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이스 하이드의 ⟪선물⟫을 읽고 - Part 1
주위를 둘러보면 선물공동체의 생명력과 가능성을 몸소 실천으로 증명해 내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심지어 대다수가 살면서 한 번쯤은 선물공동체를 경험한 적 있다. 학창 시절의 마니또든, 지인들로부터 대접받은 한 끼 식사든 간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물공동체의 자장 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은 더 쉬워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유와 유를 연결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있던 ‘선물’을 재조명하여 우리 삶에 보다 강력히 접속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학창 시절 수업 중에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도 죄악이니라' 하고 한탄하셨던 선생님이 계셨다.^^ ‘말씀’의 타깃이 된 친구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는데, 머리는 영민하나 공부가 게을렀다. 수학, 과학에 특화된 자질을 높이 평가했던 당시 학교 환경에서 두루 인정받을 수 있는 재능은 ‘높은 지능’이었다. 학교급이 오를 때마다 대대적으로 치르는 지능검사 결과에 따라 암묵적으로 잠재력을 인정받는 친구들이 생겼는데, 유독 이 선생님께서는 그 수혜자들을 공식적으로 확인시켜주곤 했다. 그럴 때면 타깃이 된 친구들은 억누를 수 없는 자부심과 자조 섞인 미소로 답변을 얼버무렸고, 나를 비롯해 이를 바라보는 친구들은 부러움과 무력감을 감추려는 듯 더 큰 소리로 웃곤 했다. 성적 좋은 학생이 교사의 관심을 받을 때와는 다른 종류의 술렁임이 교실 저변에 흘렀다. 노력과 상관없이 타고난 재능만으로도 잠재력을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당시에는 절망적으로 느껴졌던 것 같다.
루이스 하이드의 ⟪선물⟫을 읽고 떠오르는 생각을 정리하다 문득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것도 죄악'이라는 말이 떠올랐다. (이 책의 원제는 ‘The Gift’로, 책에서 gift는 선물과 재능을 동시에 일컫는 말로 쓰인다. 역자 또한 이 점을 반영하여 gift를 ‘선물/재능’으로 옮겼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논리력, 수리력 중심의 지능의 자리를 운동 능력, 미적 감각, 친화력 등 다방면의 능력을 총망라한 ‘다중지능'이 차지하고 있고,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재능이 있다는 생각이 단단히 자리 잡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재능의 크기에 따른 우열이 우리의 발목을 잡는다.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글쓰기일지라도 더 잘 쓰는 이가 있으면 우리의 재능은 날개 펼 곳을 찾지 못한다. 누구에게나 재능이 있지만 아무나 재능을 펼칠 수 없다는 생각이 우리를 움츠리게 한다.
움츠림을 피해 갈 수 없던 나에게 ⟪선물은 재능에 대한 전혀 다른 프레임을 선사했다. ‘나에게 펼칠 만한 재능이 있을까’ 했던 의구심이 ‘내가 가진 재능을 어디에 쓸 수 있을까’ 하는 고민으로 치환된 것이다. ‘재능의 유무’에서 ‘재능의 발견’으로, ‘재능의 인정’에서 ‘재능의 선사’로 무게추가 기울었다. 저자는 선물의 핵심을 ‘순환’에서 찾는다. 아무리 훌륭한 재능/선물도 그저 개인이 소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책에서는 이를 ‘음식'에 비유하는데, 음식처럼 계속해서 먹어 소비하지 않으면 부패할 뿐 아니라 선물/재능의 개체 내 축적은 사회적인 병폐를 낳는다. 그야말로 ‘죄악'인 것이다. 이것은 소위 인정받을 만한 재능에 국한되지 않고,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야기이다. 이제는 스스로에게 이 말을 건넨다. 이봐, 너의 그 눈곱만 한 재능을 낭비하는 것도 죄악이라고!
저자가 다양한 민담과 부족 전통에서 도출해낸 선물/재능의 특성은 이렇다. 끊임없이 사용됨으로써 불특정 대상 사이를 순환하는 것, 그리고 순환 과정에서 집단 전체적으로 증식물(영적, 사회적 가치들, 구성원 간 연대감 등)을 만들어내는 것. 멀리 갈 필요 없이 학창 시절 경험했던 ‘마니또'에서도 선물의 전형을 엿볼 수 있다. 학급에서 마니또를 진행할 때 A는 자신의 마니또로 뽑힌 B에게 유무형의 선물을 베풀지만, B는 고마움의 대가를 A에게 갚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마니또로 뽑힌 C에게 베푼다. A도 B도 C도 이런 구조에 억울해하지 않는다. 마지막날 서로가 서로의 마니또였음을 밝히면서 이벤트는 마무리되지만, 이벤트가 마무리됨과 동시에 교실에는 전과 다른 온기가 돈다. 무작위로 뽑힌 친구에게 대가 없는 선행을 베풀었던 경험은 누구에게든 대가 없는 선행을 베풀 수 있다는, 한층 성숙한 태도와 행동을 이끌어내고, 이런 문화 속에서 구성원 간의 신뢰라는 점착제가 생긴다. 집단 전체가 고양된 상태에 놓이면 개인은 이후에 접하는 상황들 마다 선택에 직면한다. 새로 마주한 선물의 세계를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익숙한 상품 교환의 세계, 즉 손익 계산에 따라 등가의 자산을 상호 교환하는 세계로 돌아갈 것인지. 각자의 결정에 따라 공동체의 지배적인 교환 방식이 결정되고, 공동체가 향유하는 문화도 결정될 것이다.
실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선물 방식이 어떻게 적용되고 있을까. 저자가 지적한 대로 선물 경제는 최대 1,000명 정도의 소규모 집단에 한해 적용될 수 있는 구조다. 선물 교환에는 구성원 간의 감정적인 결속이 요구되는데, 이를 무한의 대상에게 적용할 수 있는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적용한다 하더라도 결속력이 크게 약화되어 어느 수준 이상이 되면 결속력이 없는 것과 같게 될 테니까.) 상품 거래 방식에서 벗어난 형태의 소규모 공동체라고 하니 자연히 소규모 대안 공동체들을 떠올리게 된다. 작년 초부터 농촌 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로컬 문화에 관심을 갖고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중 전남 순창에 들렀다. 동생의 지인이 직접 농사지은 우리밀로 천연발효빵을 만든다기에 일일 클래스를 신청했다. 오전 10시부터 해질 무렵까지 깜빠뉴 만들기는 기본이고, 빵이 발효되는 동안 직접 반죽하여 만든 피자와 파스타, 텃밭에서 따온 갖가지 채소가 듬뿍 담긴 샐러드와 함께 만찬을 즐겼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다녀온 밀밭 나들이까지, 더할 나위 없는 ‘팜투테이블(Farm To Table)’ 체험이었다.
그때 인상적이었던 점이 크게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개발해낸 빵 레시피와 그 밖의 제빵 정보를 소액의 체험비만 낸 사람들에게 정성껏 나누는 모습이었다. 보통 도시에서는 레시피에 일종의 저작권이 있어서 쉽게 얻을 수도 없을뿐더러, 얻더라도 높은 값을 치러야 하고 다른 사람에게 전수할 수 없다는 조건도 따라붙는다. 당시 함께 일일 클래스를 들었던 분들과의 단톡방이 있는데, 여전히 이곳에서는 제빵 관련 조언이 오간다. 다른 하나는, 이곳에서 특수 제작한 빵도마였다. 어디에도 없지만 빵을 손쉽게 자르는 데 너무나도 유용한 형태여서, 이 도마를 보자마자 특허를 내는 게 어떻겠느냐는, 지금으로선 웃음밖에 안 나오는 제안을 했다. (눈치 없이) 재차 제안했음에도 가벼운 웃음으로 넘기는 주인장분을 보면서 아차, 했다. ⟪선물⟫을 읽은 지금, 당시의 깨달음을 좀 더 발전시켜 보면, 특허를 낸다는 것은 결국 다른 사람들의 사용권을 제한함으로써 선물/재능을 개인의 자본으로 전환하여 소유하는 행위인 것이다. 이곳 공동체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방식이었다. 주인장분의 말 중 오래 남는 게 있다. “이곳에서는 필요한 게 있으면 어디선가 생겨요. 밀밭은 추수 시기가 일러서 추수를 앞두고 콤바인 빌리기가 어려워요. 혼자서 이 넓은 밭을 어떻게 작업하나 싶으면, 어떻게 알음알음 형편을 알고 와서 도와주는 분들이 꼭 있어요. 필요한 게 있으면 어떻게든 채워져요.” ‘선물은 항상 빈 곳으로 이동한다’는 책의 메시지에 대한 생생한 증언이었다.
도시에서도 적지 않은 선물공동체를 목격하고 있다. (정확히 말하면 그간 알아보지 못했지만,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농촌공동체와 차이가 있다면, 선물 교환의 형태가 삶의 전반이 아니라 삶의 특정 영역(인문학 공부, 유기동물 자원봉사 등)에 한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나머지 영역, 특히 생계와 관련된 것들은 상품 경제의 룰을 따른다. 내가 알고 있는 한 배움 공동체에서는 인문학을 바탕으로 마을 아이들에게 강연과 체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아이들이 성인이 된 후 자립하기까지 도움을 줄 수 있는 마을 어른의 역할을 한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다시 마을로 돌아와 뉴키즈들을 위해 자신의 재능을 쓰는 순간, 선물공동체는 확고한 생명력을 얻을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선물을 주는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긴 기다림을 인내할 수 있는 희망과 연대이지 않을까.
많은 이가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개인의 부를 불리거나 상품을 소비하는 데 투입하는 동안에도, 우리 곁에는 자신이 가진 것을 고민하고 발견하여 자기 안에 가두지 않고 사회 성원들을 위해 쓰는 이들이 꾸준히 있었다. 누군가는 계란으로 바위 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계란으로 꼭 바위를 깨뜨려야만 하는 것은 아니니까. (책 후반부에 등장하는 시인 에즈라 파운드가 ‘헤르메스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도 계란으로 바위를 깨뜨려야만 한다는 집요함이 작용했다고 생각한다. 이 점은 다음 편에서 자세히 다루고 싶다.) 저자의 말처럼 문제는 “선물과 상품이 공존할 수 있는가가 아니라 한쪽이 상대방을 파괴하지는 않으면서 뽑아내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까"임에 공감한다. 농촌과 도시의 여러 대안 공동체들이 선물과 상품이 공존할 수 있는 경계를 가늠하는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온통 상품 경제 투성이인 지배적인 방식에 쉽게 파묻히지 않고 대안 공동체들이 전하는 생생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다면, 그중 한 조각만이라도 우리 삶에 끌어들일 수 있다면, 완전하지 않더라도 그 실천을 지속할 수 있다면, 우리는 계란으로 바위를 깨는 순간을 목격할지도 모른다.
선물 경제의 목격자에 그치지 않고 참여자로 거듭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 책에서는 선물을 받는 자에서 주는 자로 변화하기 위해 두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말한다. 바로 자신이 받은 선물/재능의 정체를 제대로 인식하는 것, 그리고 선물/재능을 제대로 줄 수 있는 경지에 이를 때까지 갈고닦는 것이다. 이 중 두 번째 단계가 암시하는 사실, 즉 선물을 받았다고 누구나 바로 줄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나를 강타했다. 자기에게 주어진 선물/재능을 인지하는 순간, 우리는 이것을 빠르게 사용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곤 한다. 나 또한 배움터에서 아이들을 위해 발휘할 수 있는 선물/재능을 발견했고, 이를 서둘러 현장에 적용하여 변화를 목격하고픈 욕구에 사로잡혔다. 의욕이 앞섰던 만큼 좌충우돌도 많았고, 체력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크게 소진되었다. 돌이켜보면, ‘주는 자’가 되고 싶은 조급증이 선물의 단명을 초래한 것은 아니었을까. 루이스 하이드는 단언한다. 선물을 줄 만큼 충분한 힘을 갖추기 위해서는 노동하는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이 노동은 ‘감사’를 매개로 이루어진다고. 저자는 ‘감사’를 두고 “선물이 받아들여진 후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영혼이 떠맡는 노동”이라고 표현했다. 이 말은 선물을 줄 수 있는 힘을 키우기까지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해야 한다는 표현으로 들리지만, 실제로는 감사하는 마음을 유지해야만 진정으로 줄 수 있는 힘을 갖게 된다고도 읽힌다. 감사는 곧 선물의 무게를 견디는 것이고, 이는 당장의 성과에 연연하지 않는 인내의 모습을 띄고 있을 거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진다.
책에서는 이와 관련된 사례로 미국의 ‘익명의 알코올중독자들(AA)’ 모임이 소개된다. 비영리단체인 AA는 치료자와 환자 모두 자발적이고 비이윤추구적인 방식으로 참여하며, 치료에 성공한 이들은 치료자가 되어 다른 환자들의 회복을 조력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선물공동체에 속한다. 하지만 완벽한 회복, 즉 치료 행위를 받은 사람에서 주는 사람이 되기까지는 총 열두 단계를 거쳐야 하는데, 이를 ‘두 걸음에 오르려는 자'가 존재한다고 저자는 지적한다. 자신이 받은 선물의 경험이 놀라운 나머지 성급히 선물을 주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다. 쉽게 예상할 수 있듯이, 깨달음은 일시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수는 있으나 안정적인 습관이 되기까지 많은 도전을 겪어내야 한다. 선물 교환에서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숙성기’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받은 선물을 충분히 감사할 줄 아는 것, 이것을 충분히 소화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베풀려는 노력을 그치지 않는 것, 그 과정에서 자신의 선물/재능에 대한 의심과 두려움을 이겨내고 자기 속도로 나아가는 것, 여기에는 엄청난 인내와 용기가 필요할 것이다.
그렇다면 내가 받은 선물은 무엇일까, 나는 선물 행위의 어느 단계에 있을까. 처음으로 내가 가진 선물을 누군가에게 베풀고 싶다고 생각한 건, 아니 그 욕망에 사로잡혔던 건 서른 무렵이었다. 이런저런 시련을 겪고 이겨내면서 내 안에 단단한 무언가가 생겼고 이 과정과 깨달음을 다른 사람들과 나누고 싶었다. 나와 비슷한 암흑기를 보내고 있을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싶었다. 그리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곳으로 학교라는 배움터를 떠올렸다. 내가 학창 시절을 훌쩍 넘기고 나서야 깨닫게 된 것을 아이들이 지금부터 찬찬히 고민할 수 있었으면, 그 과정을 도울 수 있었으면 했다. 그런 마음으로 학교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교사로서 나는 내가 받은 선물을 주고 있었을까, 아니면 선물 받은 것을 섣부르게 주려고 하는 데 그쳤을까. 선물 받은 것을 섣부르게 주려고 하다가 주는 법을 조금씩 배웠던, 하지만 아직까진 진정으로 줄 수 없었던 경험인 것도 같다. 어쩌면 이 일을 하는 내내 완벽히 주는 경험을 못할 수도 있겠다 싶기도 한데, 이런 생각이 되려 위로와 용기가 되는 것 같다. 선물이 내 안에서 충분히 숙성되기까지 오랜 시간의 인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이다.
김연수 작가는 최근작 ⟪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통해 오늘의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힘이 가장 멋진 미래를 상상하는 힘에서 비롯될 수 있다고 말한다. 우리는 현재의 나를 이해하려 할 때 ‘과거의 나’들을 소환하려 하지만, 과거의 지분은 언제나 절망이 희망을 압도하고 우리는 한 발짝도 내딛을 수 없다. 하지만 실재하는 것은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일 뿐이며, 현재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가슴속에 품고 있는 한 장의 그림일 수 있다. 어떤 마음을 안고 살아가는지가 우리를 움직이게 하고,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 그림 속 풍경이 곧 자기 자신이라는 마음을 갖는 것만으로도 가슴 깊은 곳에서 꼼지락거리는 게 느껴진다.
우리가 ‘선물’을 대하는 자세도 이와 비슷해야 하지 않을까. 기후위기, 전쟁, 혐오, 착취 등으로 물든 세상에서 선물공동체는 시대에 뒤떨어진, 허울 좋은 남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선물공동체는 이미 우리 삶 곳곳에 침투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주위를 둘러보면 선물공동체의 생명력과 가능성을 몸소 실천으로 증명해내는 이들이 우리 곁에 있다. 심지어 대다수가 살면서 한 번쯤은 선물공동체를 경험한 적 있다. 학창 시절의 마니또든, 선배나 상사, 지인 들로부터 대접받은 한 끼 식사든 간에 우리는 알게 모르게 선물공동체의 자장 안에 있다. 그렇다면 우리의 상상은 더 쉬워진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게 아니라, 유와 유를 연결하는 지혜를 발휘하면 되는 것이니 말이다. 결국 우리 삶 곳곳에 흩어져있던 ‘선물’을 재조명하여 우리 삶에 보다 강력히 접속시키려는 노력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내 가슴속에 품고 싶은 그림을 떠올려본다. 그 안에는 사랑과 감사가, 나눔과 베풂으로 연결된 뜨뜻한 관계들이 있다. 이 사진을 안고 살아가는 오늘은 어떨까, 내일은, 그리고 10년 후는? 마음이 꼼지락거린다. ‘가장 좋은 것은 가장 마지막에 온다'라고 주문을 외워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