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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Feb 09. 2023

[무소비 일기 01] 어쩌다 소비하지 않기로 결심했는가

무소비 생활을 시작한 지 일주일이 지났다. 일주일간 생수 한 팩과 지인과 함께 마신 음료를 합쳐 1만 원이 조금 넘는 돈을 썼다. 물론 숨 쉬듯이 지출되는 주거비, 통신비는 제외했다. 완벽하진 않지만 현대 사회에서 일주일에 1만 원대의 금액을 ‘긁는’ 것은 무소비에 가깝다. 평소에는 카페 한 자리에서 음료 하나, 디저트 하나를 주문하면 끝났을 금액이다. 2000년대 초에 ‘만 원의 행복’이라는 관찰 예능 프로그램이 인기를 끌었는데, 참가자들이 나름의 지혜와 고행을 통해 만 원으로 일주일을 버티는 내용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른 지금, 우리에게 만 원짜리 지폐의 무게는 훨씬 가벼워졌다. 만 원으로 일주일이 아니라 하루를 버티는 것도 대단하다고 여길 만하지 않을까. 


20여 년 사이 껑충 치솟은 물가도 문제지만, 소비 품목도 확연히 늘었다. 현대인의 지출 목록에는 스마트폰과 그에 따른 통신비도, 넷플릭스를 비롯한 OTT서비스 이용료도, 식후 마시는 아메리카노 한 잔도 꼬박꼬박 이름을 올린다. 아끼려면 아낄 수는 있지만 상대적으로 지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어 꾸준히 이용 중인 것들이다. 그런가 하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덩치를 키운 품목들도 있는데, 가장 압도적인 것이 바로 주거비다. 10년 넘게 직장생활을 했지만, 아직도 월급의 상당량이 전세자금대출 이자와 관리비 등에 투입된다. 주거비 상승이 치명적인 것은, 말 그대로 숨만 쉬어도 지출되는 금액이기 때문이다. ‘노오력’으로 해결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선 영역이 소득에서 큰 비중을 차지할 때, 인생의 우선순위는 바뀔 수밖에 없는 처지에 이른다. 하지만 바쁜 일상에 치여, 틈틈이 소비하며 느끼는 잠깐의 만족에 취해, 우리는 본말이 전복된 사실에 무감각해진다. 알아차리더라도 이를 바꿀 만한 힘을 내기 어려워진다. 나도 예외는 아니었다.


1년 전 계약직으로 다니던 직장에서 내 자리가 없음을 깨닫고 자연스레 백수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다른 자리를 찾아볼까 싶기도 했지만, 그동안 미뤄온 고민을 진득하게 붙잡고 싶었다. 6개월은 고민만 했고, 그 후 6개월은 이전 직장에서 6개월짜리 계약직으로 일할 기회가 생겨서 일하면서 고민을 이어갔다.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삶에 깊숙이 들이고 싶은 가치는 뭔지, 그것을 얼마큼 실천하고 있는지, 지금 처한 상황은 그 실천을 지속 가능하게 해주는지 집요하게 묻고 답했다. 어느 정도 답을 찾았는가 싶으면 원점으로 돌아가기 일쑤였다. 한 번은 깊은 산과 물로 둘러싸인 곳에서 나의 털친구들(두 냥이들)과 함께 조용히 살고 싶다가도, 얼마 후면 도심 깊숙한 곳에서 각종 문화생활을 즐기고 싶기도 했다. ‘월든’과 ‘라라랜드’ 사이를 수십 번을 오갔다. 지인들도 혼란스러웠는지 처음에는 나의 행보에 호기심을 보이더니 점차 ‘그래서 도대체 언제 이동할 건데’라며 채근하기에 이르렀다. 나도 모르게 빠르게 답을 내려야만 한다는 압박을 휩싸여 서둘러 그럴싸한 청사진을 그리기도 했지만, 성급한 다짐은 며칠 사이에 원점으로 돌아오기 일쑤였다.


주변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조언은 그냥 질러보라는 거였다. 그렇게 고민만 하고 있느니 뭐라도 결정해서 행동으로 옮긴 뒤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면서 ‘뭣이 중헌지’ 가늠해보라고 했다. 고민의 기간이 길어질수록 직접적으로든 간접적으로든 이 같은 조언을 처방해주었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20대나 30대 초반의 나였다면 쉬이 그렇게 했을 것도 같다. 비슷한 상황에서 지르기식 결정을 한 경험이 몇 차례 있었다. 하지만 마흔을 코앞에 두었다는 생각이 나를 멈칫하게 했다. 마흔, 어떤 일에도 현혹되지 않는다는 불혹의 나이 아닌가. 게다가 청춘을 바친 것까지는 아니지만 청춘 내내 (쌓았다기보다는) 이어온 커리어가 있다. 일을 하는 방식에는 문제를 제기하고 싶지만, 일을 통해 추구하는 가치는 지켜내고 싶기에 운신의 폭이 좁아진 면도 있었다. 무엇보다, 남들이 보기에는 어떨지 몰라도 ‘월든’과 ‘라라랜드’를 오가는 사이, 두 선택지 사이에서 새로운 풍경들을 발견하게 된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어떤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이 올 것이라 예감하게 되었다. 불안에 떨며 동동거리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고민들로 사계절을 모두 보내고 새 봄을 앞둔 지금, 조금씩 때가 왔음을 느끼고 있다. 누군가가 ‘그래서 어떻게 결정했는데?’라고 묻는다면 아직도 나는 아무 답도 내놓을 수 없다. 이야기할 게 없다기보다는, 이야기하는 데 반나절은 족히 걸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한 마디로 정리해 얘기해야 한다면, 그저 변화를 감수할 준비가 되었고, 변화의 방향이 어디를 가리키는지를 받아들였을 뿐이라고 하면 될까. 이런 답변을 들으면 가벼운 관계일수록 빠르게 화제를 전환할 것이다. 하지만 내게는 진심 어린 걱정을 표현해주는 이들이 더 많다. 예전 같으면 이들의 걱정을 덜어주는 게 보답하는 길이라는 생각에 고민 중인 것들 중 가장 현실적이고 명쾌한 몇 가지를 서둘러 내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나의 고민이 손에 잡힐 듯한 설명으로 끝나고 말 것이 아님을 안다. 사는 지역을 바꿔도, 하는 일을 바꿔도 알맹이는 그대로 둔 채 껍질만 새것으로 교체한다면 몇 년만 지나도 같은 고민으로 골머리를 앓을 것이다. 내 삶의 알맹이를 익숙한 껍질에서 새로운 껍질로 교체하는 것은 이미 몇 차례 겪었고, 이런 방식이 불러일으키는 변화의 바람은 몇 년을 버티지 못했다. 지금 필요한 것은 새로운 씨앗을 심는 일이었다. 시인 메리 올리버(Mary Oliver)의 시 ‘Sometimes’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Instruction for living a life:    인생을 살아가기 위한 지침:

Pay attention.                        주의를 기울여라.

Be astonished.                       경이를 느껴라.

Tell about it.                          그것에 대해 이야기해보라.


이 시의 표현을 빌리면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지 않을까. 직접 심은 씨앗의 싹을 틔우고 정성껏 가꾸면서 빚어지는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고(pay attention), 놀라워하며(be astonished), 놀라움에 대해 끄적여보는 것(Tell about it)이라고 말이다.


삶의 터전을 바꾸기로 마음먹은 점에 대해서는 여러 심리적인 저항이 따랐다. 가장 마음을 괴롭혔던 것은 진정으로 강한 사람은 어떤 상황에 있든지 위기를 기회로 바꾸고 고통에서 경이를 발견한다는, 어릴 적부터 반복해 들어온 전설 같은 메시지였다. 하지만 나는 그럴 수 있는 위인이 아니었다. 대신 그럴 수 있는 위인이 될 수 있는 환경으로 나를 이동시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 아님을 깨달았다. 무엇보다 내 삶의 알맹이가 되어주었으면 하는 것이 보다 명확해졌다. 이 이야기는 차근차근해나가고 싶다. (사실 글을 쓰는 과정에서 바뀌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걱정 때문에 가능성을 열어두고 싶다. 이 또한 새로운 알맹이에 깃든 방식이다.) 6개월간의 직장 생활을 마치고 다시 백수 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번에도 일을 구할 생각은 없다. 삶의 터전을 바꿀 때까지 몇 개월의 시간과 얼마만큼의 자금이 있다. 그동안의 고민으로 발견한 알맹이를 현실에서 얼마큼 구현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고자 한다. 그 시작이 바로 ‘무소비(에 가까운) 생활’이었다.


지금까지 내가 무소비 생활을 시작하게 된 계기를 다소(?) 장황하게 이야기해보았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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