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남동과 네 번의 기지개 (2/4)
30대가 되고 나니
저 말을 부쩍 자주 사용한다는 걸 지인 Y가 지적하고서야 알게 되었다. 저 말은 어디에나 무난하게 어울린다. 특히 스스로에게 느끼는 크고 작은 변화를 설명할 때 요긴하게 쓰인다. 성인이 되고 나서 해가 열두 번 바뀌는 동안 나 역시 조금씩 달라졌다. 하지만 그래 봤자 입맛이나 친구들과 만나서 대화하는 주제, 새벽까지 술을 마신 다음날의 상태 같은 것들이다. 그 시간 동안 먹었던 밥들, 술자리들, 책과 음악과 영화와 드라마, 만나고 헤어졌던 연인들을 생각하면 오히려 나는 변하지 않았다. 12년 전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고, 집에 가기 위해서 빨간색 경기도 광역버스를 탄다. 그러니까 '30대가 되고 나니'라는 말은 하나 마나 한 말인 셈이다.
순천향대학병원 앞 버스 정류장. 통학하던 신입생 시절, 420번 버스에서 내려 여기서 광역버스로 환승했다. 예전에는 정류장 앞에 LH가 소유한 외국인 아파트 단지가 있었다. 남산터널을 통과한 다음 고가도로를 내려갈 때 보이던 빨간 지붕들을 기억한다. 지금은 더 이상 볼 수 없다. 그 부지에는 대신 고급 아파트 단지인 나인원 한남이 있다. 두 번째 기지개를 켜기 위해 방문한 가나아트 갤러리는 그 단지 안에 있었다.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탓에 요가 수업이 시작하기까지 두 시간이 남았다. 갤러리와 나란히 있는 블루보틀에서 커피를 마셨다. 카페는 우중충한 하늘에도 아랑곳없이 북적였다. 반면 가나아트에는 사람이 없었다. 그야말로 텅 비어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 에드문드 드 발의 전시가 진행 중이었다.
불규칙한 형태의 도자들을 시적으로 배열한 설치 작품으로 도예를 넘어 장소 특정성을 고려하였다. 또한 작업을 통해 디아스포라, 재료의 물질성, 사물에 담긴 인류의 역사와 기억 등의 주제를 시각화하였다. - 작품 설명 中
*디아스포라는 특정 민족이 자의 혹은 타의로 기존에 살던 땅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집단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작은 도자기와 금색 판, 대리석 무늬의 반투명한 돌 같은 사물들이 장식장 안에 진열되어 있다. 작품 설명이 없었다면 작가의 의도가 무엇인지 조금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다. 그나마 '인류의 역사'라는 힌트를 가지고 보니 어렴풋이 상상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상하게도 한국 전쟁이 보였다. 거대한 탄피를 연상시키는 검고 긴 도자기, 불타버린 유물. 하얀 도자기는 누군가에 의해 잘 보관된 백자를 떠올리게 했다. 한국 전쟁을 떠올리며 작품을 만들지는 않았겠지만, 어쨌든 작가는 입체 도형의 소재와 배치를 통해 설움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는 것 같았다.
무엇이 있어야 이야기인가. 소설가 김연수는 '간절히 원하는 것을 절대로 얻지 못한다는 걸 깨달았을 때의 절망'이라고 했다. 극적인 대답이다. 같은 질문에 에드문드 드 발은 장소와 시간, 그리고 사건이라고 답하는 듯하다. 김연수에 비하면 다소 평이하다. 드 발의 작품에서 장식장은 장소이고, 도자기와 돌 같은 사물은 사건이며, 그걸 횡으로 배치함으로써 시간이 표현된다. 거기엔 눈을 확 끌만한 포인트가 없다. 다들 엇비슷한 크기와 색을 가진 사물들이 어딘가에 불규칙적으로 나열되어 있을 뿐이다. 마치 별로 변함이 없는 내 인생처럼.
무엇이 있어야 인생인가. 20대 초반에는 철없게도 내 인생에 비극과 그에 수반하는 깊이가 없는 것 같아 괴로웠다. 20대 후반에는 내 인생이 소모적이고 시시한 것 같아 괴로웠다. 30대 초반이 된 지금, 나는 더 이상 괴로운 감정은 별로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간절히 원하는 것을 얻었으냐, 하면 그건 잘 모르겠다. 그래도 작년과 올해는 그다지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는 요가의 지분도 조금은 있다고 나는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