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지프 헨릭의 ⟪위어드(WEIRD)⟫를 읽고
조지프 헨릭의 ⟪위어드(WEIRD)⟫는 인류가 추구해야 할 기본값처럼 여겨지는 개인주의와 독립성, 분석적 사고가 실제로는 인류 역사적으로 매우 희귀한 문화임을 짚으며, 이를 전파한 집단을 WEIRD, 즉 서구의(Western), 교육 수준이 높은(Educated), 산업화된(Industrialized), 부유한(Rich), 민주적인(Democratic) 족속이라고 규정했다. 저자는 이들이 특히 자기만의 독특한 자아에 집중하며 “자신을 공간과 시간을 가로질러 펼쳐진 사회적 네트워크에 속한 하나의 구성원이 아니라 독특한 존재라고 여기”는 점에 주목한다. 세상이 뭐라 하든 고유한 자기 자신을 찾아야 한다며 자아 찾기에 열을 올리는 반대편에서는 ‘자아 비대증’과 ‘나르시시스트'에 대한 경계의 목소리도 동시에 터져 나오는 상황에서, 언제나 관심은 ‘진정한 자아'에 쏠린다. WEIRD의 자기애는 서구의 영향을 오랜 기간 받아온 사회에서도 두드러지는데, 한국 사회도 예외는 아니다. SNS에서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취향을 갖고 있는지를 드러내려는 자기표현의 욕구가 어느 때보다 팽배하고, 마음 돌봄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면서 에세이나 일기를 읽고 쓰는 데 관심을 기울이는 인구도 많아졌다.
저자는 ‘문화와 유전의 공진화’ 과정을 강조하면서, 인간이 만들어낸 제도가 인간의 심리를 변화시키고, 이것이 다시 인간의 유전자에 새겨져 인류의 진화 양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 주목한다. 일례로, 일부일처제를 따르는 집단의 남성은 일부다처제 집단과 달리 결혼과 양육 활동을 함에 따라 테스토스테론의 수치가 감소하며, 이는 사회 전반적으로 공격성과 경쟁 심리를 낮추는 효과를 불러일으켜 인류를 새로운 문화 안으로 끌어들인다. 인류 문명의 압도적인 비율이 집약적인 친족 관계 중심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이룩되어 온 반면, WEIRD 집단은 비슷한 경로를 밟아오다가 중세 시기에 접어들 무렵 친족 중심의 관계를 해체하고 핵가족 중심의 개인들로 구성된 대도시를 이룩하면서 독자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이 같은 변화에 방아쇠를 당긴 것을 저자는 기독교가 다른 종교들과 경쟁하는 과정에서 채택한 ‘결혼 가족 강령'이라 말한다. 교회의 ‘결혼 가족 강령'은 일부일처제만을 허용하고, 사촌을 비롯한 친인척 간 혼인을 금지하고, 친족 집단이 아닌 개인의 유언에 따라 상속하는 등 당시 다른 문화권과는 뚜렷하게 구별되는 원칙을 세우고 지옥, 신의 감시와 처벌이라는 ‘초자연적 믿음'을 통해 사람들로 하여금 익숙지 않은 방식을 따르도록 유도했다.
‘결혼 가족 강령’에서 촉발된 친족 관계의 해체는 신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개인의 강화로 이어졌다. 가톨릭과 달리 개신교에서의 개인은 문해력을 바탕으로 스스로 성경을 읽고 이해하면서 신 앞에 선 단독자로 자기에 초점을 맞춘 개인주의가 강화된다. 기존의 친족 공동체의 안전망이 제공하던 혜택을 기대할 수 없게 된 프로테스탄트들은 친분이 없는 익명의 개인들과 안정적으로 협력할 수 있는 제도적 기반(시장 거래 규범, 자치 규약 등)을 만들고, 이를 합심하여 지켜나갈 ‘자발적 결사체'를 구성한다. ‘자발적 결사체'에는 각종 길드, 수도원, 대학은 물론 도시와 소읍도 포함된다. 자발적 결사체는 혈연으로 연결되지 않았지만 혈연공동체에서 제공하던 협력과 안전망을 대체하여 익명의 개인들로 북적이는 도시가 질서를 갖출 수 있도록 했다. 여기에 혈연공동체에서 찾을 수 없던 요소가 추가되었는데, 바로 자발적 결사체들 사이의 경쟁이 촉발해 낸 각종 혁신들이다. 예를 들어, 칼 만드는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개인은 서로 다른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운영하는 길드를 돌아다니면서 여러 기술을 융합하여 자기만의 기술을 개발해 낼 수 있었으며, 여러 길드 사이에 수련공들이 이동하면서 빚어낸 정보와 기술의 활발한 교환과 유통이 도시 전체가 품을 수 있는 정보량을 확 늘렸다. 또한, 다양한 기술을 가진 장인들이 하나의 도시 안에 유례없이 밀집되면서 증기기관처럼 여러 기술을 융합해야만 가능한 발명품들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 같은 도시 문화는 다시금 거주민들로 하여금 비개인적 친사회성(익명의 존재들과 신뢰를 갖고 교류하는 것)을 갖추도록 심리적으로 조율했다.
비단 WEIRD 집단뿐만 아니라 서유럽 중심 문화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받아온 세계 많은 지역들도 점차 이러한 특성을 띠게 되었으며, 대한민국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같은 한국 안에서도 WEIRD 문화가 지역에 따라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수도권과 주요 대도시들에 가까울수록 WEIRD 성향이 두드러지는 반면, 소도시나 농어촌 지역에는 아직도 친족을 비롯한 가까운 인맥 중심의 관계들의 영향력이 세다. 소도시로 이사 오기 전에 이 책을 읽었더라면 내 안에 내재된 WEIRD 성향에 집중했을 테지만, 서울 밖에서 몇 달을 지낸 시점에 이런저런 낯선 문화들을 마주하는 찰나에 이 책을 접해서인지 인류의 대다수를 대변하는 비WEIRD적인 특성들이 어떤 문화에서 유래했고 도시 문화와 떨어져 있는 지역들에서 현재까지 어떻게 남아 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중요한 것은 WEIRD의 특성으로 일컬어지는 개인성, 분석적 사고, 인내심(지연 할인), 시간 절약, 공평한 규칙과 원리 등이 매우 희귀하고 어떤 면에서는 인간의 특성에 위배되기도 하며, 무조건적으로 추구해야 할 선이 아니라는 점이다. 제도와 유전자가 공진화하는 만큼, 한 문화권에서 아무리 좋은 제도도 다른 심리적 바탕을 지닌 지역에서는 독이 될 수 있다. 가족 및 친족 중심의 문화권인 이슬람 국가들에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려던 처방이 더 큰 분란과 전쟁을 초래한 것이 가장 대표적이다.
그럼에도 WEIRD의 핵심적인 특징인 ‘비개인적 친사회성’이 더욱 다양한 존재들 간에 안정적인 협력과 경쟁을 통해 사회 전반의 혁신을 이끌었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다. 물론 개인성이 점차 강화하고 자본주의 체제가 더 빠르고 큰 성장을 강요하면서 추동된 혁신이 생태계를 교란하고 지구 생명체 전체를 위협하는 기후위기로 이어지기도 했다. 도시화 초기에 생존에 더 유리한 ‘자발적 결사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적용되는 규범과 제도들을 도입하고 더욱 많은 상생의 협력을 조력하는 문화가 지배적인 곳들이었지만, 산업혁명 이후로 상황이 달라졌다. 기업은 더 많은 노동자와 자원을 착취하여 더 많은 제품을 효율적으로 생산하여 시장장악력을 높이지 않으면 살아남기 어려워졌다. 한 번 시장을 장악한 기업들은 보유한 자원을 자신들에게만 유리한 방식으로 통제하면서 중소기업과 신생기업들이 시장에 자리 잡을 수 없도록 진입장벽을 세운다. 그나마 정부에서 시장 독점을 견제할 수 있는 의지가 있는 곳이라면 문제가 덜하지만, 그렇지 않은 곳에서는 독점과 착취로 인한 양극화가 심해진다. 과거보다 더 세세한 제도적 장치들이 도입되었지만, 어느 때보다 더 불공정한 시장 및 사회구조가 되어버렸다. 새로운 시스템에 대한 요구가 높아지는 이유다.
WEIRD의 개인 중심의 문화는 과학 기술의 발달과 연결되면서 다양한 혁신을 가능하게 하고 인류에 유례없는 풍요를 가져다주었다. 이 같은 풍요에 힘입어 개인중심주의가 인간 안에 긍정적 유전인자로 새겨졌지만, 기후위기에 봉착한 앞으로의 한 세기 동안에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높아지고 있다. 집단보다 개인의 비중이 극도로 높아지면서 더 이상 가정을 꾸리지 않고 평생을 단독자로 살고자 하는 개인들이 늘고 있으며, 최근 유엔 인구 전망에 따르면 “세계 인구가 2086년 104억 명을 정점으로 점차 하락 국면으로 들어”설 예정이며, “이 흐름을 떠받치는 세 가지 축이 저출생과 고령화, 그리고 도시화”라고 지목된다.(2024.02.01. 일자 한겨레 기사 참고) 사회가 원자 단위의 개인들로 더욱 파편화되는 상황에서 개인은 더 큰 고립감과 정신적 고충을 호소하면서도, 당장은 이를 잠재울 만한 도구들(각종 SNS와 싼값에 콘텐츠를 무한으로 제공하는 유튜브와 OTT서비스 등)의 장으로 들어가 더 큰 고립 안에 자신을 가둔다. 중세에 접어들 무렵, 친족 간의 결혼으로 안전과 협력을 누려왔던 친족 중심 사회는 교회에서 이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결혼 가족 강령’을 발표하고 강요함에 따라 점차 핵가족 안의 개인으로, 더 나아가 도시 안의 개인으로 진화되어 왔다. 21세기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인류 문화 중 하나가 정면으로 도전받고 있는데, 바로 결혼과 출산이다. 연령대가 낮아질수록 출산은 물론 결혼에 대해서도 회의적인 추세이며, 이는 WEIRD형 사고에 많이 노출될수록 강해진다. 동시에 사회 문화도 급속도로 변화한다. 기후위기의 자장 안에서 인류는 인간종을 넘어선 존재들과의 조화와 연대를 고민하기 시작했고, 가족 중심주의는 더욱 해체되는 반면 자연생태계와 더욱 교감하고 조화를 이루는 삶의 방식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까지는 소비자본주의가 지배하는 물질중심적 삶이 압도적인 주를 이루지만, 이것은 교회의 ‘결혼 가족 강령’이 채택될 때도 마찬가지였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소수의 변화가 점차 지지받을 수 있는 것인지이다. 기존 체제에서는 가능할 수 없었던 플러스 요인을 만들어낼 수 있는지, 그리하여 기존 체제보다 경쟁력이 있는 문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 여부가 관건이다. 경쟁력은 기존 시스템의 한계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점에서 갖출 수 있다. 소비자본주의가 자연과 인간을 착취하여 지구를 지속불가능한 폐허로 만들고, 개인의 독자성을 강조하면서 ‘소유효과(자신이 소유한 물건에 대해 심리적 애착을 느껴 과시형 소비처럼 비합리적 행동을 유도함)’를 이끌어내고, 더 많은 물질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사회적 관계들로부터 단절되어 고립되도록 만든다면, 새로운 체제의 핵심은 무엇이 되어야 할까. ‘친족 중심 사회’라는 거대한 사회적 망을 ‘결혼 가족 강령’이 내부부터 찬찬히 해체하여 개인을 집단적 사고에서 해방시켰다면, ‘소비자본주의’를 해체시킬 첨병은 무엇이 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은 인간의 유전자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가.
저자는 이 같은 과정에서 특정한 개인의 의도는 통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우연한 문화적 요소가 나비효과를 일으켜 의도치 않은 체제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예견하고 싶은 욕구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저출생과 고령화, 도시화의 도도한 흐름 속에서 사람들은 더 이상 가족을 이루지 않고, 개인적으로 원하는 것들을 해결하며, 그것이 가능하도록 정부와 시장의 서비스들이 확대될 것이다.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오래된 전제(물론 이 또한 만들어진 것임이 드러났다)에서 벗어나 ‘자족적 동물’로 거듭날 것인가. 아니면 ‘자족적 동물’로의 강요에 몸부림치다가 다른 대안을 찾을 것인가. 어떻게 점치든, 제 아무리 그럴듯해 보여도, 방향은 예측할 수 없는 쪽으로 흘러갈 것이며, 그에 따른 인간의 심리적 변화는 유전자에 또 다른 흔적을 남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