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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험디제이 May 18. 2020

일상이 모험이 되는 100일 루틴의 힘

갑작스럽게 찾아온 시련

“I am sorry that Mr. Lee has passed away.” (장인어른께서 돌아가셨습니다.)

모르는 태국인으로부터 받은 페이스북 메시지에 눈이 고정되었다. 엊그제까지 그리운 손자 손녀의 사진을 보내 달라고 재촉하시던 장인어른의 카톡은 더 이상 받아볼 수 없다는 현실이 믿기지 않았다. 낯선 태국인에게 장인어른의 마지막 모습에 대한 사진까지 요구한 끝에서야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하지만, 같은 시간 평창에 있던 아내에게 선뜻 전화를 할 수 없었다. 지난 10년간 쇼트트랙 국제심판으로 활약해 온 아내는 NTO(National Technical Officials) 자격을 얻으며 평창올림픽에서 마지막 꿈을 펼치려 준비하고 있었다. 설렘 가득한 순간을 만끽하고 있을 아내의 모습에 통화버튼에 손가락을 올릴까 말까를 반복하다 결국 호주머니로 핸드폰을 집어넣었다.

꿈에 그리던 평창 무대를 앞두고 있던 아내의 모습

하던 업무를 중단하고 팀장님께 간단한 사정을 말씀드린 뒤, 곧바로 장모님과 아이들이 있는 서울로 출발했다. 고속도로 위 차선을 수시로 바꾸며 내달렸지만, 다급한 마음만큼 속도가 나질 않았다. 가족과 떨어져 지냈던 주말부부의 삶, 언제나 가족에게 미안함 마음이 가득했던 남편이자 사위로서 죄송스러운 감정이 맴돌았다. 그동안 뭐 그리 사는 게 바빴을까. 가족사진 한번 남겨보자던 장인어른의 작은 부탁이 그렇게도 어려웠던 것인지. 두어 시간쯤 달리다 보니, 어느덧 저 멀리 충혈된 눈으로 내 차를 응시하고 계신 장모님이 눈에 들어왔다. 아이들은 우리 부모님께 맡기고 오셨다는 장모님도 아직 아내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나와 비슷한 마음이셨을 장모님. 우린 아내에게 언제 어떻게 말을 해야 할지 생각하며 인천공항으로 출발했다. 

     

힘이 풀린 다리로 몇 번을 계속해 주저앉으시던 장모님과 함께 항공권과 수속을 마쳐갈 무렵, 아내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다. 핸드폰 화면을 통해 번쩍이는 아내의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 전화를 받았다. 이미 알고 있었다. 장인어른의 오랜 친구사이였던 태국인의 딸에게 연락을 받은 듯했다. 추운 겨울 스키 타러 오기 전, 항상 걸려오던 연락쯤으로 생각했었을 그 연락에 아내는 충격받은 모습이 역력했다. 무거운 숨소리 사이로 아내가 말했다.

“평창올림픽 포기하고 애들한테 가고 있어. 내 걱정 말고, 우리 엄마 잘 부탁할게”  

   

태국에 도착해 장인어른의 시신을 확인하고, 2차 부검까지 진행하고, 현지 경찰과 함께 돌아가신 장소를 몇 번이나 방문하시기를 반복하는 속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수도 없이 쓰러지시는 장모님을 부축하고, 아무것도 드시지 못하는 장모님께 따뜻한 커피를 타드리는 것뿐이었다. 타살까지도 의심했던 무엇도 믿을 수 없는 현지에서 장인어른께서 운영해오셨던 모든 사업을 정리했다. 단서가 되고, 참고가 될 만한 계약서조차 없었고, 도대체 누굴 믿어야 할지 구분조차 가질 않았다. 정산 후 받을 돈도 갚아야 할 돈도 없다는 무기력한 결론을 뒤로하고 장모님과 나의 안전을 위해 무작정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고민하고 노력해도 해결할 수 있는 범위가 아니라는 점을 굳이 서로 확인할 필요도 없었다.

     

한국에 돌아와 정신없이 장례식을 치르고 나니,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왔고, 모르는 번호로 걸려오는 전화가 많아질 무렵, 틀리기를 바랐던 나의 예감은 현실이 되어있었다. 제법 컸던 사업의 규모만큼이나, 감당하기 버거웠던 ‘빚’은 그렇게 우리 가족에게 불쑥 다가왔다.     


“지금 이 순간부터 단순해지는 거야! 복잡하게 생각하면 답 없다. 무조건 단순해지는 것뿐이야!”라고. 세상모르고 신나게 뛰어노는 두 아이를 보며 스스로에게 굳은 약속을 했다. 외동딸인 아내를 대신해 내가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서 고민은 어리석은 사치에 불과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듬직하고 우직해야 하는 가장. 그게 앞으로 나의 위치였고, 별다른 어려움 없이 현실을 받아들였다. 좋아했던 대전 연구원의 생활도 뒤로 하고, 일반 사무업무가 주인 본사로 발령받으며 가족 곁으로 올라왔다.     


난 어려서부터 경제적으로 부족하게 살아왔다. 그래서 더욱 돈에 대한 마음의 결핍이 있었고, 덕분에 24살의 어린 나이부터 일찍이 마음잡고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알바로 시작해 프랜차이즈 창업까지 이뤄내며, 현재의 직장에도 취업하며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잔고는 월세 단칸방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던 아내와 나의 행복이었다.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라는 인생의 허무함이 세포 하나하나에 와 닿았다. 가족을 지킬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감사한 마음이 가득했지만, 점점 커져가는 공허한 마음을 주체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다른 기억은 희미해지고, 한 순간에 없어진 돈에 대한 생각은 계속 짙어져 갔다.  

   

공허한 마음에 위안을 찾기 위한 본능이었을까. 가정을 지키기 위해 무리하면서까지 올라온 후, 오히려 아내의 마음에 상처 주기를 반복하는 나 자신을 멈출 수 없었다. 모든 원인과 화살을 아내에게 돌려야 현실이 정당화되었고, 나의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렇게 나 혼자만 편안한 시간이 2018년 내내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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