에 파타고니아에 가겠단다. 이웃들이 떠나고 브라이언과 단둘이 맥주를 마시면서 내년 가을 스페인 카미노 북쪽길을 함께 걷기로 합의했다. 브라이언 막내딸 방에서 잤다. 브라이언은 세 쌍둥이 아빠다. 모두 장성해 대처로 나갔다. 아들은 시애틀에서 살고 딸 둘은 밴쿠버에서 산다. 막내딸은 얼마 전 결혼했다. 그래서 로체스터힐에 있는 큰 저택에는 브라이언 부부만 산다. 브라이언은 로체스터에서 30년 넘게 살았다. 정원은 운동장만큼 넓고 2층 집에는 방이 엄청 많았다. 거실 면적도 엄청 넓다. 브라이언이 이리 부자라니. 

다음날 브라이언이 나를 차에 태우고 로체스터힐 주택가를 일일이 소개했다. 차 타고 돌았는데 30분 넘게 걸릴 정도로 넓었다. 옛날 닷지 일가가 소유한 농장을 고급주택가로 개발했는데 미국 3대 자동차 업체 임원들이나 협력업체 사장들이 모여 살고 있다. 동네에 흑인이 한 명도 살지 않고 오로지 백인만 산다고 한다. 넓은 녹지와 숲이 주택가를 가득 메우고 있어 아주 쾌적하다. 주민들이 협의해 담을 세우지 않았다. 그냥 잔디와 나무가 넓은 초원에 펼쳐지고 그 속에 멋진 집들이 나란히 들어섰다. 로체스터힐에만 골프장이 10곳 넘게 있다. 옆 마을과 연결된 산책로는 20km에 달한다. 이곳에서는 산책 나왔거나 웃통 벗고 뛰는 주민들을 많이 볼 수 있다. 갖가지 생활 편의시설이 잘 갖춰져 있고 동네 안에 초등학교와 중고등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브라이언은 30년 넘게 이곳에서 살았지만 흑인이나 아시아인이 한 명도 살지 않는 곳이라 찜찜하다고 한다. 이곳 주민들이 유색인종의 전입을 달가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브라이언은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다. 최근에 만난 가장 친한 친구가 동북아시아에서 온 나고 가장 예뻐하는 막내딸의 남편, 막내 사위도 중국계 캐나다인이다. 30분 넘게 미시간 주 고급 주택가를 돌아본 뒤 집으로 돌아왔다. 

브라이언과 진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펜실베이니아를 향해 떠났다. 뉴욕에 들어가기 전 중간 기착지로 펜실베이니아를 택했다. 한때 가고 싶었던 유펜 와튼스쿨이 있는 곳이다. 뉴욕까지는 3시간 떨어져 있다. 저녁 9시 도착해 을씨년스러운 모텔 6에 묵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떠나고 싶은 곳이다. 프런트 데스크에서 일하는 흑인 직원이 낯선 동양인 투숙객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살피더니 디파짓으로 50달러를 내놓으라고 한다. 체크아웃할 때 돌려주겠단다. 모텔 6에 묵으면서 보증금을 내라니. 어이상실이다. 그간 차별을 당하다 보니 차별에 익숙하나 보다. 흑인이라고 차별당하다 보니 나쁜 버릇이 든 것이다. 재수 없다. 내일 아침 일찍 떠나자.


게이 퍼레이드 중 맨해튼서 운전하다 지옥 체험


오후 2시 전 뉴욕에 들어왔다. 렌터카는 오후 6시 30분까지 반납하면 된다. 그전까지 걸어서 접근하기 어려운 양키스타디움, 콜롬비아대학교, 할렘을 차로 다녀오려 했다. 첫 행선지 양키스타디움에 가는 건 실패했다. 일요일 경기를 보러 가는 행렬 탓에 조지워싱턴 다리부터 교통정체가 극심했다. 간신히 조지워싱턴 다리를 건너자 속이 뒤집어졌다. 서둘러 화장실에 가야 했다. 송곳도 박힐 곳 없는 차량 행렬을 뚫고 간신히 출구로 빠져나오자 한글 간판이 가득한 거리가 나왔다. 아무 곳에 주차하고 한국어 간판이 달린 식당으로 들어갔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이 있었다. 

평정을 되찾았지만 양키스타디움으로 가는 건 포기했다. 차를 돌려 허드슨 강변을 달려 콜롬비아대학교로 들어갔다. 중세 유럽풍 건물들이 느닷없이 솟은 도로로 들어섰다. 내비게이션이 콜롬비아대학 교정이라고 알리지 않았다면 그냥 유럽풍 건물들이 모인 곳이라 생각하고 지나쳤을게다. 주차하기 만만치 않아 교정을 한 바퀴 돌고 할렘으로 빠져나갔다. 흑인 밀집 지역으로 치안이 불안하기로 악명 높은 구역이던 곳이다. 지금은 아니다. 할렘이 달라졌다. 여기저기 흑인 홈리스들이 쓰레기통을 뒤집고 있었지만 나름 깨끗하게 정돈된 거리를 시민들이 별 걱정 없이 거리를 걷고 있어 미국의 다른 거리와 별 차이 없었다. 포틀랜드 거리가 훨씬 위협적이었다. 

맨해튼 안으로 들어왔다. 뉴욕현대미술관과 록펠러센터까지는 탈 없이 들어왔다. 그 뒤로 지옥이었다. 웨스트 36번 근처에서 게이 퍼레이드가 있어 곳곳에 바리케이드가 섰다. 패닉에 빠졌다. 평상시에도 맨해튼에서 운전하기 힘들 텐데 여기저기에 게이 무리가 출몰하고 경찰이 출입을 통제하는 곳을 난생처음 운전하고 있는 것이다. 브루클린 다리에 가기 위해 강변도로를 타다가 길을 잘못 들어서 퀸즈로 가는 다리를 건넜고 다시 돌아오다 게이 퍼레이드가 열리는 곳으로 진입했다. 걸어가는 게 빠르다 싶을 정도로 천천히 움직이다가 브루클린 다리에 가는 것 포기하고 웨스트 48번가에 있는 허츠 렌터카에 가서 차량을 조기 반납했다. 게이 퍼레이드가 열리는 일요일 맨해튼에서 차를 모는 건 자살행위였다. 사인은 치사량을 넘어선 운전 스트레스일 거다.

숙소에 체크인하고 가벼운 차림으로 타임스퀘어로 향했다. 선아와 함께 걷고 놀던 곳이다. 차량이 정신없이 오가는 거리 한복판에서 삼성전자 전광판을 보고 사진을 촬영한 추억이 생생하다. 해가 지고 있지만 타임스퀘어에는 인파로 북적였다. 온갖 인종이 뒤섞여 지인에게 또는 낯선 이에게 소리 지르고 있었다. 게이들이 벌거벗고 지나고 웃통 벗은 근육질 흑형들이 위협적으로 몸통을 흔들거리며 오갔다. 뉴욕을 즐기려면 타임스퀘어에 와야 한다는 강박에 여기저기 관광객들이 몰려들었다. 일요일 저녁 전 세계에서 인구밀집도가 가장 높은 곳이 타임스퀘어일 게다. 타임스퀘어 강박의 포로 중 하나가 되어 전광판 계단 앞에 앉았다. 계단 아래에는 사방으로 모였다 흩어지는 인파를 배경 삼아 흑인 하나가 흥에 겨워 랩인지 말인지 구분가지 않는 말을 뱉어내며 춤추고 있었다. 피곤했다. 숙소로 돌아가 샤워한 뒤 자리에 누웠다. 내일부터는 계획을 세우고 움직여야겠다. 정처 없이 걷기에는 뉴욕에서는 볼 것과 할 것이 너무 많다.


비 오는 뉴욕, 걷고 먹고 마시고 즐겼다


늦잠 잤다. 전날 오후 9시 전 자기 시작해 새벽 3시에 깼다. 발코니로 나가 새벽의 맨해튼 웨스트 31번가를 내려다봤다. 차는 여전히 달리고 있고 24시간 영업하는 가게는 불을 밝히고 있었다. 맨하탄은 잠들지 않는 곳이다. 노트북을 열고 지난 100일간 여행을 요약 정리했다. 방대하다 보니 엘찰텐에서 중단했다. 토레스델파이네부터는 다음 달 쓴다. 날마다 조금씩 쓰고자 한다. 다시 졸음이 몰려왔다. 2층 침대로 올라가 누웠다. 맨해튼 웨스트 31번가에 자리한 한인민박의 도미토리룸은 좁지만 편리했다. 맨해튼에 잠시 머무는 여행객에게 최적인 듯하다. 숙박비가 상대적으로 저렴했고 펜실베이니아 역 근처라서 록펠러센터,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에지, 센트럴파크, 소호까지 도보로 다녀올 수 있었다. 걷기 좋아하고 고급 호텔을 싫어하는 나에게는 최적의 숙소다.

오전 10시 숙소를 나왔다. 비가 내렸다. 숙소 1층 로비에 있는 프런트 데스크 직원이 지난 일주일 동안 닷새가 비가 오고 있다고 투덜거렸다. 숙소 근처 기념품 가게에서 15달러 내고 우산을 구입했다. 그냥 맞기에는 많이 내렸다. Pick A Bagels까지 걸었다. 뉴욕에서는 베이글을 먹으라는 친구 성희의 권유에 따르기 위해서다. 스트로베리 크림치즈를 듬뿍 담은 에브리싱스 베이글을 먹었다. 크림치즈 특유의 달짝지근하고 느끼한 맛이 베이글에 붙은 깨의 고소한 맛과 어울렸다. 뜨거운 커피를 마시며 창밖을 내다보고 있자니 비가 멈췄다. 센트럴파크에 가자. 10여 년 전 선아와 함께 걷던 센트럴 파크를 다시 걷는다. 해가 다시 나왔으나 비 젖은 맨해튼 거리는 아직 덥지 않다. 

센트럴파크 남쪽으로 들어갔다. 도심 중앙에 이런 공원이 있다니 뉴요커가 부러웠다. 나무들 사이로 고층 건물이 보이고 잔디에는 주인 손에 끌려 나온 개들이 배를 하늘로 깐 채 퍼져 있다. 벤치에는 기타 치는 중년 남성부터 사색에 잠긴 미녀까지 갖가지 자태로 벤처를 차지하고 비가 오락가락하지만 귀에 무선 이어폰을 끼고 요가복 입은 남녀가 공원 순환도로를 따라 뛴다. 노부부가 나란히 손잡고 지나고 학생들을 이끄는 선생님은 고래고래 소지 지른다.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으로 향하면서 센트럴파크를 대각선으로 가로질렀다. 연못 앞에서 비가 쏟아졌다. 다리 밑에서 거리 예술가의 연주를 들으면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해가 다시 나자 서둘러 메트로폴리탄 미술관까지 걸었다. 미술관 앞에 도착하자 해가 쨍하게 비췄다. 미술관 계단에 앉아 길거리 음식 카트에서 산 핫도그를 먹었다. 미술관 안에서 다음날 갈 명소의 표를 예약했다. 록펠러센터 전망대를 일컫는 톱오브락은 내일 오전 10시, 메트로폴리탄 도슨트투어는 오후 1시, 엣지 전망대는 모레 오전 10시로 예약했다. 자유의 여신상 랜드마크 투어는 내일 오후 매표소에 가서 모레 오후 1시로 예약하려 한다. 

시내 투어 일정이 정해지자 지하철을 타고 브루클린 다리로 갔다. 브루클린 다리는 하루 1만 명 이상이 걸어 넘는다고 한다. 1만 명 중 하나가 되었다. 이 석조 다리를 1872년 세웠다니 놀라울 따름이다. 당시 조선은 중세 봉건시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세도정치에 휘둘리며 망해가고 있었는데. 브루클린 쪽 강변에 있는 덤보에서 브루클린 다리를 올려다보았다. 사진 촬영 포인트라고 관광객들이 북적거리는 곳이다. 브루클린 다리는 아래서 위로 보아야 한다나. 뉴욕 관광객으로서 할 짓은 다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뉴욕은 여러 차례 왔지만 일만 하고 돌아가다 보니 뉴욕에 뭐가 있냐고 물어보면 답할 게 없었다. 관광객 모드로 돌아서자 뉴욕에 이리 볼 것과 할 것이 많은지 새삼 깨달았다. 이참에 관광객으로서 할 짓은 다하고 가야겠다. 

28일 저녁에는 웨스트빌리지에 있는 재즈 카페에 간다. 2년 전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브라이스 홉과 만나 재즈 공연을 보기로 했다. 브라이스 홉은 남자친구를 데리고 나온다고 한다. 홉 남자친구는 한국 교포로 미국 뉴욕에서 생명공학을 연구하는 인재다. 사진으로만 봤고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통화만 했다. 홉이 홀딱 빠진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하다. 홉은 미국 영화배우 아만다 사이프리드를 닮아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을 때 여러 나라에서 온 남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덤보까지 넘어가 브루클린 다리를 올라다 보고 강 건너 맨해튼을 직관한 뒤 맨해튼으로 넘어왔다. 허드슨30 빌딩 4층에 들러 엣지 전망대의 방문 날짜와 시간을 확정했다. 이곳에서 쉑쉑버거를 먹었다. 미국에서 온갖 햄버거 브랜드를 섭렵했다. 서부에서는 인앤아웃, 중서부에서는 파이브가이즈, 동부에서는 쉑쉑버거를 맛보았다. 파이브가이즈 완승. 버거 맛이 좋다. 무엇보다 감자튀김의 질이 확실히 낫다. 3개 햄버거 브랜드를 젖힌 내 원픽은 치폴레다. 고기, 콩, 야채, 소스를 입맛대로 고를 수 있는 퓨전 멕시코 음식이다. 야채가 많아 건강에도 좋고 식감도 훌륭하다. 나스닥에 상장된 치폴레의 주가가 날마다 오르는 이유를 알겠다. 치폴레 주가는 오늘이 가장 싸다.


메트폴리탄 미술관 도슨트 투어는 수준이하


지인 부탁받고 아침 일찍 맨해튼 웨스트 43번가에 있는 샌드위치 집에 갔다. 친자매처럼 지내는 사이라고 매상 올려달라고 부탁한 거다. 샌드위치 가게 주인은 뉴욕에서 20년 이상 살며 맨해튼에서 식당을 운영하고 있다. 대한항공 승무원하다가 미국 교포와 결혼해 뉴욕에 눌러앉아 살고 있다. 동생도 맨해튼에서 식당을 하고 있다. 미국 요리학원 CIA를 졸업하고 퓨전 일식집을 운영하고 있다. 보아하니 지인이 동생과 나를 이어주려는 듯하다. 동생은 결혼하지 않았다. 지난 일요일 게이 퍼레이드로 맨해튼이 혼잡했을 때 혼자 동생네 가게에 갔다. 정신없이 바쁜 듯해 조용히 밥만 먹고 나왔다. 새 인연이 버겁다. 혼자라는 게 좋은 건지 익숙해진 건지 아무튼 어디 매이지 않고 돌아다니는 게 좋다. 아직도 철이 들지 않은 건가. 

몸에 좋은지 모르겠으나 맛없는 샌드위치를 입에 욱여넣고 서둘러 나왔다. 록펠러센터 전망대 관람 시간이 다가온 거다. 록펠러센터 최고층 전망대를 톱오브락(Top of Rock)이라 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이 정면에 보인다. 남쪽으로는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을 기점으로 좌우로 맨해튼 고층 빌딩들이 줄지어 늘어선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뒤로는 멀리 월스트리트 빌딩들이 서 있다. 월드트레이드센터도 우뚝 솟아 있다. 북쪽으로는 좁고 높게 선 빌딩 숲 사이로 센트럴파크가 펼쳐진다. 초고층 빌딩 숲 너머로 짙은 녹음이 융단처럼 뻗은 게 멋지다. 오전 내내 비가 오락가락하더니 시계가 좋지 않다.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은 먹구름까지 이고 있다. 전망대를 여러 바퀴를 돌며 날이 개이기를 기다렸지만 먹구름은 짙어져 갔다. 포기하고 내려왔다. 


센트럴파크로 들어갔다. 오후 1시 메트로폴리탄 도슨트투어 시간까지 공원 안으로 산책했다. 센트럴파크가 익숙해져가고 있다. 지도 없이 여기저기 찾아갈 수 있을 듯하다. 착각이었다. 워낙 넓다 보니 공원 안에서 방향 감각을 잃고 헤매다 구글 지도의 도움을 받고 관람 시간에 맞춰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도착했다. 9년간 뉴욕에서 머물면서 미술을 공부한다는 전문가가 작품 설명하며 무리를 이끌었다. 메트로폴리탄은 관람객으로 북적였다. 우리 일행만 25명이었다. 떼로 움직이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 가이드 설명도 수박 겉핥기 수준이었다. 루브르 박물관에서 에꼴 드 루브르 출신이 4시간 설명하는 것을 듣고 프라도 미술관에서 오디오 설명을 반복해서 들어서인지 이번 가이드 수준은 형편없었다. 실망만 거듭하다 혼자 움직이기로 결심했다. 

가이드와 떨어서 고흐 고갱 르누아르 모네 같은 인상파와 세잔 드가 작품 위주로 보고 다녔다. 고흐 작품은 인상파를 흉내 내던 초기 작품들이 대부분이었다. 고갱 작품 몇 점은 훌륭했다. 타히티에서 그린 작품들이 걸려 있었다. 특유의 몽환적 터치가 인상적인 르누아르의 작품은 많았다. 최고의 작품은 세잔의 사과였다. 대상을 여러 각도에서 본 것을 한 화면에 담았는데 훗날 피카소 같은 입체파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작품이 걸려 있었다. 렘브란트가 도박 빚에 재산을 탕진한 뒤 그린 자화상을 비롯해 빛과 어둠, 음영을 기가 막히게 그린 작품들을 볼 수 있어 반가웠다. 더 보고 싶었지만 체력이 다하고 있었다.     


아침 7시부터 오후 3시까지 쉬지 않고 걸어서인지 다리가 비명을 질렀다. 메트로폴리탄 벤치에서 한참 쉬다가 숙소까지 걸었다. 맨해튼 지도는 머릿속에 있다고 확신하고 구글 지도 열지 않고 숙소를 향해 걸었다. 메트로폴리탄 중간쯤에 있으니 웨스트 32번가에 숙소까지 걸으면 족히 1시간은 걸릴 듯했다. 거리 곳곳을 구경하며 걸었다. 한참 걸었는데도 낯선 곳만 나왔다. 40분가량 걷고 나서 하는 수 없이 구글 지도를 열었다. 거꾸로 가고 있는 거였다. 남서쪽으로 가야 하는데 남동쪽으로 걷고 있었다. 옛날에는 구글 지도 없이도 방향을 잘 잡았는데. 정보기술 발달이 인간 지능을 감퇴시킨다는 게 맞나 보다. 구글 지도 보고 서쪽으로 방향을 잡고 한참 걸어 숙소에 왔다. 녹초가 되었다. 라면 끓이고 햇반 전자레인지에 돌려 배고픔을 해결하고 침대에 누웠다. 내일은 배 타고 자유의 여신상 본 뒤 브라이스 홉과 저녁 먹고 재즈 공연을 본다.  


허드슨 강변은 화사하고 웨스트빌리지는 화려했다


숙소에서 15분 걸어 허드슨야드 빌딩에 갔다. 햇살 좋은 날 엣지 전망대에 올라 밝게 빛나는 맨해튼을 보고 싶다. 관람 시간보다 30분 일찍 와서 허드슨야드 빌딩 2층 블루보틀 커피숍에 왔다. 블루보틀 맨해튼에 처음 왔다는 걸 밝히고 블루보틀 최고의 커피를 추천해 달라고 하자 직원은 싱긋 웃으며 내 커피 취향을 한참 묻더니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건넸다. 커피 품종은 기억나지 않지만 맨해튼에서 마셔본 커피 중 최고였다. 커피 향이 채 가시지 않은 채 일어나 엘리베이터 타고 엣지 전망대로 향했다. 허드슨야드 빌딩 앞에 있는 베슬은 닫혀 있어 오르지 못했다. 베슬은 건물 앞에 솟은 아름다운 조형물이다. 계단으로 오를 수 있게 설계되어 있으나 자살 사고가 이어져 계단을 폐쇄했다. 

바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엣지 전망대로 바로 올랐다. 두꺼운 유리로 사방을 둘렀으나 하늘은 열려 있어 개방감이 뛰어나다. 유리 너머로 보이는 맨해튼은 눈부셨다.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는 날 맨해튼은 근사했다. 보호 유리가 데크 쪽에서 바깥쪽으로 비스듬히 기울어져 유리 앞에 서면 고층 건물 밑으로 낮은 건물 사이 도로를 달리는 자동차가 보인다. 남쪽으로는 월스트리트 초고층 빌딩들이 솟고 그 오른쪽으로는 허드슨강이 흐른다. 강 너머로는 뉴저지가 펼쳐진다. 북쪽으로는 센트럴파크가 초고층 빌딩 사이로 고개를 내밀고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그 앞 건물 너머로 올라선다. 엣지 전망대에서는 허드슨 강변에서 맨해튼 동쪽과 남쪽 건물군과 주택들을 한눈에 볼 수 있어 톱오브록보다 전망이 훨씬 시원하고 예쁘다. 

오전 11시가 넘어가자 관람객이 쏟아져 들어와 서둘러 빠져나왔다. 자유의 여신상 랜드마크 크루즈 탑승 시간을 예약하기 위해 허드슨 강변에 있는 크루즈 선착장으로 갔다. 예상외로 탑승객이 적어 바로 탈 수 있었다. 배는 허드슨 강변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더니 월스트리트를 바라보며 다시 이스트 강변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갔다. 브루클린 다리 밑을 지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서쪽 면에 보일 때까지 가더니 방향을 틀어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했다. 횃불 든 녹색 누나 앞을 지나 다시 허드슨 강변 선착장으로 돌아왔다. 총 1시간 30분 걸렸다. 

크루즈 투어는 강변이나 해안에 인접한 맨해튼 랜드마크들은 한 번에 조망할 수 있다. 낮에 오른 엣지 전망대에 관람객들이 모여있는 모습도 보였고 월드트레이드센터가 눈에 들어왔다. 남쪽 끝 리틀아일랜드 공원이 가까이 다가왔고 월스트리트 고층 건물군도 빽빽이 붙어 멋진 스카이라인을 연출했다. 브루클린 다리 밑으로 들어가자 브루클린 명물 덤보가 듬직하게 서 있고 명소로 떠오르는 브루클린 해안가도 가까이 보였다. 허드슨강 타고 오르면 맨해튼 맞은편으로 뉴저지가 있다. 한때 그곳에서 연수받은 적 있어 낯익다. 

크루즈에서 내려 하이라인으로 이동했다. 옛 고가도로를 개조해 도심 속 산책로를 조성했다. 서울시가 서울역부터 명동까지 이어지는 고가도로에 조성한 서울로 7017 원조격이다. 허드슨야드 옆에서 맨해튼 남부까지 이어지는 상당히 긴 산책로다. 도심 빌딩 사이를 통과해 고가 양옆으로 허드슨강과 맨해튼 서쪽 주택가를 조망하며 걷는 게 좋았다. 산책로 중간에 아기자기하며 예쁘게 생긴 스튜디오형 집들이 나타났다. 나중에 알았는데 그 작은 스튜디오형 집의 가격이 수백억 원이라고 한다. 뉴욕의 집값은 살인적이다. 

하이라인은 참 예쁘고 편리하다. 허드슨 강변에 있는 명소를 하나로 연결했다. 허드슨야드 앞 베슬이 출발지에 있고 중간에 풀턴하우스나 첼시마켓으로 내려가는 길이 있다. 산책로 말미에는 휘트니미술관이 자리하고 거기서 조금만 허드슨 강변으로 나가면 버섯 모양의 기둥이 떠받치는 강변 공원 리틀아일랜드가 있다. 리틀아일랜드는 강 위에 버섯 모양의 기둥으로 받치고 그 위에 숲을 조성해 늘 관광객과 시민들이 북적인다. 전망대에 오르면 허드슨강과 멀리 맨해튼 남서부를 조망할 수 있다. 강에 접한 원형 무대에서는 날마다 석양이 지는 모습을 지켜보려는 연인이나 가족이 가득하다. 정신없이 돌다 보니 홉 브라이스와 만날 시간이 다가왔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리틀아일랜드를 빠져나와 약속 장소인 웨스트빌리지로 뛰다시피 하며 걸었다. 

홉 브라이스는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만난 텍사스 걸이다. 발에 물집이 생겨 고생하길래 군에서 배운 방식대로 바늘과 실로 치료하면서 친해졌다. 그 뒤로 한참 함께 걸었다. 체력이 뛰어나 내 걷는 속도를 따라왔다. 홉은 맨해튼에서 초등학교 교사를 지내고 있다. 한국인 남자친구와 3년째 사귀고 있다. 내가 뉴욕에 왔다고 왓츠앱으로 알리자 단숨에 보자고 달려 나왔다. 한국인 남자친구도 데리고 나왔다. 

한국인 남자친구는 노벨상 의학상 수상자 제니퍼 다우드나에게 공부한 수재다. 버클리에서 유전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한 뒤 콜롬비아대에서 유전자 가위 분야 박사학위를 공부하고 있다. 내년에 박사학위를 받은 뒤 로쉬나 모더나 같은 제약회사에 연구원으로 취업한다는 계획이다. 미국에서 4~5년 공부한 뒤 한국에 들어온다고 한다. 한국 유전공학을 이끌 인재를 만난 셈이다. 열 살에 미국으로 이민 왔는데 한국어도 잘한다. 말도 잘 통한다. 서글서글하고 똘똘하다. 나중에는 홉보다 남자친구와 더 많은 대화를 나눴다. 

그냥 봐도 예쁘기 그지없는 젊은 커플들이 이끄는 대로 웨스트빌리지 곳곳을 돌아다녔다. 우리네 홍대입구처럼 웨스트빌리지는 밤마다 젊은 직장인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노는 곳이다. 홉 덕분에 이런 곳에 온 거다. 평소라면 밤에는 숙소에서 여행기 정리하고 그냥 잔다. 매운 음식 좋아하는 취향을 알고 사천식 중국 요릿집에 가서 여러 음식을 주문했다. 밥 한 그릇 추가로 맛있게 먹었다. 만류에도 불구하고 홉이 계산했다. 식사 마치고 재즈공연을 보러 갔다. 스몰스라는 재즈 카페인데 웨스트빌리지 주민들만 아는 작지만 품격 높은 재즈 공연장이라고 한다. 백발의 재즈 연주자 6명이 중년의 드러머와 함께 열정적으로 공연하는 모습을 드러머 바로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공연 끝나자 홉이 비밀스러운 장소로 안내하겠단다. 햄버거 가게 파이브가이즈로 들어가는 거 아닌가. 배부른데. 이 커플도 저녁식사를 많이 하던데. 이상하게 생각하며 식당 안으로 들어갔더니 2층으로 이어지는 문 앞에서 키나 덩치나 여러모로 내 2배는 되어 보이는 흑인 형이 신분증을 요구했다. 식당 2층에 올라가는데 신분증이라니. 커플은 웃고 있었다. 둘이 뭔가 꾸미고 있었다. 여권을 보여 주고 2층으로 올라갔다. 1층 햄버거 집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바가 나타났다. 시끌벅적한 바에서 손님들이 카테일이나 맥주를 시켜놓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이곳은 1920년대에 세워진 술집이다. 미국 연방정부가 금주법을 시행해 술의 제조와 판매를 막자 비밀리에 술집을 열어야 했다. 당시 전통에 따라 지금도 밖에는 간판을 내걸지 않고 1층 식당을 통해서만 들어올 수 있는 은밀한 술집을 운영하는 것이다. 천장에는 팬이 돌고 바텐더가 바 너머로 바쁘게 움직이고 조명은 어둡고 음악 볼륨은 엄청 크고 손님들은 서거나 앉거나 무리 지어 소리 지르는 모습이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전형적인 장면이었다. 

2층 술집에서 정신이 빠진 뒤 영화 스파이더맨에서 주인공이 피자 배달 알바를 했던 Joe’s Pizza집에 갔다. 영화 스파이더맨 촬영지로 알려진 곳이나 피자 맛이 훌륭한 걸로 더 유명하다. 늦은 밤 피자 하나로 다 먹고 지하철 타고 숙소로 돌아왔다. 지하철에서 홉 커플과 헤어졌다. 내년 서울에 다시 보자고 약속하고.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내려 숙소로 바로 와서 씻고 뻗었다. 침대에 누워 홉에게 감사했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맺은 인연만으로 미국에서 친구 2명을 만날 수 있었다. 브라이언 집에 초대되어 고급 주택에서 맥주를 함께 마셨고 홉과는 웨스트빌리지 핫플레이스에서 맨해튼의 밤 문화를 즐길 수 있었다. 인연이 감사할 따름이다.


뉴욕 떠나며 105일 남북 아메리카 대륙 여행 마무리


펜실베이니아 역 근처 숙소에서 기차 타고 JFK공항까지 왔다. 터미널 4에서 내려 셔틀버스를 타야 했지만 늦지 않게 아시아나항공 체크인 카운터에 도착할 수 있었다. 펜실베이니아 역에서 중국인 리아를 만났다. 노스이스턴대학에서 데이터애널리시스를 전공하는 대학생이다. 방학 맞아 보스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JFK공항을 거쳐 중국 베이징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리아는 동행이 생긴 것을 반겼다. 초행이라 JFK공항 터미널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을지 걱정한 듯했다. 반갑게 인사 나눈 뒤 1시간가량 대화를 나누며 공항으로 이동했다. 서울에 오면 연락하라고 이메일을 건네자 리아는 아주 좋아했다. 방학 3개월 간 서울에 올 계획이 있었다. 평소 K팝에 관심이 많았다. 리아는 와이지엔터테인먼트 소속 4인조 보이그룹 위너를 아주 좋아한다.

리아는 서울 가면 꼭 연락하겠다고 한다.  리아는 캐세이퍼시픽 항공을 타고 나는 아시아나항공을 타야 했다. 리아는 8번 터미널, 나는 1번 터미널로 가야 해서 헤어졌다. 1번 터미널에서 탑승수속이 끝나자마자 리아로부터 이메일이 왔다. 서울에서 꼭 보자고. 조만간 리아를 서울에서 볼 듯하다. 기분 좋은 예감이다. 새 인연은 늘 설렌다. 

아시아나항공을 타고 15시간 비행했다. 옆자리에 앉은 한국인 중년 남성은 안절부절못하고 꼼지락거리고 좌석이 흔들릴 정도로 일어났다 앉았다 하는 바람에 잠을 자지 못했다. 이륙한 지 두 시간가량 지나자 참기 힘든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범인은 그 중년 남성이었다. 승무원에게 빈자리 있으면 자리를 바꿔달라 요청했다. 친절하기 그지없는 승무원은 여기저기 전화하며 빈자리를 물어봤으나 만석인 데다 하나 남은 자리는 한 첼리스트가 자기 첼로를 옆에 두려고 해당 좌석을 사는 바람에 사람 대신 첼로가 앉아 있다고 전하며 미안해했다. 어쩔 수 없이 자리에 돌아가자 그 승무원이 “마스크 달라고 하셨죠?”라며 자연스레 바이러스 막는 마스크를 건넸다. 마스크를 뒤집어쓰고 와이어리스 이어폰을 꽂고 잠을 청했다. 

냄새는 마스크가 막고 소음은 와이어리스 이어폰이 막았지만 앉았다 일어섰다 하며 좌석을 들썩이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앉을 때 가만히 앉으라고 한마디 하려고 마스크 벗고 이어폰 빼고 신경질을 내고 일어섰는데 이 아저씨 상태가 영 좋지 않았다. 격리불안인지 기내가 답답한 건지 어쩔 줄 몰라하며 1분마다 핸드폰 열고 시간 체크하고 일어나 걷는가 싶더니 1분 만에 다시 와서 풀썩 앉았다. 이 상태에서 시비를 걸었다가는 힘으로 이 아저씨를 완전히 제압해야 하는 최악의 사태를 맞이할 수 있겠다 싶었다. 잠을 포기했다. 10시간가량 뜬 눈으로 리포트도 보고 사진도 정리하고 여행기도 쓰면서 시간을 보내야 했다. 비행기가 활주로에 닿은 뒤 안전벨트 사인이 꺼지자마자 부리나케 일어났다. 어라~ 그 아저씨는 벌써 저 앞으로 달려 나가고 있었다. 뭔지는 모르지만 확실히 정상은 아니었다.  

어이없게 105일간 여행은 이리 끝났다. 브라질, 아르헨티나, 파타고니아, 칠레, 볼리비아, 페루, 멕시코, 과테말라를 거쳐 미국 횡단까지 생애 가장 치열했던 여행이었다. 여행의 기록은 중남미 편과 미국 횡단 편으로 나누어 책으로 엮을 거다. 볼리비아 우유니에서 만나 깊게 사귄 여섯 명과 제주도에서 보기로 했다. 여행은 인연을 낳고 그 인연은 새 여행을 만들었다. 카카오 브런치에 날마다 쓴 여행기를 보고 중남미 여행을 떠나려는 대학생 친구가 보자고 한다. 그리고 그리웠던 친구와 선배를 보기로 했다. 여행의 에필로그라고 할까. 이 여행의 마무리 작업이 끝나면 새 여행을 떠날 거다. 나 떠나 있을 때 행복하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그런데 어디로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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