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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늘보리 Apr 08. 2024

옷깃만 스쳤던 인연과 긴 대화를 나눈다면

피렌체의 산타마리아노벨라 역에 도착하자 은근한 감격이 밀려왔다. 횟수로만 치면 세 번째 방문. 사회초년생 시절 첫 배낭여행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하루 남짓 머물렀고, 이번 여행 초반에 부모님과 함께 한 패키지여행 일정에 맞춰 서너 시간가량 머물렀다. 두 차례 모두 피렌체의 명성에 비해 아쉬움이 큰 만남이었다. 그나마도 첫 피렌체는 잔뜩 웅크린 채 땀을 뻘뻘 흘리면서 올랐던 두오모와 끈덕지게 추근대는 이탈리아 남자들로 치를 떨었던 기억으로 남아 있다. 두 번째 만남은 생각만으로도 숨이 가빠진다. 선두에 선 가이드를 따라서 서른 명 남짓의 일행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고, 나와 엄마, 아빠는 행렬의 끄트머리에서 빠른 걸음으로--걷는 것으로는 부족하고 살짝 뛰는 정도는 속도로 걸어야 했다--굽이치는 골목을 주파했다. 워낙 짧게 머물렀다 보니 피렌체 여행은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에 집중돼 있었다. 이번만큼은 성당의 굴레에서 벗어나 골목 구석구석을 느끼고 싶었다. 유서 깊은 골목들 안에서 나만의 장소를 찾을 수 있을까. 피렌체의 골목 어딘가에서 발견한 나만의 공간이 있다면, 이 시절의 내가 갈망하는 취향의 지표가 되어 줄 것이다. 


골목 사이로 보이는 두오모, 아름답고 거대한 괴물이 버티고 서있는 듯 압도적인 모습

피렌체에 머무는 내내 이 동네 골목은 다 걸어보겠다는 듯이 돌아다녔다. 도시의 상징인 두오모를 중심으로 한 번화가에서 벗어나 인적이 드문 공간에 숨어있는 보석을 찾고 싶었다. 하지만 결국 모든 길은 두오모로 통했고, 꽃의 성모마리아 성당은 아무리 봐도 질리지 않았다. 성당 바로 앞에서 꼼꼼히 감상할 때도, 오래된 좁은 골목들 사이로 빼꼼히 보일 때도 어김없이 아름다웠다. 피렌체에 머무는 동안 대체로 날씨도 맑아서 분홍과 에메랄드 빛 대리석으로 수놓아진 성당벽과 화려한 조각들이 짙푸른 하늘 아래서 더욱 빛났다. 성당 돔의 웅장함은 좁고 긴 골목 끝에서 등장할 때 더 장엄했다. 어마어마한, 아름다운 괴물--왜 '고질라'가 떠오르는지 모르겠다--이 골목 끝에서 무게를 잡고 버티고 있었고, 홀린 듯이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정체에 감탄을 거듭했다.




매일 같이 길을 잃어보겠다는 마음으로 숙소를 나섰다. 진정한 여행은 길을 잃을 때부터 시작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오랜 여행 습관 중 하나가 여행 중 온라인 접속을 최소화하고 되도록이면 오프라인으로 필요한 일들을 해결하는 것이다. 유심칩은 구입하지 않고, 스마트폰은 카메라용으로만 사용한다. 티켓을 구입할 때나, 가끔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할 때에만 숙소 와이파이에 접속한다. (이런 전통을 체득하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다른 글로 풀어내고 싶다.) 반드시 찾아갈 곳이 있다면 오프라인 지도를 다운로드해서 필요할 때마다 쓰긴 하지만, 정처 없이 걷고 싶을 땐 이마저도 무시한다. 내 폰은 9년 된 아이폰으로, 100% 충전 상태에서 풀타임으로 사용하면 한 시간도 안 되어 배터리가 방전된다. 그러니 폰은 긴급용에 한해서만 쓸 수밖에. 누군가에게는 당장 바꿔야 할 고물일 테지만, 내게는 적당한 편리함을 제공하면서 모험심을 자극하기에 딱 좋은 도구이다.


낯선 곳에서 길 잃을 각오를 하는 데에는 용기와 체력이 두루 필요하다. 안타깝게도 나는 길 잃을 용기도, 마음껏 헤매다가 다시 돌아올 만한 체력도 살짝 아쉬울 정도로 부족하다. 그나마 피렌체여서 다행인 점이 있었으니, 어딜 가든 웬만한 곳에서는 두오모가 보였고, 설사 두오모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해도 주변에 아무나 붙잡고 물으면 두오모 방향을 알 수 있을 터였다. 도시 안에 훌륭한 나침반이 있는 셈이다. 제주도에 한라산이 있듯이, 피렌체에는 두오모가 있다. 두오모에서 멀어지는 쪽으로 방향을 잡고 걷다가 갈래길을 마주하면 좀 더 끌리는 골목으로 걸어갔다. 웬만한 골목에는 나름의 끌림 요소가 있어서 한 골목을 선택하면 어쩔 수 없이 '가지 않은 길'에 아쉬움이 남았다. 다음 산책을 기약하며 아쉬움을 달랬지만 어느 순간 기약한 곳들의 수와 위치가 뇌용량의 한계를 넘어섰고, 결국은 그때그때 걷는 길들을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피렌체 골목에서 우연히 발견한 카페, 이곳에서 진행된 여성들의 목소리가 담긴 사진전

늦은 밤 골목 걷기의 묘미는 조용한 골목에서 자기만의 분위기로 빛나는 공간들을 발견하는 것이다. 낮에는 햇살 아래 고만고만한 모습으로 보였던 곳들이 어둠이 내리면 따뜻한 조명을 밝혀 깊은 내면을 보여준다. 모처럼 쨍쨍한 햇살이 쏟아져 오후 내내 부지런히 돌아다녔던 날,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두운 골목에서 조용히 불 밝힌 아늑한 카페를 발견했다. 오래된 책들로 가득한 책장이 벽을 두르고 있고 군데군데 4인용 테이블과 의자, 소파가 자리 잡고 있어 단조로운 듯 보이면서도, 문틀과 의자, 쿠션, 오래된 라디오 등에 붉은색으로 포인트를 주어 은근한 단호함이 느껴지는 공간이었다. 카페는 크게 입구 쪽의 전시공간, 안쪽 카페, 뒷문을 열고 나서면 펼쳐지는 아담하고 아늑한 정원의 야외석으로 나뉘어 있었다. 식사 시간대라 그런지 손님은 거의 없었고, 야외석에서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이들이 차분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전시 공간에서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연대를 보여주는 사진전이 진행 중이었다. 다양한 연령대의 여성들이 검은색 옷을 입고 옷 밖으로 드러난 팔과 손등, 어깨 등의 피부에 자신의 목소리를 펜으로 적고 각자의 포즈를 취한 사진들이 삼면을 가득 채웠다. 홀로 찍은 사진, 동료들과 함께 찍은 사진, 가지각색의 포즈와 메시지들, 내면을 향한 듯 차분하면서 유연한 포즈와 생기발랄한 미소를 보는 것만으로도 묘한 해방감이 밀려왔다. 무용 동작처럼 우아한 자세를 취한 여성의 등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 있었다. "A volte la crescita avviene lentamente ma poi arrivano i fiori(때때로 성장은 더디지만, 오고 나면 꽃들이 만발해요.)." 가까운 친구들로 보이는 일곱 명의 여성들은 마치 무적 파워레인저 멤버들이 한데 모여 적을 공격하기 직전에 취하는 포즈를 잡고 각자의 팔에 따로 새겨진 "We, Stand, Together"를 내보이며 부러운 연대감을 자랑했다. 


주말에는 유대교 회당이 있는 유대인 지구에 갔다. 피렌체 전경이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미켈란젤로 광장 언덕을 오르면 비슷비슷한 높이의 주황색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두오모가 첫 시선을 잡아끈다. 찬찬히 시선을 오른편으로 움직이다 보면, 멀찌감치 떨어진 구역에서 존재감을 과시하는 에메랄드 빛 돔이 보이는데 바로 유대교 회당이다. 구리로 만들어져 비를 맞고 산화되어 에메랄드빛을 띠게 된 유대교 회당의 돔은 두오모에 비해 좁고 뾰족했다. 여행하면서 성당이나 정교회, 이슬람 사원은 들어가 보았지만, 유대교 회당은 처음이었다. 성경 이야기를 벽화나 조각을 전시한 성당과 달리 회당 내부벽은 다윗의 별 모양을 연상시키는 기하학적인 무늬가 다채로운 색으로 이어지는 패턴으로 장식되어 있었다. 작은 패턴들이 어우러져 커다란 공간을 뒤덮고, 스테인드 글라스와 돔 사이의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과 내부 조명이 어우러져 성당과는 다른 방식으로 경건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Ruth's의 장식장에 빼곡히 담긴 주인장 할아버님의 역사

유대교 회당을 나서자 마침 점심시간 대였다. 회당 인근에 유대교식 식당들이 보였는데, 단연 시선을 잡아 끄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Ruth's Kosher Jewish Restaurant! '코셔(Kosher)'는 이슬람의 할랄처럼 유대교 율법에 맞게 처리된 방식을 일컫는다. 비건까지는 아니지만 채식 옵션이 다양하게 있어서 나에게는 최적의 장소였다. 식당에 들어서자 유대인들이 쓰는 동그란 빵모자 키파(Kippa)를 쓴 인상 좋은 할아버지께서 반갑게 맞이하며 자리를 안내해 주셨다. 공간 곳곳이 아기자기한 소품들로 가득했는데, 특히 내가 앉은 테이블 뒤쪽 벽면에 놓인 장식장에는 마리오네트 목각 인형과 사진, 캐리커처, 편지 들이 빼곡히 놓여 있었다. 사진 속 인물이 낯이 익어서 자세히 보았더니 방금 나를 맞아주시고 공간 내 서빙을 보고 계신 할아버지셨다. 사진에는 

젊은 시절부터 노년에 이르기까지 반려견과 함께 길거리에서 마리오네트 공연을 이어간 역사가 담겨 있었다. 당시에 사용했던 인형들부터 독특한 소품들까지, 자세히 보면 볼수록 엄청난 이야기가 녹아든 소품들이 발견되었다. 


운이 좋아 내가 할아버지 나이만큼 살게 된다면, 그때까지의 인생을 결산해서 작은 장식장에 진열한다면, 선반에는 어떤 것들이 놓일까. 내 장식장은 어떤 모습으로 꾸며질까. 정혜윤 작가의 ⟪앞으로 올 사랑⟫에는 플로랑클로드 라브 루스트라는 이름의 중년 남자가 자기 인생을 결산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인생 결산 후 그에게 남은 것은 바로 "텔레비전, 배달앱, 쓰레기, 병원"이었다. 그 대목을 보면서 내 결산 항목에 넷플릭스 따위가 들어가진 않을지 식겁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더랬다. 할아버지의 장식장을 보면서 오랜 세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지속한 사람들만이 오래 봐도 지겹지 않고, 새로운 이야기가 새록새록 떠오르는 장식장을 갖게 되는 거라 생각했다. 내가 사랑해 온 일들은 무엇일까, 잠깐의 설렘이 아니라 오래오래 곁에 두고, 혹은 끌어안고 사랑해 온 것은 무엇일까. 무엇이 될 것인가.

Ruth's 주인장 할아버님이 직접 사용한 마리오네트 인형

할아버지께서는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인자한 미소로 이야기를 건네셨고, 덕분에 오랜만에 이완된 채로 시금치 라자냐와 콤부차, 비건 초콜릿 케이크까지 기분 좋은 식사를 했다. 오래전 이와 비슷한 식당을 발견한 적이 있다. 그리스 남단의 섬 로도스를 여행할 때, 현지인의 추천을 받아 들른 식당이 있었다. 루스 할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의 할아버지께서 홀로 운영하시는 곳이었는데, 서빙은 물론 요리와 정리, 계산까지 모두 할아버지 홀로 맡아하셨다. 인자한 말과 미소를 품은 채 북적북적 바쁜 상황과는 무관한 듯이 할아버지 특유의 리듬을 고수하셨고, 이곳을 찾은 누구도 음식이 한 시간이 되도록 나오지 않는다고 불평하지 않았다. 오히려 다른 손님이 들어오면 다른 테이블에 있던 손님들이(처음에는 젊은 부부가, 나중에는 그들의 아이들이) 테이블 안내와 세팅을 맡아서 했다. 공간에 있는 이들 모두가 서로서로 돕는 모습을 보면서 웃음을 주고받았고, 중세시대의 골목 안쪽에 자리한 어둑어둑한 식당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가득 찼다. 지루할 틈 없이 기다린 끝에 나온 음식은 환상적으로 맛있었다. 10년이 흐름 지금도 나는 언젠가 이 식당을 찾기 위해, 할아버지의 음식과 리듬이 손님들의 너른 마음과 공명하며 빚어내는 분위기를 만끽하기 위해 로도스를 다시 찾고 싶다. 같은 이유로, 내가 피렌체를 다시 찾는다면, 그것은 두오모도, 우피치 미술관도 아니고, 인생을 마리오네트 공연과 함께 한 인자한 미소에 키파를 쓰신 귀엽고 천진한 할아버지가 계신 Ruth's를 찾기 위해서일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밖으로 나서니 날씨가 화창했다. 마침 주말이어서 골목들이 이어진 작은 광장들마다 플리마켓이 진행 중이었다. 광장의 한편에는 광장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그 앞으로 하얀 천막을 친 가판대가 빼곡히 놓였다. 독특한 재료를 활용한 수공예품부터 을지로 만물상에 온 듯한 느낌을 주는, 작동 여부가 의심되는 워크맨, 휴대폰을 비롯한 전자기기들과 조상 대대로 썼을 법한 식기류, 단추와 문고리까지 별의별 게 다 진열돼 있었다. 광장의 한쪽 면에 세워진 작은 성당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했다. 내 곁에는 허벅지 높이까지 올 만큼 커다란 하얀 털의 개와 그보다 작은 갈색 빛의 개, 이들의 반려인인 두 어르신이 나란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며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내 앞에 설치된 가판대에서는 다양한 크기와 모양의 놋그릇을 팔고 있었는데, 하나 같이 세월의 흔적이 잔뜩 묻어 있었다. 이런 걸 사가는 사람이 있을까. 판매보다는 날씨 좋은 주말에 야외에서 여러 사람들과 말 섞는 데 의의를 두는 건 아닐까. 그런데 한 중년의 부부가 오더니 아내가 양쪽에 손잡이가 달린 구릿빛의 곰솥 같은 것을 들고 이리저리 점검했다. 그리고는 이걸로 하겠다며 주인에게 내민다! 그러자 뒤로 빠져 있던 남편이 상인에게 다가와 값을 치렀고, 솥을 담을 알맞은 봉지를 찾기 위해 한참을 세 사람이 우왕좌왕하더니 마침내 발견한 큰 가방에 솥을 넣어 주고받은 뒤 헤어진다. 모두가 만족스러워하는 유쾌한 거래였다. 좋은 소재로 잘 만들어진 물건이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도 좋은 주인을 만나 쓸모를 찾는 게 아름다웠다. 


미켈란젤로 언덕을 내려오면서 바라본 풍경

그렇다, 나는 계속해서 '아름다움'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은 죄다 모아놓은 것 같은 피렌체에서, 내가 발견한 아름다움은 이런 것들이었다. 오래오래 사랑한 것들, 그 사랑의 역사가 새겨진 사람이, 물건들이 주변에 또 다른 사랑의 파문을 일으키는 장면들. 거창하고 완벽하게 지어진 성당과 조각들도 아름다웠지만, 나는 Ruth's의 식당에서, 여성들의 연대의 목소리로 띠를 두른 소박한 카페에서, 플리마켓에서 이뤄지는 담백한 거래에서 둥지 안에 있는 것만 같았다. 압도되는 경이로움이 아니라, 평생을 곁에 둬도 충만할 것만 같은 풍경과 분위기에 마음이 끌렸다. 누군가에게는 평범할 수 있지만, 내 시선에서는 먼 거리를 날아서 다시 오고 싶게 하는 공간들, 사람들, 마음들. 세 번째 시도 끝에 피렌체에서 발견한 나만의 장소는 이렇게 골목 사이사이에 숨겨진, '이토록 평범한 순간'들이었다. 



오랜 숙원 사업을 끝낸 듯 후련한 마음을 안고 피렌체를 떠났다. 다음 행선지는 이토록 평범한 순간들에 나를 흠뻑 담글 것으로 기대되는 곳, 슬로시티(Slow City) 운동의 본거지이자 언덕 위에 보존된 아름다운 중세 도시, 오르비에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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