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자유'는 친해지고 싶은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아우라를 가진 친구 같았다. 자유 주변은 언제나 사람들로 붐볐다. 문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이 더 많은 인파를 부르듯, 스스로 '자유로운 영혼'이 된 이들은 자유의 표상들--히피풍의 패션과 무심한 듯한 시선과 말투, 목적 없이 흐르도록 두겠다는 태도 등--로 단장한 채 자유와의 친분을 과시했다. 차마 다가갈 용기를 내지 못하거나 몇 차례 시도했으나 거부당해(혹은 거부당했다고 생각해) 마음의 상처를 입은 이들은 내 것이 될 수 없으면 파괴하리라는 마음으로 자유를 세상 물정 모르고 오만한 철부지라고 비하하기도 했다. (비하 또한 끊어지지 않는 관심의 표출이지만.) 남 이야기처럼 말했지만 모두 자유와 관계 맺는 과정에서 내가 거쳐온 양극단이며, 자유를 흠모해 본 이라면 어느 정도 맛보았을 경험이기도 하다. 대부분의 짝사랑은 이뤄지지 않지만 부대낌의 과정을 어떻게 지나왔는지가 인생에 무늬를 그려내고 조금씩 다른 결의 행보를 만들어낸다. 자유를 향한 오랜 짝사랑은 내게 역마살을 남겼다.
원하는 일보다 해야 하는 일에 무게를 싣는 성향 때문에 '자유'와의 관계 정립이 서툴렀다. 누구나 겪는 사춘기를 쿨하게 패스한 10대에는 자유는 소위 놀 줄 아는 친구들의 전위물로 여겼지만, 어른 말씀 잘 듣고 각종 규범을 착실하게 지켜내는 자신이 지질하게 느껴졌다. 20대가 되어 대학에 진학한 뒤로는 10대 때 지켜본 자유의 표상과도 같았던 친구들의 면면을 은근슬쩍 빌려왔다. S의 호탕한 웃음과 끊이지 않는 입담, 또 다른 S의 능청맞은 무심함, H의 확고한 핑크 취향 같은 것들이었다. '자유'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었기에 감행할 수 있었던 부끄러운 행보들이 꽤 있었다. (대부분 '술'과 관련돼 있다.) 졸업 후 직장에 다니면서 금전적 여유가 생기자 새로운 지평이 열렸다. 먹고 싶은 것을 마음껏 먹고, 입고 싶은 옷을 마음껏 사고, 배우고 싶은 것을 마음껏 배우고, 뭐든지 닥치는 대로 마음껏 하는 것이 당시의 자유였다.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지면서 자유와의 친분을 과시할 수 있는 폭도 넓어졌다. 비용 대비 효과가 가장 큰 것은 단연 '여행'이었다.
여행에는 자유 내음이 물씬 풍겼다. 물론 패키지가 아닌 '자유여행'이어야 했고, 여럿보다는 혼자, 국내보다는 해외가, 현대적인 도시보다는 투박하고 독특한 색감의 풍경을 지닌 곳이 더욱 자유스러웠다. 그래서 나의 여행 수칙은 이랬다. 혼자서, 자유여행으로, 구체적인 계획 없이, 최대한 이국적 느낌이 강한, 외국으로, 가자! 여행 중에는 한인민박을 이용하지 않고 저렴하면서도 깔끔한 호스텔에서 묵었고, 한국인들보다는 외국인들과 교류했다. 한 번에 한 국가만 천천히 여행했고, 잘 알려지지 않은 도시들을 선호했으며, 유명 관광지보다는 발길이 닿는 대로 다니면서 나만의 보석 같은 곳들을 발견했다. 사진은 최소한으로 찍고, 노트와 펜을 항상 지니고 다니면서 머무르고 싶은 곳이면 어디든 주저앉아서 오래오래 글을 썼다. 그러고 있자면 내가 정말 자유로운 인간이 된 것 같은 만족에 취했고, 그 기운으로 여행 후 현실을 살아냈다.
2019년 2월 모로코 여행을 마지막으로 4년여간 해외여행을 가지 못했다. 코로나 여파로 여행길이 막혔고, 코로나가 잠잠해졌을 무렵에는 미친 듯이 바쁘다가 미친 듯이 무기력해졌다. '자유력'을 주기적으로 확인시켜 주던 리트머스지가 사라지니 갑갑했다. 캠핑에 취미를 들여 날씨 좋은 주말이면 숲으로 바다로 떠났지만, 캠핑장은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로 북적였다. 일상에서 벗어나 온전히 혼자일 수 있는 곳, 눈치 보지 않고 나만의 방식으로 말하고 행동할 수 있는 곳, 완벽히 낯선 자연과 건축물, 언어와 음악, 음식과 장식 등이 어우러져 내가 누구인지는 잊어도 그만인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인생에서 여행이 빠지고 나니 이렇게 재미도 개성도 없는 무색무취 인간이 있을까 싶었다.
여행 자체가 그리웠다면 잠깐 국내 여행으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가끔 제주도와 지리산 자락에서 며칠 지내기도 했고, 한나절 바람 쐬러 교외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궁여지책으로 돌아다닐수록 갈증은 더 커졌다. 내게 필요한 것은 단순한 쉼이 아니었다. 다른 내가 될 수 있는, 정체성의 올가미에서 벗어나 뭐든지 할 수 있는, 더욱더 내가 되는 시간이었다. 물론 어디에 있는지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아를 내려놓고 호흡을 늦추고 주변과 천천히 호흡하고 교감하는 것임을 잘 안다. 짤막짤막한 여행 내지 나들이 때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다. (최소한 보내려고 했다.) 어쩌면 여행은 자유로운 나를 확인하기보다는, 현실에서 나다울 수 있는 용기와 근성의 부족을 만회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 같다. 주변의 시선을 예민하게 감지하면서 꾹꾹 억눌렀던 마음을 한 방에 긴 호흡으로 터트려버릴 수 있는 안전지대가 필요했고, 자유는 그 과정에서 쟁취한 부산물일 수도 있다.
아무도 없는, 깊은 숲에서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는 상상을 한다. 누가 들을까 걱정할 필요 없이 내지르는 야성의 소리. 층간 소음 걱정 없이, 벽이나 가구에 치일 걱정 없이, 유리창이나 CCTV로 누가 엿보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없이 리드미컬한 음악에 맞춰 무아지경 춤추고도 싶다. 이런 꿈을 가끔 꾼다. 깊은 물 한가운데서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꿈, 앞으로도 구르고 뒤로도 구르고, 360도 어디로든 몸을 굴린다. 날아가는 꿈은 단골 소재다. 나의 두 팔은 날개처럼 작동되는데, 누가 말하지 않았는데도 안다. 팔을 열심히 위아래로 휘저으면 몸이 조금씩 떠오른다. 어떤 때는 공기 흐름을 타고 쉽사리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높이까지 올라가는데, 아무리 팔을 내둘러도 중력을 거스르기 어려울 때도 있다. 그땐 대부분 누군가의 추격을 피하는 중이다.
코로나 여파가 길어질수록 꿈과 상상의 빈도는 잦아졌다. 더욱 놀라운 것은, 코로나가 잠잠해지고 여행길이 열리고 일을 그만두고 시간이 많아졌는데도 떠나고 싶지 않았다. 여행 프로그램이나 책자, 블로그를 아무리 뒤져도 가고 싶은 곳이 없었다. 어딜 가나 다 거기서 거기라는 생각에 아무 데도 가고 싶지 않았다. 코로나 전에는 가고 싶은 곳은 넘쳐도 시간과 여건이 안 되는 게 한이었는데, 이제는 아무리 멋진 곳도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4년간 참고 참은 끝에 가는 여행인 만큼 아쉬움을 충분히 보상해 줄 만한 곳을 고르겠다는 욕심이 오히려 사기를 꺾어놓은 면도 있었다. 인생에서 꼭 한 번 가보겠다고 다짐했던 칠레의 아타카마 사막도, 이탈리아의 시칠리아섬도 모두 다 시시했다.
그러던 중 엄마의 칠순을 앞두고 부모님 '효도여행' 보내드리자고 동생들과 의견이 모아졌다. 두 분 모두 중국과 동남아시아 위주로 다니셨으니 이번에는 새로운 문화권으로 가면 좋겠다고 했고, 어른들에게 가장 인기 좋다고 알려진 서유럽 3개국(이탈리아, 스위스, 프랑스) 패키지로 결정했다. 마침 일을 쉬면서 여행을 고민하던 내게 부모님을 모시고 함께 다녀오는 건 어떠냐고 동생들이 제안했다. 부모님과 유럽 여행을?!!! 이건 내 여행 원칙(혼자서, 자유여행, 계획 없이, 이국적인, 외국으로, 가자!)에서 완벽히 (정확히는 '외국'만 빼고) 벗어나는 것이다. 부모님과 패키지로 빡빡한 일정에 맞춰 몇 차례 여행으로 이젠 식상해진 서유럽 문화권으로 가는 것... 그런데 원칙에서 (거의) 완벽히 벗어나는 이 여행이 은근히 댕겼다. 어떤 여행지도 미지근했는데, 부모님과 함께 하는 서유럽 패키지여행은 마음에 착 달라붙는 뭔가가 있었다. 그래서 동생들에게 부모님을 모시고 다녀오겠다고 했다. 함께 여행을 마친 뒤 나는 조금 더 남아 유럽을 여행할 작정이었다.
우리가 예약한 상품은 로마에서 시작해서 피렌체와 베네치아를 거쳐 인터라켄으로 이동한 뒤 파리에서 마무리하는 코스였다. 7박 9일 동안 로마부터 파리까지 헉헉대면서 올라갈 것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고, 여행지를 빼고 다양한 문화 체험을 하는 코스를 알아봤지만 부모님(특히 아빠)께선 이왕 가는 김에 유명한 곳을 빡세게 많이 보고 오는 게 좋다고 하셨다. 이 나이 먹었는데 지금 안 가면 또 언제 가보겠느냐는 말씀에 자식들의 마음은 복잡해졌지만, 상품 선택이 명확해져서 후련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부모님을 보낸 뒤에는 다시 나의 여행 원칙으로 돌아와 약 5주간(이것은 결국 세 달이 되고 만다) 나 홀로, 최소한의 계획으로 여행을 이어갈 참이었다. 꼭 가고 싶은 곳들을 찾아보았다. 슬로시티가 시작된 곳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언덕 위에 있는 중세풍의 도시 오르비에토와 최근 세계의 유혈사태를 다룬 프로그램에서 인상 깊게 본 보스니아의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친환경도시로 유명한 독일의 튀빙겐을 필수 목적지로 정하고, 나머지는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이동하기로 했다. 한국행 비행기는 독일의 뮌헨공항에서 탈 예정이었다. 파리, 오르비에토, 사라예보와 모스타르, 튀빙겐 그리고 뮌헨... 그 사이사이에 어떤 경로가 그려질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되도록이면 여행 경험이 있는 서유럽보다는 동유럽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3월 중순에 부모님과 함께 로마행 비행기에 오른 나는 6월 중순이 되어서야 프랑크푸르트에서 한국행 비행기를 탔다. 오르비에토와 사라예보, 모스타르는 들렀지만, 튀빙겐은 여행 막바지에 취소했다. 여행 두 달쯤 되었을 때에는 유럽 여행을 접고 인도나 네팔로 이동할지 고민하기도 했으며, 항공권을 교환하는 과정에서 실수로 세금을 뺀 전액을 환불받지 못하는 사태도 맞는다. (이걸 만회하겠다고 핀란드에 있는 항공사 고객센터에 수차례 문의했다가 통화료 폭탄을 맞은 것은 덤이었다.) 발칸 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계속 내려가던 중 그리스의 한 도시에서 이제 유턴할 때가 되었다는 신호를 받았다. 조르바를 연상시키는 한 그리스인과의 뜨거웠던 대화는 이제 집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남은 여행은 그 무엇이어도 좋다는 해방감을 주었다.
여행을 할 때마다 나는 수시로 기록해 왔다. 10년을 훌쩍 넘긴 리추얼이지만, 기록물들은 오롯이 홀로 간직하다가 오랜 기간 분량이 쌓이면서 들춰볼 엄두도 안 나는 노트들로 남아있다. 여행기를 처음으로 온라인에 옮겨보기로 했다. 필터링을 거쳐야 할 만큼 적나라한 내용도 있고, 어디서든 볼 수 있는 평범한 내용도 있다. 하지만 어떤 에피소드인지보다는 3개월의 여정이 나에게 던져준 메시지를 나누고 싶었다. 여행에서 돌아온 직후에는 마음에 진득하게 남아있는 무언가가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쓰기를 주저했다. 여행에서 돌아오고 몇 달 뒤 나는 지역의 한 도시로 이사했고, 여기서 여행 기간만큼의 시간을 더 보냈다. 귀국 일정이 정해진 뒤부터 내 카톡 상태 메시지는 '03.13.-06.14.✈️’였고, 여행에서 돌아와 이사하고 몇 개월을 보낸 이듬해 새해를 맞은 뒤에도 변함이 없었다. 2월의 어느 날 한 지인으로부터 또 여행 가느냐는 질문을 받고 나서야, 이제 곧 3월이라는 사실을, 여행을 떠난 지 꼭 1년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여행기를 돌아보며 그 시간을 추억하고, 3개월의 여정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볼 최고의 시점인 것이다.
여행에서 돌아온 뒤 한 번도 여행 중 일기와 사진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알 수 없는 두려움이 기억을 소환하는 것을 주저하게 했다. 이제는 설레는 마음으로, 나의 두툼한 한 권짜리 여행 노트의 일부를 이곳에 옮겨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아른거렸던 두려움의 정체도 알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말 그대로 설렘반, 두려움반이다. 모든 여정이 그렇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