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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Dec 27. 2022

'사랑'의 재평가

<사랑은 왜 끝나나(에바 일루즈)>를 읽고

 <사랑은 왜 끝나나(에바 일루즈)>는 현대인의 ‘사랑'의 모습과 특징을 사회학적으로 풀어낸 책으로, 이 책에 등장하는 성별 특징들은 저자가 다양한 사례 연구를 통해 분석하고 구조화한 보편적인 경향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개별적인 성향과 별개로, 사회구조적으로 발현되는 특성임에 유의해주세요.



정말 오랜만에 이상형이 어떻게 되느냐는 질문을 받고 머릿속이 하얘졌다. 인생에서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싶은지는 나이를 먹을수록 꾸준히, 더 자주 고민하고 있지만, 어떤 이성과 만나고 싶은지는 고민은커녕 떠올리기조차 중단한 지 오래됐기 때문이다. 많은 이들, 특히 여성들은 서른을 넘기면서 인생에서 ‘결혼’이란 이벤트에 어느 비중을 둘지 자기 조율 과정을 거치는 것 같다. 나 또한 여러 상황을 거쳐 지금은 결혼하지 않는 것이 선택의 기본값으로 자리 잡았는데, 결혼에 대한 입장이 바뀌니 삶에서 생각보다 많은 영역이 도미노처럼 영향을 받는 것을 발견하고 있다. 비혼 상태가 비혼 정체성을 강화하고 비혼 정체성이 비혼 상태를 강화하는 ‘정적 강화’가 오래 지속되면서, 이제는 비혼을 유지하는 데 유리한 가치관과 환경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수집하고 장착하기에 이르렀다. (더 정확히는 이러한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행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결국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진다고 자부하고, 그에 따른 난관이 있다면 기꺼이 극복할 방법을 찾는 것 또한 삶의 보람이라고 생각해 왔다. 충격적이게도, 사회학자 에바 일루즈의 <사랑은 왜 끝나나>가 내게 던진 가장 큰 물음은, 이 모든 상황이 내가 진정 원해서, 순수하게 나의 욕망에 충실한 선택이었느냐 하는 것이었다. 사랑에 대한 선입견을 최대한 내려놓은 채, 나에게 ‘사랑’이란 관계가, 이를 제도적으로 보장해주는 ‘결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처음부터 되짚어보기로 했다.


불확실한 시대에 최선의 선택은 하지 않기를 선택하는 것!

이 책에서 에바 일루즈는 무한한 자유에 기반한 섹슈얼리티가 ‘사랑’이라는 친밀한 관계를 얼마나 불확실하고 허약하게 만들었는지를 보여준다. 신뢰의 원천이 ‘감정’에서 ‘몸’으로 이동한 과잉섹슈얼리티가 정신분석학과 소비자본주의를 통해 사회 전반에 확산되면서 관계 맺기의 방식에 거대한 변화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전통 사회에서는 ‘구애’라는 사회규범적 절차를 통해 관계의 시작과 발전, 마무리가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하게 이루어졌다면, 현대 사회에서는 어떤 합의된 규칙도, 문화도 없이 관계에 가담한 양쪽 대상이 서로의 반응에서 즉각적으로 단서를 찾아 그들만의 룰을 만들어야 한다. 자연히 현대 사회의 관계는 ‘불확실성’으로 정리된다. 현대인에게 ‘감정’은 불확실성을 키울 뿐이며, 확실한 것은 ‘몸’으로 귀결된다. 감정 없는 캐주얼섹스가 만연하는 이유이다. 다른 한편으로는 불확실한 관계가 초래할 위험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선택을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저자는 이를 ‘부정적 선택’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이 책의 제목이기도 한 ‘unloving’은 관계를 거부하거나 회피하는 방식의 ‘부정적 선택’을 일컫는 말로, 이러한 선택을 하는 대표적인 이유는 개인의 자존감을 지켜내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는 ‘예측가능성’을 기반으로 지속될 수 있다. 그러나 현대인, 특히 성적 자유를 통해 자신의 사회적 신분과 권력을 확인하려는 성향이 강한 남성은 자율성을 침해하는 관계를 피하려고 하며, 이러한 행위는 사회적 비난 없이, 오히려 지지를 받으면서 무리 없이 진행된다. 반면 사회적으로 돌봄 영역을 담당하며 감정 기반의 친밀한 관계를 중요시하는 성향이 강화된 여성은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원치 않는 선택을 강요받는다. 즉, 남성의 전유물과도 같았던 자유로운 섹스를 추구하면서 가벼운 만남을 이어가거나, 아예 연애나 결혼처럼 깊은 감정 교류를 동반하는 관계를 선택지에서 제거해버린 것이다. 특히, 후자의 경우 페미니즘을 통해 여성성을 중심에 둔 가치와 행동 양식에 대한 정보와 이해가 확산되면서 점차 많은 여성의 지지를 받고 있다.


섹슈얼리티의 자유는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는가

이러한 선택으로 여성은 더욱 주체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 살아가게 되었을까. 저자는 오히려 섹슈얼리티의 자유가 여성의 몸을 더욱 교묘하게 지배하고 통제한다고 말한다. ‘성해방’은 자유와 평등의 탈을 쓴 채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화, 즉 남성의 시선을 자극하는 몸과 섹슈얼리티를 추구하는 것이야말로 최선의 (혹은 나쁘지 않은) 탈출구라는 프레임을 강화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섹슈얼리티 중심의 만남의 장을 선도(?)하는 데이팅앱은 이용자들이 앱화면에 상품처럼 진열된 프로필을 보며 쇼핑하듯 데이트 상대를 고르게 한다. 자연히 관계 이행에서 말초적인 시각 요소가 강화되고, 상대의 지위를 소비대상으로 격하시킴으로써 권력을 행사하는 듯한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결국 관계는 소비적인 행태를 띠게 되고, 자기 영역으로 깊숙이 들어오려는 상대에게 철벽을 치는 방식이 빈번해진다. 이와 같이 성해방에서 비롯된 성긴 관계는 겉으로는 성별 구분 없이 공평하게 적용되는 것 같지만 실상은 다르다. 섹슈얼리티 자체가 남성의 시선에 초점이 맞춰진, 몸에 기반한 스펙터클을 경험하는 데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관계’에 무게를 두려는 여성은 계속해서 소외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성해방 중심의 페미니즘 계열은 현실에 만연한 성별 간 권력관계에 반쯤 눈을 감은 채, 남성에게 친숙한 논리를 여성에게 억지로 강요하는 듯한 불편함을 지울 수 없다.


섹슈얼리티의 강압에서 벗어나 삶의 중심을 친밀한 관계로 채운 여성들은 외모, 몸매 등에 대한 남성들의 시각적 평가에서 해방된 것을 느낀다. 책에 제시된, 이성애자에서 레즈비언으로 정체성을 바꾼 한 인터뷰이는 상대에게 외적으로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는 데서 자유로워진 변화에 크게 만족한다. 이미지 경제에서 거래 가능한 자산으로 거듭난 룩(look), 즉 패션스타일과 카리스마, 몸매 등 시각화된 섹슈얼리티의 총체는 성평등을 향한 어떠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성이 주체성을 완전히 회복하지 못하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해왔다. ‘섹시하다’는 표현은 외설적이라는 딱지를 벗어던지고 듣기 좋은 칭찬으로 변모한 지 오래이며, 수년 전 과포화 상태라 전망됐던 섹시 컨셉의 걸그룹 문화는 확산세를 이어가더니 K-pop의 한 축으로 자리 잡았다. ‘걸파워’, ‘건강미' 등 여성의 주체성과 자율성을 강화한 표현으로 덧씌워지기도 하지만, 남성 시선에 의존한 섹시한 이미지에서는 벗어나지 못했다. 심지어 남성과의 결혼을 거부한 여성 비혼주의자조차도 성공적인(?) 비혼주의자가 되기 위해서는 나이를 거스르는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 꾸준히 외모를 가꾸는 데 투자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는다. 결국 남성 중심의 섹슈얼리티 문화에서 여성은 남성과의 관계를 상정하는 순간 남성 중심의 시각적 평가에서 자유로울 수 없으며, 위협받는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선택의 기로에 놓인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남성의 시선을 만족시키고자 애쓰든지, 아니면 남성과의 사랑을 거부하든지.


여성들의 출구 전략

젊은 세대에게 이성 간의 결혼제도는 매력도가 떨어지는 선택지가 되어가고 있다. 배려, 희생, 헌신 등의 가치를 '자유'보다 우위에 두기를 꺼려하는 현대인에게, '사랑'은 삶의 불확실성을 높이는 위험한 선택이 된다. 저자는 관계의 불확실성을 피해 관계의 ‘계약화’가 이루어지며, 여성들이 남성형 선택지인 ‘캐주얼섹스'에 비자발적으로 동의하고 이런 형태의 계약에 충실하고자 위축된 채로 자신의 감정을 회피한다고 말한다. 여성이 상대를 향한 서운함, 억울함, 분노 등의 감정을 자연스럽게 표출하지 못하고 이들 감정이 계약에 어긋나는 것은 아닌지 점검하는, 이른바 ‘메타감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이는 연인과의 결혼을 희망하는 여성 지인들에게서도 많이 목격한 현상이다. 결혼제도로 진입하는 것은 자신의 자율성을 지키고자 하는 남성에게는 부담되는 일로, 남성들은 최대한 결혼을 미루려는 태도를 취한다. 여성은 자신의 결혼 의사를 어떻게 밝혀야 할지, 자신이 상대에게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자기만의 욕심을 강요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하면서도, 대안이 없다면 마땅히 감수해야 할 일로 받아들이고 인내한다. 나이를 먹을수록 커리어가 쌓이고 사회적 기반이 닦이면서 비혼 상태를 유지하려는 여성들도 크게 늘었지만, 여전히 많은 이에게 결혼을 통해 가족제도권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안정적인 정서 관계를 확보하기 위한 수단으로 여겨지기에 여성들의 인내는 계속된다.


몇 년 전 우연히 강연회에 갔다가 알게 된 김하나, 황선우 작가의 ‘조립식 가족' 형태는 지금껏 보아온 여성들의 출구전략 중 최고였다. 두 사람은 소위 ‘결혼 적령기’를 넘기고 비혼의 길을 걷던 중,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멋진 친구이자 가족이 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김 작가의 말을 빌리자면, 황선우 작가가 말할 때 쓰는 모든 표현에서 조금도 불편함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생각이 잘 통하고 신뢰감이 들었다고 한다. 거슬리는 표현 사용이 없다는 것은 곧 비슷한 도덕관, 윤리관을 갖고 있다는 신빙성 높은 지표가 된다. 결혼에는 뜻이 없지만 심리적 안전망이 될 가족의 필요성을 느꼈던 둘은 가족이 되기를 선언한다. 여자 둘이 사는 형태야 흔한 일일 수 있지만, 이들의 동거가 주목할 만한 점은 관계의 영구성에 있다. 둘 중 한쪽의 연애나 결혼으로 언제든 해체될 수 있는 한시적 관계가 아니라, 둘이 배우자급의 동반자 관계를 이루기로 한 것이다. 두 여자가 가족이 되기로 결심한 뒤 주거 공간을 마련하고 함께 살면서 겪는 좌충우돌, 우여곡절은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라는 책으로 기록되어 2-30대 여성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었다. 더 이상 이성애에 기반한 관계와 결혼제도에 매달리지 않아도, 여자들 간의 끈끈한 우정으로 지속될 수 있는 ‘대안가족'의 모델이 나타난 것이다. 남성 중심의 성적 자아에서 벗어나 여성들이 중시하는 관계 기반의 감정적 자아를 충족시킬 수 있는 현명하고, 영리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인간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자유로운 선택’이 아닌, ‘풍요로운 관계’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무조건적인 사랑에 대한 기대와 희망을 버리고 싶지 않다. 이런 류의 사랑은 깊은 신뢰를 바탕으로 형성될 텐데, 책에서는 ‘신뢰’를 “쌍방이 투자를 늘리고 서로에게 신용을 입증하면서 단계적으로 형성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저자의 말대로 ‘부정적 관계’로 인해 관계의 네트워크는 강화되었지만 결속력은 떨어지고 있다. 한 사람이 다룰 수 있는 인간관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네트워킹된 대상이 많아질수록 각각에 쏟을 수 있는 열정과 신뢰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그마저도 자본주의 체제에서 ‘네트워크’는 인맥과 동의어로 개인적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동원될 수 있는 가용 자산으로 여겨지는 듯하다. 결국 결속력 없는 네트워크 늘리기에 골몰하는 것은 관계를 도구화하는 데 일조하지 않을까 싶다. 이런 점에서 관계의 미래처럼 일컬어지는 ‘느슨한 연대’라는 양식에 보냈던 맹목적 지지에 급브레이크를 걸게 된다.


사랑에서도 마찬가지다. 서로 썸 타면서 상대의 간만 보다가 유야무야 되거나 관계가 진전될 기미를 보이면 끊어내기 일쑤다. 각종 상담서비스에서는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자신’이며, ‘자기 되기’를 방해하거나 위협하는 요소들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야 한다는 메시지로 불확실성에 사로잡힌 마음을 다독인다. 해소되지 못한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심리치료, 명상 등에 집중하지만,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다뤄져야 할 문제가 내면에만 집중한다고 해결될 리 만무하다. 관계에서 더 많은 것을 바라고, 이런 마음을 솔직하게 내비치는 것은 열등한 행위일까. 관계에서 오는 상처를 피한다고 자존감을 지켜낼 수 있을까. 진정 원하는 것을 시도조차 하지 못한 마음으로 어떻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책 속에 인용된 신뢰란 "서로를 위해 기꺼이 상처받을 각오"라는 말이 마음속에 맴돈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상대가 상처받을 각오로 뛰어들 만한 대상인지 아닌지 간 보다가 끝나고, 아니 끝내고 말겠지…


김하나, 황선우 작가 방식의 ‘대안가족’으로 돌아가보자. 서로 비슷한 생각과 취향을 가졌다고 생각했던 둘은 가족이 된 뒤 예상치 못한 갈등에 직면한다. 미니멀리스트 대 맥시멀리스트, 바로정리주의자 대 나중정리주의자, 사먹는주는자 대 요리해먹는주의자 등 따로 살 때는 사소해 보일 법한 생활습관의 차이로 격하게 다투기도 하고 며칠간 냉전에 돌입하기도 한다. 하지만 문제에 직면하고 뜨거운 대화를 통해 해결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둘은 갈등을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이 아닌, 일시적인 냉전 상태로 제한하는 법을 익힌다. 그 사이 서로 간에 깊은 신뢰가 쌓인 것은 물론이고, ‘여자 둘이 토크하고 있습니다(일명 여둘톡)’라는 팟캐스트를 만들어 둘이 진솔한 대화를 통해 함께 발전시킨 삶의 태도, 가치관 등을 많은 이들과 공유한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는 즉각적인 웃음을 자아내기 위해 흔히 쓰이는 과격 표현이나 소수자를 비하하는 폭력적 유머, 편 가르기식 진행이 없기에 더욱 진한 재미와 감동이 있다. 이곳에서 다뤄지는 이야기는 어느 것 하나 사소하지 않다. 이들 사이에 오가는 대화는 물론, 청취자 게시판에 올라온 사연들까지, 모든 존재의 목소리가 경청되는 느낌이 프로그램 곳곳에 배어있기에 녹음을 듣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된다. 깊은 신뢰에 기반한 두 작가의 관계가 더욱 넓고 촘촘한 관계망으로 확산되고, 이 안에서 많은 사람들이 직접 사연을 적어서든 경청을 통해서든 마음을 주고받는다는 느낌이 든다. 두 작가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서로 폐 끼치지 않으려 조심하기보다는, 상대에게 더 많은 판돈을 깔면서 그렇게 쌓인 관계의 힘으로 더 큰 일을 도모할 수 있다고! 강한 결속력에 기반한 관계가 넓은 네트워크를 형성하며 선한 영향력을 미치는 관계로 확산된다니, 이들의 선택을 더욱 지지하고 흠모하게 된다.


결국 성별이 뭐든 간에 모든 인간은 어떻게 해서든 자기 외의 다른 존재와 연결되었다는 감각을 찾아 헤매지 않을까. 쉽게 끝낸 관계들로 허약해진 자아는 타인은 물론 자신에게도 매력적이지 않을뿐더러, 그렇게 반복되는 관계는 곧 시시해지고 만다. 관계의 한꺼풀만 경험한 사람일수록 사람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인식이 강해지고 관계의 허무함으로 빠지는 듯하다. 관계의 다양성은 어느 범위를 넘어서면 그다지 신선하게 체감되지 않는다. 그다음은 관계에서 맺고 있는 깊이, 즉 상호신뢰에 달려있다. 관계에도 한계효용체감의 법칙이 적용되는 것이다! 익숙하지 않은 존재들과 상처를 주고받고 부대껴 본 사람에게만 열리는 우주가 있다고 믿는다. 겉보기에는 뒤죽박죽이고 자기 존재를 파괴하고 옥죄는 것 같아도, 이런 관계는 오래 지속될수록 진가를 드러내게 마련이다. 그때까지는 견디는 수밖에.


오래전 읽었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오른다. 구체적인 내용은 증발되었지만, 결말만큼은 강렬히 남아있다. 그 핵심은 지속적인 관계 추구를 통한 자아의 변화에 있다. 자유연애를 추구하는 토마시와 낭만적 연애를 추구하는 테레자는 수차례 고비를 넘기며 일평생을 함께 한다. 한 호텔바의 홀에서 함께 춤을 추며 테레자는 자기 때문에 토마시가 그의 임무와도 같았던 수술하는 꿈을 펼치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후회하며 그에게 용서를 빈다. 하지만 그녀의 말에 토마시는 놀라며 진심을 담아 말한다. “임무라니, 테레자, 그건 다 헛소리야. 내게 임무란 없어. 누구에게도 임무란 없어. 임무도 없고 자유롭다는 것을 깨닫고 나니 얼마나 홀가분한데.” 사랑과 맞바꾼 자유는 토마시에게 새로운 세계를 선사했다. 그는 진정한 자아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더욱 넓고 풍성한 자아의 세계로 들어선 것이다. 누가 그에게 실패한 인생이라고, 자신이 아닌 삶을 살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인용한 김에 같은 페이지에 나오는, 이들 사이에 오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서술한 부분을 조금 더 적어본다.

그들은 피아노와 바이올린 소리에 맞춰 스텝을 밟으며 오고 갔다. 테레자는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안갯속을 헤치고 두 사람을 싣고 갔던 비행기 속에서처럼 그녀는 지금 그때와 똑같은 이상한 행복, 이상한 슬픔을 느꼈다. 이 슬픔은 우리가 종착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행복은 우리가 함께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슬픔은 형식이었고, 행복이 내용이었다. 행복은 슬픔의 공간을 채웠다. (p. 506,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밀란 쿤데라)>)

어찌 보면 여기까지는 기존의 틀, 즉 자유, 경쟁, 정복, 개발, 발전을 추구하는 근대 자본주의가 심어놓은 제도와 문화에서의 최선에 불과한 결말일 수도 있다. 이 체제에서 ‘돌봄’ 영역을 줄곧 도맡아온 여성은 섹슈얼리티의 자유라는 사회적 현상 앞에서 어떻게든 선택지의 일부는 없는 듯 살아야 했다. 하지만 성장과 소비 중심의 자본주의는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피할 수 없는 착취 구조로 인해 지속가능한 생태계를 조성하는 데 실패했을뿐더러 태생적으로 이러한 역할을 구현할 수 없음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등장하는 대안 시스템의 주된 특징은 다양한 존재가 상호 신뢰를 바탕으로 관계성을 회복하는 데 있다. ‘관계성’이 중심 문화로 자리매김한 사회에서 다양한 주체는 성별에 따른 사회적 역할과 지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지 궁금하다. 인류 문화의 대전환기를 겪고 있는 시점에서 기존의 여성과 남성은, 성소수자는 어떤 방식으로 새로운 문화에 융화될 수 있을까. 연착륙할 수 있는 방법은 결국, 끈끈한 관계 속에 자신을 내던지는 용기와 실천일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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