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로 소통할 수 있는 능력이 기능적 우월감을 준다면 프랑스어를 할 줄 아는 건 문화적 우월감을 부여한다고 해야 할까. (파리 편을 복기하는 지금 우연히도 카페 뒷자리에서 세 여성이 프랑스어로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다.) 프랑스에는, 파리에는, 이들이 쓰는 언어의 음가에는 자유가 흐르는 것 같다. 혁명에 심취했던 시절, 감히 '혁명'이라 부르진 못했지만 내면에서 꾸준히 꿈틀거리는 에너지를 감지하곤 했다. 온순한 외모와 달리 헤비메탈을 즐겨 들었던 고등학생 때에는 전자악기와 인간의 음성이 보이지 않는 벽을 깨부수는 듯 터트리는 소리를 들으면서 속에 쌓인 응어리를 풀곤 했다. 20대에 들어서는 대부분 그렇듯 체 게바라 이야기에 몰입했지만, 개인적으로 더 큰 영향을 미친 것은 다름 아닌 <레 미제라블>이었다. 영화 곳곳에 등장하는, 들을 때마다 가슴이 뜨거워지는 혁명의 노래들과 실패한 혁명대 학생들의 쓸쓸한 죽음, 붉은 깃발을 몸에 감고 끝까지 투쟁한 건물의 창밖으로 스러지던 앙졸라. 영화의 힘에 이끌려 한동안 OST의 Do You Hear The People Sing? 과 One Day More를 무한 반복해 듣고, 뮤지컬을 보러 런던으로 갔고, 배경이 된 파리 거리를 맴돌았으며, 6권짜리 빅토르 위고의 원작을 밑줄을 쫙쫙 그어가며 읽었다. 혁명은 자신을 가두는 외벽 하나를 부수는 일. 혁명을 통해 개인이 자유로워지냐면 그건 다른 문제일 테지만.
'혁명의 조건'이란 의미심장한 물음을 품고 떠났던 멕시코, 사파티스타 원주민 자치독립운동과 마르코스의 카리스마에 이끌려 그들의 공동체 마을이 위치한 산 크리스토발 데 라스 카사스를 여행한 적이 있다. 혁명의 뒷맛은 대체로 씁쓸했기에 큰 기대를 품지 않았고, 덕분에 실망도 크지 않았다. 이토록 기대하지 않았으면서 왜 굳이 멀리까지 갔느냐고 묻는다면, 그래도 목격하고 싶었다고, 수백 년간 켜켜이 쌓인 억압을 감각하고 분연히 일어나 자기 목소리를 되찾겠다고 거리로 나섰던 사람들, 혁명대라고 하기엔 너무나도 평범하고 공통의 복장이나 표식도 없이 가지각색이어서 당혹감을 선사했던 사람들을, 그들이 일군 터전을 직접 보고 싶었다고 답하고 싶다. 널빤지와 벽돌로 만든 허름한 건물과, 마을이라고 하기엔 인적조차 드문 고요함. 마르코스의 선명한 메시지와 스키마스크가 주는 강렬한 인상, '사파티스타'의 이름으로 전 세계적인 지지를 받으며 멕시코시티까지 이어졌던 평화행진, 이들이 되찾으려 했던, 꿈꾸었던 세상은 너무나도 정의롭고 명징했는데 무엇이 작금의 풍경을 초래한 걸까. 출입 전 철통 보안 검색을 통과해야 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내부는 오래전 쇠락한 전원 마을과도 같았고, 그 안에 머무는 이들도 많지 않아 조금 허망해졌다.
그럼에도 가장 오래 시선을 사로잡았던 건 남미 특유의 원색으로 그려진 선전 그림과 문구들이었다. '선전'을 떠올리면 구소련이나 북한 등 공산체제 국가에서 만든, 당시에는 위엄을 상징했을지 몰라도 이제는 웃음거리로 전락한 포스터를 떠올리게 되지만, 사파티스타는 달랐다. 그림은 아름답고, 구호는 정의로웠다. 그래서 여전히 울림을 준다. 마르코스가 선동가에 불과하다는 (심각하게 평가절하된) 비난도 있지만, 그의 언어에, 연설에 드러난 강렬한 메시지는 가슴 깊숙한 곳에서 꿈틀대는 '저항'을 낚아 올린다. 움찔하게 한다. 혁명, 시대 변화와 함께 서서히 사장되어 버린 말이지만, 그래서 살면서 한 시절은 이 말에 가슴이 두근거릴 법하지 않나. 점점 '혁명'은 왜소해지고, 무모함은 일찌감치 알아서 피해야 할 일이 되어버린 일상의 풍경들. 사회 전체가 온순하게 길들여진 기분, 길들여진 줄도 모른 채... 충분히 성장하지 못한 채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기 생명력을 스스로 죽이는 일, 새싹으로만 평생을 지내도록 묶어두는 일. 한두 명이 아니라 사회 전체가 억눌린 채 생장 에너지를 발산하지 못했을 때, 우리의 10년 후, 20년 후는 어떤 풍경을 하고 있을까. 새싹인 채로 힘을 쓰지 못한 채 누렇게 말라 버렸을까, 아니면 다 함께 에너지를 터뜨려 스스로를 가두고 있던 비닐망을 뚫어버렸을까.
파리에 홀로 남아 잠시 쓸쓸했고, 몸에 익지 않은 7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다음 숙소인 마레 지구의 호스텔까지 어떻게 가야 할지 잠시 막막했지만, 어느 순간 파리의 곳곳에서 기지개를 켜며 웅크린 몸을 이완하고 있었다. 노천카페에 앉아 에스프레소와 크루아상을 음미하면서 온몸으로 쏟아지는 햇볕을 마음껏 쪼였고, 세느강변에 앉아 한참 글을 쓰다가 그대로 누워서 쏟아지는 햇살과 센 강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을 만끽했으며, 파리 공공자전거인 벨리브를 타고 구석구석을 누볐다. 옆구리에 와인 한 병을 끼고 소소한 먹거리를 종이봉투에 담아 가슴에 안고 돌아간 숙소, 마침 만난 아르헨티나에서 온 룸메이트 알레한드로, 이탈리아에서 온 옆방 친구 아드리안느와 오늘의 한 끼를 나누면서 꽃 피운 이야기들...(이곳에서 아드리안느는 나를 이탈리아의 자기 집으로 초대했고, 2주 후 나는 그녀의 집에서 한 주 가량 머무르게 된다.)
머무는 내내 파리는, 프랑스는 투쟁 중이었다. 연금수령 연령을 2년 연장하는 법안을 밀어붙인 마크롱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로 파리는 밤낮없이 소란스러웠다. 밤새도록 이어지던 경찰차 사이렌 소리, 쓰레기들로 낮은 담장을 두른 듯한 거리, 전날밤 시위대가 놓은 불로 새까맣게 녹아내린 쓰레기통들...
하루는 숙소를 나서자마자 경찰차 몇 대가 요란하게 사이렌을 울리며 질주해서는 바스티유 광장으로 이어지는 거리를 막아섰고, 곧이어 흥겨운 음악과 함께 시위대가 쏟아져 나왔다. Sweet Dreams를 브라스밴드 행진곡으로 변주한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고, 판지 피켓을 들고 구호를 외치는 시민들을 한동안 바라봤다. 다양한 군상들--스카프로 한껏 멋을 낸 노년의 여성부터 10대로 보이는 학생들까지--이 바스티유로 저마다의 흥을 갖고 행진했고, 어느 순간 나도 그 조류에 가담하여 광장을 상징하는 에메랄드빛의 7월 혁명비(The July Column)까지 걸어갔다. 광장에 가까워질수록 기념비 꼭대기에 위치한 금박을 입은 '자유의 수호신'이 점차 커다란 형상으로 다가오는 장면은 걸음에 더욱 특별한 의미를 부여했다.
광장은 이미 광장과 연결된 사방의 거리에서 행진해 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기둥 형태의 기념비를 받치고 있는 몇 개 층으로 된 기단 위에도 깃발과 피켓을 든 시민들이 꽤 있었고, 조금 더 혈기 왕성한 이들은 높은 단까지 올라가 앉아서 광장의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시위대에 섞여 조류를 따라 조금 더 걸음을 이어갔다. 북한 최고지도자의 사진이 박힌 피켓을 들고 가는 사람을 가리키며 한 중년의 남성은 들뜬 웃음과 함께 말을 걸었고, 나는 그저 으쓱하고 말았다. 거리 위를 행진하면서, 근처 상점에 멈춰 서서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이 가득했지만, 파리의 담배 냄새는 불쾌함이 아니라 자유의 냄새처럼 느껴지는 건 왜인지...
더욱 깊숙이 들어가고 싶어 앞의 무리들을 따라 걷다 보니 반대 방향에서 걸어오는 시위대와의 접점에서 옴짝달싹할 수 없이 갇히고 말았다. 실은 일부러 시위대 안에 나를 가두고 그들을 목격하고 싶었다. 자유와 혁명의 상징과도 같은 프랑스인들은 어떻게 시위를 하는지, 자기 목소리를 내는지. 심각하기보다는 흥에 겨운, 흥에 취한 모습들을 보면서 이들의 목적은 저항이나 변화가 아니라 그저 거리 위 군중 속에서 자유의 냄새를 맡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했다. 사실 시위대의 목적은 연금을 원래대로 수령케 하는 것이었고, 이것이 옳은 선택일지는 미래만이 말해주겠지. 골목마다 막아 선 경찰들 때문에 긴 거리를 돌아서 빠져나왔다. 광장에서 벗어난 거리는 여느 날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숙소로 돌아가 다음 행선지로 가는 열차표를 조회한 순간, 대규모 파업으로 거의 모든 시간대가 매진 행렬인 것을 보고 시위는 곳곳에서 진행 중임을 다시금 인지했다.
피렌체행 열차표를 어렵사리 예매하고 파리 북역 앞의 카페에 앉아 파리의 시위대를 떠올렸다. 파리는, 프랑스는 다르다며, 내 안에 새겨진 '저항'의 이미지와 나란히 비교해 보았다. 나에게 저항은 의미심장한 구호와 결연한 행동, 책임과 연대에 가깝다면, 파리의 시위대에게 저항은 하나의 축제인 듯했다. 시민의 투쟁으로 체제를 바꿔본 역사가 있어서일까, 혁명을 이루어본 사람들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저항 의지를 자기 안의 흥과 결합해 경쾌한 축제로 승화시킬 수 있는 걸까.
이탈리아로 떠나는 열차 안에서 우연히 옆 좌석에 탄 파리지앵 P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는데, 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I can't feel French!" 그가 말한 'French'는 무얼 의미한 걸까. 그는 '연금 개혁'이 필요하지만 프랑스인들이 자기만 생각한다고, 한계 상황에 봉착한 것을 알면서도 당장의 자기 안위만 생각하며 과격 시위를 한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무역업에 종사하며 굵직굵직한 해외사들과 거래하고 해외 출장도 자주 다니며, 토리노로 스키를 타러 다니는 50대 중반쯤 된 남성이었다. 프랑스에 대해 무얼 하나 물어보면 그 자리에서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구체적인 수치를 제시하면서 성실히 답변해 줬다. 왜 프랑스는 열차를 타고 가는 내내 창밖으로 공장 하나 보이지 않는지, 푸른 초원과 방목 중인 소들밖에 보이지 않는 건지 묻자, 그는 프랑스의 산업별 구성 비율을 나타내는 원그래프를 제시하며 중화학공업이 차지하는 비율이 극히 일부임을 보여줬고, 소위 혐오시설을 다른 나라에 외주줌으로써 유지되는 프랑스 특유의 전원 풍경에 대한 약간의 죄책감을 표현했으며, 한국은 어떤지를 비교해서 보여주기까지 했다. P는 매우 친절했다. 우리가 탄 열차 마지막칸에는 나와 P, 두 프랑스 청년, 인도인 가족들이 타고 있었고, 비좁은 곳에서 배낭을 빼기 어려워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P는 먼저 나서서 젠틀한 미소와 함께 도움을 줬다. 모두가 헤어지기 전에 그에게 인사를 건넸다. 고마워요, P. 나는 아주 예외적인 파리지앵을 만난 걸까.
'자유'가 그려낸 세상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이름만큼이나 자의적인 해석이 넘쳐나는 자유의 풍경들. 막연히 파리에 가면 자유로운 내가 살아날 것 같았던 희망, 여행 동안에는 그렇게 느꼈지만 이곳에 오래오래 산다면? 그것은 또 다른 억압과 맞서는 일일 것이었다. I can't feel French! 그들은 자유의 동의어로 자국을 이야기하는 것 같았고, 이는 세계적인 통념에 대체로 부합하는 듯 보이지만, 세계는 점차 '자유의 중심(자유에 중심이 있다니, 그 자체로 모순이다)'을 허물어가고 있다. 자유의 상징이, 구심점이 사라지는 게, 허전함을 막막함을 주지만, 이것이 자유의 본질이겠지. 막연히 파리로 상징됐던 자유의 기념비가 붕괴되자 조금 다른 자유의 풍경이 펼쳐지기 시작했다. 현재의 내가 생각하는 자유는 파리와 산 크리스토발 사이의 어딘가에, 더 정확히는 산 크리스토발에 살짝 가까운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것 같다.
약간은 허망한 해방 속에서 열차는 프랑스 국경을 지나 이탈리아로 진입했다. 자정쯤이면 세 번째 방문이지만, 앞선 두 번은 목례 정도에 그쳤던, 언제나 아쉬움을 남겼던, 두오모의 도시 피렌체에 도착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