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용을 볼 것도 없이 웃기지도 않는 책이라고 생각한다.
보수면 어떻고 진보면 어떠냐고 하더니, 다른 한편으로는 또 보수라고 스스로 인증하고 싶어한다.
정말 중요한 문제는, 왜 보수라는 걸 스스로 인증하고 싶어하느냐는 데에 있을 것이다.
그리고 더 심각한 건, 구태여 보수라는 걸 강조해야 하는 이유에 대한 문제이다.
90년대라면 몰라도, 지금 민주당 정치인이 자기가 보수라는 걸 자처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
국민의힘을 궤멸시키고 싶어서?
하지만 그 명분으로 이미 진보정당을 짓밟아 버리지 않았나?
민주당이 보수도 하고 진보도 하고 다 하면, 일본 자민당처럼 되는 건가? (물론 일본 자민당에게는 실례인 비유이다. 요는 민주당이 원하는 궁극적 귀결이 정확히 뭐냐는 것이다.)
왜 이런 식으로 '보수가 정상'이라는 이데올로기의 가스라이팅에 굴복하고 어설픈 '보수 놀이'를 하는지 당최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정말 군사정권과 그 아류 세력을 잇고 싶은 거라면, 그건 그거대로 정말 심각한 자기모순이다.
그토록 격렬하게 보수 세력을 공격하더니, 이제는 정작 자신이 그 보수를 자처하는 지경이니. (마치 자기가 ‘흑반백반’ 또는 ‘흑백혼합’도 아니고, ‘흑’이면서도 ‘백’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첨언 : 우리나라 민주당계 정당은 이미 90년대-2000년대에 걸쳐 대대적인 수권정당화, 중도화를 했다. 보수까지는 아니더라도 DJ의 중도개혁주의는 그전의 민주화 운동 중심 선명야당과는 다른 것이었다. 종래의 민주당이 지금 또 '보수'까지 자처할 정도로 그렇게까지 좌파적인가?
https://news.tf.co.kr/read/livingculture/2203484.htm
2.
내 아버지는 학벌이 좋진 않지만, 이공계 전문직으로서 적당히 중산층이 된 86세대이다.
언젠가 아버지가 '전두환 때 경제는 좋았지'라는 취지로 말을 한 적이 있다. (이때는 이재명이 부상하기도 전이었다)
최근 내 아버지가 그토록 지지하는 이재명 후보가 '실용'을 강조하면서 독재 세력을 정당화하기에 이르는 것을 보며 그 생각이 났다.
이 사람들은 참 희한하다.
그 어느 세대보다도 군사정권과 보수 세력을 가장 격렬하게 경멸하고 궤멸해야 하는 대상으로 보면서도, 정작 또 일정 부분은 치하한다.
하지만 '개발독재'라는 말이 있듯, 결국 국가주의 군사독재와 국가 주도 개발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게다가 그 개발이라는 건 그 당시 사람들도 알 수 있듯 그 과정에서의 원주민에 대한 폭력이라던가 물신주의의 대두 등 경제만이 아니라 정치, 사회와 통합적으로 악영향을 미친 것이기도 했다.
그 성과만을 놓고 평가하더라도, 현재의 정치인이, 그것도 보수 세력 공격의 선봉장이었던 사람이 이렇게 '실용'이니 '결과'니 하는 것을 내세우면서 보수임을 인정 받고 싶어하는 것은 매우 부적절하고 그로테스크하다.
3.
예전에도 언급한 적이 있지만, '진짜' 보수나 '가짜' 보수라는 건 없다.
현존하는, 자타공인의 보수 세력(즉 국민의힘)이 보수다.
그 둘을 나누려는 건 '보수가 옳은 것' 내지는 '보수라면 이래야 함'이라는 전제를 두고 그러한 임의적 틀에 실존하는 것을 끼워 맞추려는 데 불과하다.
보수주의라는 개념 자체가 본래 이론적으로 개발되었다고 보기 힘든 것일 뿐 아니라 설령 그렇다 해도 중요한 건 현실적 양태이지 자기가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한다고 해서 그게 현실이 되는 건 아니다.
물론 장래에 그렇게 변동할 수는 있다.
과거에 이해찬 전 대표가 말했던 것처럼 선거제도 개혁과 사회변동 등을 통해 민주당이 보수가 될 수도 있다. (그도 그 발언의 맥락에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문제와 '그렇게 될 것이다/현재 이러하다'의 문제를 다소 섞어서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사적 차원의 변동이지 아직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느끼는 것이 아니다.
다른 차원에서 보면, 구태여 보수라는 개념에 갇혀 있을 이유는 전혀 없다. (이것은 진보라는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중요한 건 구체적으로 세상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문제의식을 지녔으며, 어떤 정책적 지향을 지니고 있느냐에 있다.
그게 시대나 공중의 인식 등에 따라 보수가 될 수도 있고 진보가 될 수도 있고 중도가 될 수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