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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Feb 28. 2024

파리의 호텔 방에 홀로 남았다

파리의 호텔 방에 홀로 남았다. 로마에서 파리까지의 여정 내내, 말 그대로 눈 뜨면서부터 잠들 때까지 부모님과 복작거리며 지내다 한순간에 조용한 공간에 혼자 있는 게 비현실적으로까지 느껴졌다. 부모님이 떠난 세상은 이런 느낌일까, 문득 서글퍼졌다. 원하든 원치 않든 언제나 심리적 반경 안에 계셨던 분들이 없는 세상을,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공허의 지극히 일부를 침대에 앉아 맛보고 있었다.


패키지여행의 마지막 숙소는 파리의 세느강변에 자리한 4성급 호텔이었다. 파리의 야경을 한껏 감상할 수 있는 곳이었지만, 우리는 토라진 채 억지잠을 청하는 것으로 여행의 대미를 장식했다. 지난 일주일은 자기 수행의 연속이었다. 나는 내가 아니다, 나는 놀러 온 것이 아니다, 내 임무는 여행 내내 부모님의 개인 가이드이자 통역사이자 사진사이자, 분쟁 소지가 있는 것들을 사전에 차단하여 갈등을 예방하는 평화유지군(?)이다. 일정이 계속될수록 나의 주된 역할은 '평화유지군'이었음이 드러났다. 패키지여행 특성상 일행 중에는 부모님 또래의 어르신 커플이 더 있었는데, 낯선 환경과 숨 가쁜 일정으로 쌓인 피로, 세심한 소통 기술의 부족 등으로 크고 작은 다툼이 일었다. 대개는 한쪽이 감정을 내지르면 다른 한쪽은 소란을 키우지 않으려 끙끙대며 참아내는 식이었다. 부모님 두 분만 오셨다면 분명 참는 쪽은 엄마가 됐을 터였다.


자기만족에 취했던 걸까. 여행 막바지에 나는 본분을 망각하고 스스로 분쟁에 참전함으로써 일을 키우고 말았다. 언제나 그렇듯 분쟁의 씨앗은 발아할 준비를 마친 뒤 작은 균열을 공략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여행 기간 고수해 온 평화 방침은 갈등을 신속히 봉합해서 최소한 여행 기간만큼은 얼굴 붉힐 일을 만들지 말자는 것이었다. 하나둘 쌓여온 짜증과 서운함이 한꺼번에 터져 나오면서 미봉책의 한계가 드러났다.


단초가 된 것은 부모님의 한국행 항공편 온라인 체크인이었다. 세 자리씩 배치된 좌석을 두고 평소 허리가 불편했던 엄마는 통로석을, 창밖 구경하기를 좋아하는 아빠는 창가석을 희망했다. 유럽행 비행기에서는 여행 내내 아빠에게 창가석을 보장해 드리기도 했고 장시간 허리 통증을 견뎌야 하는 엄마가 걱정되기도 하여 통로석으로 좌석을 예매했다. 그때부터 아빠는 일정 내내 청개구리가 됐다. 처음에는 별 것 아닌 척했지만 버스로 이동하는 내내 마음속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었던 것 같다. 아빠의 자잘한 반항이 이어졌지만, 한껏 감정이 올라온 나는 본 척 만 척했다. 세 식구 모두 남 앞에서는 예의를 차리는 성격이라 일행들과 함께 하는 일정 중에는 화를 꾹꾹 눌러 참았지만, 숙소에 들어오자마자 벌어진 일련의 일들은 한 편의 시트콤 같았다. 아아, 그 기억만큼은 이곳에 복기할 수 없다.


사람마다 건강한 관계를 맺기 위해 유지해야 할 적절한 거리가 있다지만, 가족, 특히 부모님과의 거리 설정은 매번 실패와 재조정의 연속이었다. 아무리 조리개를 돌려도 초점이 맞지 않는 상처럼 우리 사이의 거리를 가늠하기조차 어려운 채로 어정쩡하게 서있지만, 이 또한 실패할 것임을, 이미 실패하고 있음을 안다. 결국 실패하고 말 거라면 이왕이면 열심히 사랑하다가 실패하면 좋으련만, 부모님을 사랑하는 일이 나를 지워낼 것만 같은 불안감에 마음을 고쳐먹곤 했다. 나의 첫 문화는 그들로부터 온 것이지만, 강산이 몇 차례 바뀔 법한 시간이 흐른 현재, 그들의 문화는 될 수 있으면 멀찌감치 떨어져 있고 싶은 것이 되어버렸다. 그걸 부끄럼 없이 자랑스러워한 적도 있다. 저 혼자 잘난 것처럼 으스대기도 했다. 많이 배우고 소위 의식 있는 부모를 둔 이들을 볼 때면, 당신에겐 날 때부터 거저 주어진 문화이지만 나는 어렵게 애써서 쟁취한 거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렇게 해야 내가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유로워질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이가 들고 자녀를 양육하는 친구들이 살아내는 삶을 목격하면서 이제는 부모의 입장에서 자식을 보게 된다. 누군가를 온전히 사랑해서 자기를 지우는 것에 대해서라면 하소연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엄마와 아빠였다. 이탈리아에서 사흘을 지내면서 아빠는 바테이블에 서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멋들어지게 마시는 법을 배웠다. 처음에는 싫다고 그냥 가자고 고집부리던 분이, 카페나 휴게소에 들를 때마다 자연스럽게 커피 주문을 나에게 주문하고는, 바테이블 위에 팔 한쪽을 얹고 에스프레소를 두 세 모금에 나눠 마셨다. 자식들의 강권으로 결혼 후로는 거의 처음으로 청바지를 입고서는 한껏 청춘을 만끽한다. 아빠는 젊을 때나 지금이나 청바지가 참 잘 어울린다.


그리고 엄마... 처음 보는 음식도 야무지게 잘 먹고, 북적이는 곳에서 딸이 오케이 사인을 보낼 때까지 포즈도 잘 취하고, 공항 구석의 의자를 간이침대처럼 활용할 줄 알고, 천생 여행자의 기질이 다분하다. 여행 출발을 앞두고 엄마가 가방에 챙기려고 꺼내놓은 짐들을 보고는 나도 모르게 불쑥 짜증을 냈다. 여행지에서 입으려고 꺼내놓은 옷들마다 여행복장에 걸맞지 않게 세월의 흔적이 잔뜩 배어 있었다. 살면서 가장 먼 곳으로 떠나는 특별한 여행을 위해 꺼낸 특별한 옷들이 너무나도 평범해서 가슴이 덜컹 내려앉았고, 당혹스러움은 짜증으로 이어졌다.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과 스위스의 알프스 전경, 파리의 에펠탑 앞에 선 엄마의 밝은 표정과 함께 오래된 머플러와 목폴라티, 청바지가 눈에 들어올 때면 마음이 쓰라렸다. 그 마음을 짜증으로밖에 표현하지 못하는 어리디 어린 내가 몹시도 미웠다.


여행 내내 우리 사이를 중재한 건 나 혼자가 아니었다. 엄마도, 아빠도 티를 내지 않았을 뿐 계속해서 애쓰고 있었다. 그럼에도 끝까지 생색을 낸 건 오로지 나였다. 나 혼자 피해자가 되기를 자처했다. 우리의 관계에서 언제나 그래왔듯이. 마지막날 아침, 조식을 먹고 부모님은 바로 공항으로 출발하기로 되어 있었다. 우리 셋은 각자 고된 밤을 지나오면서 마지막은 잘 마무리해야 한다고 속으로 다짐했고, 아침이 밝아오자 그에 걸맞게 서로의 기분을 풀어줬다. 몇 주간 여행을 더 이어갈 나에게 필요한 물건과 필요 없는 물건을 주고받고, 기내에서 필요한 짐과 부칠 짐을 구분하면서 서로를 챙겼다. 카페테리아에서 서로가 발견한 희귀 메뉴를 공유해서 위치를 알려주거나 직접 가져다주었다. 버스 앞에서 꼭 끌어안고 조심히 잘 가라고, 잘 지내다 오라고 인사를 나눴고, 버스가 출발하고도 한동안 손을 흔들었다.


부모님을 보낸 뒤 나는 잠시 숙소 근처를 산책했고, 화단에 핀 생소한 꽃들을 한동안 들여다보다가 사진을 찍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 침대 위에 앉았을 땐, 적막함이 소란스레 밀려왔다. 일기장을 꺼내 여행 후 처음으로 감정을 풀어내면서 엉엉 소리 내어 울었다. 


누군가가 자진해서 자기 삶에 단단히 붙박고 지켜서 있었기에 다른 존재는 더욱 멀리 갈 수 있는 호사를 누려왔다. 붙박이지 않았다면 마음껏 에스프레소를 즐기고 화려한 머플러로 한껏 멋을 냈을 존재들의 가능성을 자식이란 이름으로 당당하게 갉아먹었다는 생각에 처참해졌다. 나는 한 지점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결국은 멀어지려 발버둥 쳤던 곳을 구심점으로 돌고 있었다. 갈수록 약해지는 구심력마저 힘을 다했을 때 나는 궤도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날아갈 수 있을까. 그것은 해방에 가까울까, 혼란에 가까울까.


파리의 호텔방에 홀로 남아 내가 느낀 건, 후자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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