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경국가/복지국가를 넘어, 인본ㆍ질실(質實)국가로

인본국가, 질실국가, 최적국가, 적정국가로

by 남재준

Contents

1. 새로운 국가론

2. 야경국가와 복지국가

3.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전반적인 사회와 경제의 동향

4. 인본국가

5. 질실국가

6. 인본과 질실의 국가를 향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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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새로운 국가론


앞선 두 장에서는 ‘대안적 사고’와 ‘지속가능한 사회’ 그리고 인본(Humane/Humanist)국가의 중요성에 관하여 언급하였다.

이 장은 야경국가와 복지국가라는 대표적인 두 국가 모델을 바탕으로 제3의 국가 패러다임으로서 ‘인본국가와 질실국가’를 좀 더 구체적으로 다루는 ‘국가론(State theory)’이다.


21세기의 중반을 향해 달려가는 상황에서 제3의 국가 모델로서 나는 인본국가(Humane/Humanist state)와 질실국가(質實國家)를 제안한다.

간단히 말해 내가 생각하는 인본국가 ‘시민의 실존적 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존엄성을 증진하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거버넌스로 나아가는 국가’를 말하고, 질실국가 ‘공공서비스와 사회보장제도 등의 질(Quality) 관리에 초점을 두고, 제한된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용하는 국가’를 말한다.


이제부터 이 두 개념에 대해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2. 야경국가와 복지국가


근대국민국가의 수립 이후 국가 모델은 2개로 대별되었다.


야경국가(Night-watchman state)와 복지국가(Welfare state)가 그것들이다.


야경국가는 다른 말로 최소국가(Minimal state)라고도 한다.

말 그대로, 국가는 ‘최소한의 역할’만 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이 최소한의 역할이란 무엇이며, 이러한 국가관은 구체적으로 어떤 전제와 맥락을 지니는가?


우선 최소한의 역할이라 함은 민법과 형법의 집행과 사후적인 사법 그리고 치안 및 국방까지를 말한다.


국가는 본질적으로 ‘질서 유지’를 위한 것이라는 원리에 충실해야 하며 그 이상, 대표적으로 복지국가와 같은 것은 비자유주의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이러한 국가관에 있어 제일 기초적인 원칙은 불가침/비침해 원리(Non-Aggression principle)이다.

이는 말 그대로 채권이나 물권과 같은 민사적 권리의 침해는 금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의 철학자인 로버트 노직(Robert Nozick, 1938-2002)인 유명한 저서인 「무정부, 국가, 그리고 유토피아 Anarchy, State, and Utopia」(1974)에서 최소국가론의 제반 이론을 매우 논리정연하게 서술하고 있다.


이는 로크적 원리(Lockean principle)의 엄격하고 충실한 현대적 구현이라 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회계약론자이며 자유주의의 토대를 마련한 존 로크(John Locke, 1632-1704)는 인간이 자율성을 지니지만 동시에 불완전한 존재라고도 보았다.


자연 상태에서 인간은 일정 기간은 국가와 같은 것이 없어도 자유롭게 자신의 생명, 자유, 재산의 권리를 행사하며 살아간다.


인간은 타인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인위가 가해져 얻은 것에 대한 소유권을 가지며, 다른 이와 계약을 체결해 교환이나 거래 등을 할 수도 있다.


그 외에도 인간은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다.


문제는 언급했듯 인간은 불완전하다.


그래서 절도나 강도를 저지르거나, 계약을 불이행하거나, 타인을 감금하거나 폭행하는 등의 다양한 문제되는 행위들을 할 수 있다.


이는 비침해 원리의 위반이며 이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결국 국가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리고 물권과 채권의 침해나 범죄 등을 다루며 동시에 전체적으로 치안과 국방 등을 맡아 비침해 원리를 지키는 것이 국가 기능의 전부이며 핵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노직은 무정부주의와 자유지상주의가 구별되는 지점을 제시했다.

로크적 자연상태 자체가 무정부 상태이나 그러한 상태는 오래가지 못하고 결국 국가나 그와 유사한 사법과 치안 등의 시스템이 만들어진다.


그렇다면 무정부주의는 실제로는 결국 자유지상주의로 귀결될 수밖에 없다는 의미이다.

개인의 자유로운 계약이나 소유권의 행사 등 사적 자치에 국가는 개입할 수 없다.


치안이나 사법 등의 비용으로서의 조세는 자신의 권리보장을 위해 불가피할 수 있는 비용이라 할 수 있을지라도 복지와 같이 사실상 정당한 노력의 결실을 ‘빼앗아’ 다른 누군가에 준다는 것은 착취 내지 강탈이라 볼 수 있다.


결국 야경국가론은 자유주의 원리의 최협의의 해석이다.


복지국가론은 근대산업사회의 맥락에서 나왔다.


아동노동, 노동 착취, 위생 문제, 주거 문제, 빈부 격차 등 산업혁명으로 인한 사회변동 이후 수많은 문제들이 등장했다.


근대적 계급(Class)이 형성되었고 노동계급이 단결하여 자본가와 그들에게 복무하는 국가를 전복해야 한다는 사회주의 혁명론이 등장했다.


그러나 온건한 사회주의자 즉 사회민주주의자들과 기독교민주주의자들, 사회자유주의자들 등 다양한 이념적 진영에서는 기존의 산업혁명과 자본주의가 가져온 기술 발전과 경제성장 등의 득을 유지하고 활용하여 사회문제를 해결하고자 하였다.


최소국가가 전제된 상황에서 사회가 지속 불가능한 상황으로 몰리고 있었으므로 자유의 조건으로서의 사회 유지를 위한 비용 부담이건 기독교 윤리의 준수건 장기적인 사회주의로의 이행이건 어떤 명분으로라도 누진세를 통한 재분배와 국가 차원의 복지를 시행하고자 하였다.


또한 권리 본위적으로 보더라도, 국가가 단순히 소극적 자유를 보장 즉 개인에게 개입하지 않기만 한다고 진정으로 개인이 자유로워지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이 싹텄다.


사회경제적 강약관계와 빈곤 등의 구조적 메커니즘 등을 감안해 국가는 개인의 최소한의 생활을 보장해야 한다생존권 내지 사회권의 개념이 등장한 것이다.


역사적으로 보면, 근대사회의 개막은 최소국가론자들이 주도했으나 재2차 세계대전 이후로는 복지국가론자들이 주류가 되었고 1980년대부터는 최소국가론자들이 다시 지배적 조류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복지국가를 완전히 폐지하지는 못하고 다만 대대적으로 축소하였다.


3. 1980년대 이후 현재까지의 전반적인 사회와 경제의 동향


좀 더 미시적으로 들어가 보면, 1980년대 이후의 현대 국가는 당초 최소국가론자들이 주장하거나 목표했던 정도로 축소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복지국가론자들이 주장한 정도로 충분히 포괄적인 복지를 제공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1980년대에 지배적 패러다임이 된 최소국가론은 좀 더 온건한 형태로 계속 국가 모델로 남았다.


이는 꼭 이념적인 이유 때문이라기보다 사회변동과 경제변동 때문이기도 했다.


우선 선진국들에서 저출생·고령화가 진행되면서 기본적인 노년부양비가 상승하고 연금제도도 장래에 ‘더 내고 덜 받는’ 상황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를 재정으로 전부 충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이미 지난 수십 년의 복지 지출이 많은 국채 등의 부담을 안겼고, 80년대부터의 감세 기조는 다시 전반적인 증세 기조로 되돌리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다른 한편으로 경제변동으로 인하여 3차, 4차 산업 중심으로 산업구조가 재편되었는데 비정규직 등으로 대표되는 저질의 고용, 고용 없는 성장, 저성장 만성화, 자동화 등으로 인한 고용 소멸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면서 크게 증세를 동원하지 않으면서 세수 확보를 더 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게 되었다.


복지국가의 본산이며 가장 심화된 복지국가를 지니고 있던 유럽은 이미 2008년 금융위기 때의 유동성 공급과 2011-2012년의 PIGS 국가 재정위기 등을 겪으며 더 재정 여력이 악화되었고 결국 불가피하게 긴축을 택하는 국가가 매우 많아졌다.


한편 사회문화의 차원에서 포스트모더니즘(탈근대) 즉 탈물질화와 가치의 개별화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구체적으로 젠더나 섹슈얼리티 등의 이슈들을 둘러싸고 타협되기 어려운 정체성과 이념 등이 충돌하는 양상으로 나타났다.


또한 유럽의 경우 앞서 언급했던 경제적 어려움 속에 1990년대~2000년대의 중동-아프리카 문제 개입과 그로 인한 후과로 2013년 난민 사태 등을 겪으면서 종래의 체제에 대한 신뢰도가 전반적으로 붕괴하였고 결국 이러한 불만을 등에 업고 극우 포퓰리즘, 내셔널리즘 정치가 대대적으로 부상하기에 이르렀다.


우리나라의 경우에도 크게 보아 민주화 이후 1990년대 초부터 2000년대 초까지 온건한 최소국가적 구조개혁이 이루어졌다.


이후에도 근본적인 패러다임 시프트가 있지는 않았으며 우리 경제 역시 다른 세계의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불안정 고용, 저성장 만성화, 고용 없는 성장, 재정 여력의 점차적 축소, 사회보장체계의 지속 불가능화 등의 문제들을 겪고 있다.


한편 2016년 탄핵정국을 기점으로 우리 사회는 대대적으로 변동을 겪어 좀 더 정치사회적 균열이 심화되었다.


2016년 이후 대략 10여 년 정도가 지난 오늘날 우리나라는 그 당시의 국민적 합의였던 ‘정상국가’로의 이행이라기보다는 극심한 균열과 포퓰리즘에 시달리고 있다.


청년 세대는 앞서 설명한 사회와 경제의 침체 속에 안정적 기반이 없어 파편화되고 고립되며 자신들의 목소리를 내기 어려워하고 있으며, 집단 내적으로는 양 젠더의 세계관 차이가 뚜렷하다.


기성세대는 전반적 전환기를 맞아 사회와 경제의 구조개혁을 도모할 책임이 있으나 껍데기만 남은 역사적 정체성을 중심으로 한 진영 대결에 갇혀 있다.


이는 심지어 진영 대결이 실질적으로 유의미하던 시절보다 더 양측의 강경하고 좁히기 어려운 견해 차이와 감정적 태도의 대립으로 가시적 양상이 나타나는 상황이다.


총체적으로 불확실성, 불안정성이 뉴 노멀이 되어가면서 점점 전체 사회와 경제 나아가 국가가 지속 불가능한 특이점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위기감도 적지 않은 상황이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4. 인본국가(Humane/Humanist state)


나는 인본국가가 새로운 국가 모델과 대안이 될 수 있으리라고 본다.

인본국가의 설명을 위해서는 그 정의와 근거가 되는 사상을 풀어 나가야 하겠다.

인본주의(Humanism)란 본래 르네상스 때 고대 그리스-로마의 인간 중심 문화의 부흥을 기조로 중세의 기독교적 신 중심 세계관을 벗어나려고 한 사상을 말한다.


좀 더 현대적으로는, 공감이나 배려 및 공존의 자세 등 바람직한 인간성을 제시하고 이에 대한 인간의 이성과 능력에 대해 신뢰하는 사상을 말한다.


이 개념은 기본적으로 양적 즉 물질적이라기보다는 질적 즉 관념적 내지는 정신적이다.

이 점은 매우 중요하다.


앞서 설명한 포스트모더니티라는 우리 사회가 처한 특성 때문이다.


우리는 사회적으로 지배적 규범이나 합의의 영역이 매우 좁아지고, 단순히 관점이나 견해가 아니라 근본적인 인식의 차이가 상호 충돌하는 상황에 처해 있다.


특히 정체성과 같은 문제들은 그야말로 정체성이어서 어떤 타협점을 찾기 어려우며 그래서 이러한 문제들이 사회의 중심 현안이 되는 한 논쟁은 소모적이다.


분명한 것은 우리가 더는 이대로 계속 갈 수는 없다는 냉정한 현실 인식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이전에 언급했듯 우리는 이제 지속가능성에 대해 생각해야 한다.


사회적으로 공존할 방도를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균열된 사회가 저절로 그런 방도를 찾는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면 애초에 문제도 없었을 것이다.


결국 정치인 등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새로운 국가 비전 또는 모델을 제시해야 하고, 나는 그것이 인본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본다.

맨 처음에 언급했듯, 인본국가 ‘시민의 실존적 위기에 관심을 가지고 인간존엄성을 증진하며, 사회적 대화를 통해 거버넌스로 나아가는 국가’를 말한다.


이를 차근차근 해석해보겠다.


앞서 언급했듯 포스트모던 사회는 종래의 근대적 규범이 약화되면서 각자가 자신의 사회적으로 좁혀지기 어려운 인식이나 정체성을 지니거나 아니면 그러한 인식 및 정체성 간 충돌 속에서 혼란과 고립을 느끼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는 어떤 추구되어야 할 바람직한 본질이 실존에 앞서던 상황에서, 실존이 본질에 앞서는 상황으로 전환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종래의 규범이 약화된 데에서 온 ‘자유로움’은 실은 양면적이다.

언뜻 보면 규범으로부터의 탈피이니 해방 같아 보이지만, 실은 결국 분명한 기준이 없고 무엇도 온전히 확신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끊임없이 선택을 해야하는 ‘실존적 부조리’의 상태이기도 하다.


현대사회의 많은 시민들은 이러한 ‘실존적 위기(Existential crisis)’, 즉 자신에 대한 정의라던가 삶의 의미를 어떻게 채워야 할지를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며 왜곡되고 그릇된 자기 정의와 삶의 의미를 설정하는 사람들도 많다.


즉 ‘바람직하지 않은 것을 바람직하게’라는 정의(Justice) 등의 본질의 문제보다 ‘어떻게 삶을 규정하고 채울 것인가’의 실존(Existence)의 문제가 시대적 문제인 것이다.


사회적 차원에서 보면, 한편으로는 사람들이 무력하게 고립되고 은둔하거나 왜곡된 자기 정의와 삶에의 의미 부여를 하는 문제(e.g. 외도, 마약 등)와 타협되기 어려운 정체성과 인식(e.g. 젠더, 이념) 등이 충돌하는 문제가 양대 산맥이라 하겠다.


그래서 전자에 대해서는 정신건강 등 시민의 실존적 위기에 보다 섬세하게 대응하는 국가가, 후자에 대해서는 지속가능성과 공존이라는 기치 아래 사회적 대화와 거버넌스를 증진하고 주도하는 국가가 필요하다는 것이 나의 최종적 진단이다.


국가는 이러한 의미에서 시민의 어려움을 진정으로 공감하고 갈등을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인본주의자(Humanist)가 되어야 한다.


청소년의 입시 훈련 중심 교육으로 인한 구속과 고통, 청년 세대의 고립과 은둔, 장년 세대의 은퇴 후 삶의 의미 상실, 노년 세대의 삶의 끝자락에서의 고립감과 비관 등에 대해 종합적으로 어루만지고 지원하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교육혁신, 정신건강 지원 강화, 종합적이고 지속가능한 노후 보장 및 노후 생활 설계 지원 방안 마련, 돌봄과 요양 서비스의 내실화 등이 필요할 것이다.


요컨대 기초생활보장, 건강보험, 고용보험 등 경제적 생존에만 대응하는 것을 넘어 국가는 개인이 자신의 삶의 이니셔티브를 좀 더 건설적으로 형성하고 유의미한 삶을 살 수 있도록 지지하고 힘을 주어야(Empower) 한다.


다른 한편으로 젠더나 진영 등의 갈등에 있어 구체적 현안이 되는 여러 사안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적 대화를 활성화하고 경우에 따라 제도화할 필요도 있다.


갈등이 실질적 현안이 되는 경우 신속하게 사회조정에 돌입하는 메커니즘을 마련하는 것을 고려해봄 직하다.


물론 민간의 갈등에 있어 정부가 일일이 개입하기는 어려울 수 있으니, 선제적으로 사회적 대화나 조정 기구 등을 만들어 문제가 생기면 양측의 견해차 조정부터 대안 합의에 이르기까지 갈등을 잘 흡수하고 유기적 사회통합에 이바지할 수 있는 국가가 되어야 한다.


자발적이고 적극적인 대화와 협의 그리고 이를 주선하고 조정하거나 주도하는 국가의 역할이 합쳐져 거버넌스(Governance)가 되고 나아가 유기적 사회통합이라는 목표를 달성할 수 있게 된다.


5. 질실국가(質實國家)


질실국가는 본래 일본에서 온 개념이다.

‘허세 없이 담백하고 합리적인, 질 높은 생활과 국가’를 지향하는 자세를 말한다.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해 일본신당(日本新党, 1992-1994)을 창당한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煕, 1938-, 총리 1993-1994)가 신당 창당의 원칙 중 하나로서 제시한 것으로서 경제학자 다나카 히데유키가 고안했다고 한다.


이 개념은 1993년에 38년 만에 비(非)자민 내각이 출범하면서 총리가 된 호소카와 대표가 중의원 소신표명 연설에서도 국가 비전으로 제시했다.


“저는 앞으로 정치를 운영함에 있어 질 높은 실속 있는 나라 만들기, 말하자면 '실질국가(實質国家)'를 지향해 나가고자 합니다.

 고이즈미 야쿠모(1850-1904, 소설가)는 제5고등학교 학생들을 향해 “일본에는 훌륭한 정신이 있다”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일본 정신이란 간결, 선량, 소박을 사랑하고 일상생활에서 쓸데없는 사치와 낭비를 싫어하는 정신이다. 그 정신을 유지, 함양하는 한 일본의 미래는 기대해 볼 만하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젊은 시절에 이 말을 알게 되었는데, 이제 우리나라도 국가도 국민도 허세를 부리지 않고 자연스럽고 내실 있는 삶을 살아야 하는 시대를 맞이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밖으로는 대국주의에 빠지지 않고, 안으로는 문화의 향기로운 질 높은 내실 있는 생활양식을 만들어 아름다운 자연과 환경을 미래를 위해 물려주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정치와 행정은 물론 경제와 국민생활에 있어서도 가식을 최대한 배제하고 질과 실질을 추구하는 것을 저의 정치철학의 근본으로 삼고자 합니다.”


당대의 맥락에서는 개발국가와 토건국가 등을 탈피해 인위적 경기부양을 자제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겠다는 시사점이기도 했다. (*이는 후에 1955년 이후 최초로 단독 다수 정당으로서 자민당을 대체해 정권교체를 실현하는 민주당(民主党, 1998-2016)의 기본적인 국정 기조이기도 했다. 민주당 내각을 이끈 하토야마 유키오, 간 나오토, 노다 요시히코는 모두 질실국가를 지향한 일본신당, 신당 사키가케에 몸 담거나 호소카와 내각에 봉직하는 등 1990년대 초에 비자민 소수정당들의 창당으로 태동한 '리버럴リベラル' 정치의 시작부터 함께 했다.)


좀 더 정책적 시사점을 구체화한 질실국가의 정의는 ‘공공서비스와 사회보장제도 등의 질(Quality) 관리에 초점을 두고, 제한된 재정을 합리적으로 운용하는 국가’이다.


같은 시기에 영국의 존 메이저(John Major, 1943-, 총리 1990-1997)가 국정 슬로건 중 하나로 제시했던 ‘스스로에게 편안한 나라(A country at ease with itself)’와도 연관이 있다.


기자회견에서 이 말의 구체적 의미를 묻자 메이저 총리는 이렇게 답했다.

모든 사람이 이 나라의 어디에서 왔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동일한 기회를 갖도록 보장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존감을 지닐 권리, 인간존엄성을 보장받을 권리, 좋은 (공공)서비스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물론 그 중 많은 부분이 시민헌장(Citizen’s charter)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공공 서비스를 이용할 때 개개인으로서 대우받고, 그들이 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서비스의 질과 개별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시민 헌장에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 슬로건은 메이저의 언급처럼 시민헌장제도의 추진이라는 맥락에서 나온 것이다.

1980년대 마거릿 대처(Margaret Thatcher, 1925-2013, 총리 1979-1990) 내각 시절에 신공공관리론(New Public Management, NPM)이 대두하면서 전반적으로 불필요한 정부조직을 축소하고 감세와 예산 삭감을 단행하며 공기업을 민영화하고 공공 부문에 경쟁 원리를 도입했다.


즉 최소국가를 위한 ‘행정의 양적 축소’가 80년대 영국의 행정개혁 패러다임이었다.


대처의 뒤를 이은 메이저는 좀 더 온건하고 공공의 가치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개혁 패러다임의 기조를 약간 수정했는데 이는 80년대 개혁의 결과로 빈곤 등 사회불평등, 인종 문제 등 사회갈등의 심화 등 ‘삶의 질 하락’이라는 문제가 대두했기 때문이었다.


메이저는 이에 대해 ‘행정의 질적 개선’을 90년대의 행정개혁 패러다임으로 제시했고, 그 대표적 제도로서 시민헌장제도를 도입해 공공기관들로 하여금 시민에 대한 효율적, 효과적 서비스 제공을 위한 미션, 비전, 전략, 구체적 목표(target)를 명확히 정하고 이의 이행을 체계적으로 모니터링하고 피드백하게 하였다. (이는 90년대 말-2000년대 제3의 길(Third Way) 패러다임으로써 노동당의 중도화를 주도한 토니 블레어와 고든 브라운의 신노동당(New Labour) 내각에서도 전반적인 공공서비스 투자의 대폭 증가와 동반하여 지속되었다.)


단순히 공공서비스를 민간화해버리거나 기업 원리를 그대로 공공에 도입하기보다 공공관리를 좀 더 엄격하고 체계적으로 하여 진정으로 시민을 섬기는(serving) 공무원(civil servant)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취지였다.


이 역시 양보다 질을 추구하는 점에서 앞서 언급한 질실국가와 닿아 있다.


그러나 질실국가는 행정 영역에만 국한되지 않고 전 사회와 경제에서 담백하고 가식 없으며 절제하는 자세를 요청한다.


국가 재정의 경우에도 버블경제 등을 유도하는 토건 등 중심의 인위적 경기부양을 자제하고 국민경제의 기초체력(펀더멘탈)을 키우는 중장기적이고 전략적인 재정 운용이 필요한 것이다.


노동수요가 있거나 잠재적으로 증가할 영역의 고용의 처우 개선, 보육과 교육 및 요양 등 사회서비스의 전반적인 과정 등의 지속적 피드백과 질적 제고, 중소벤처기업의 신산업·신기술 창출 지원, 산학연계와 고등교육의 분리, 녹색산업과 생태전환 등 중장기적 지원이 필요한 영역에의 투자 등이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불필요한 공공사업의 자제, 우선 지출 항목들의 전략적 위계화, 지속적인 지출심사(Spending review), 국채 증가 통제와 누진세 강화와 일부 간접세 등을 대상으로 하는 증세에 대한 사회적 동의 도출, 연금 통합과 기초연금 내실화 등 사회보장체계의 지속가능한 개혁, 건강보험 급여 확대와 예방 정책 및 의료 소비 통제의 균형적 지향 등이 함께 가야 한다.


이를 통해 부족한 것을 채우고 과도한 것을 덜어내며 전체적으로 조화와 균형을 이루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질실국가의 실질적인 정책적 함의 또는 지향이다.


6. 인본과 질실의 국가를 향하여


정리하면, 우리가 앞으로 지향해야 할 국가는 ‘시민의 실존적 위기 대응을 지지하고 사회갈등에 사회조정과 사회적 대화 등 거버넌스로서 유기적 사회통합을 지향하는 국가’, ‘총량이 부족하고 증가 가능성도 제약되는 자원을 합리적·전략적으로 사용하며 민간의 자생력을 강화하는 국가’라고 본다.


이를 통해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회와 경제를 좀 더 통합적이고 안정적인 사회와 경제로 전환해 나가야 할 것이다.


물론 이는 새로운 역사적 도전이 될 것이다.


한 패러다임에서 다른 패러다임으로 세계대전이나 대공황과 같은 파멸적 가르침이 없이 전환된 경우는 인류의 역사에서 매우 드물었다.


더구나 오늘날 이토록 복잡해진 사회와 경제를 고려하면 그 난이도는 이전의 시대들과는 다른 차원에서 높다.


그러나 이런 때일수록 보다 전체적 흐름을 세심하고 예리하게 감안해 지속가능한 방향으로 안정적 제도적 인프라와 법적 프레임워크 그리고 공공서비스 등을 제공하는 국가와 정치 및 행정의 역할은 막중하다 할 것이다.


작은 국가나 큰 국가가 아니라 최적(Optimal)의 적정(Appropriate)한 국가,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질 줄 아는 국가’로 나아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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