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영어가 문제였을까?
조금 숨통이 트이면 다시 글을 쓰리라 다짐하며 중간중간 글쓸 거리들 메모만 해두고 미루다가 결국 논문까지 제출해버렸다. 방치해둔 블로그에 다시 돌아와보니 어느새 구독자가 80명...혹시나 아직도 내 글을 기다릴 사람들을 위해 이제 정말 정기적으로 글을 올려볼까 한다. 난 이제 정말 한가한 백수니까...
0. 전반전 이야기 3줄 요약
1) 영국의 석사는 1년 과정이다, 2) 과정이 생각보다 빡빡하다, 3) 날 무시하는 듯한 녀석들에 대한 대책을 세우기로 한다.
1. 영어가 문제인 줄 알았지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건 그저 내 영어가 어눌하기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생각해보면 내가 대학생일 때도 중국인 유학생 친구들을 비슷한 이유로 기피했던 경험이 있기도 했다. 그래서 저 네이티브 스피커들은 소통이 원활한 지들끼리 모여앉고 비영어권(특히 한중일) 학생들을 소외시키고 있다고, 그렇게 굳게 믿었다. 반복된 피해 의식은 결국 잠재되어 있던 K-꼰대짓을 발현시키기에 이른다.
때는 Reading Week가 끝나고 본 학기가 들어가기 전 열린 학부 주관의 소셜 파티. 와인을 먹고 취해버린 나는 우리 세미나의 서양친구들을 불러 모아서 "자꾸 대륙별로 나눠서 앉는 건 모두에게 좋을 것이 없다"는 술주정을 시전해버린 것이다..그래도 착하디 착한 서양인들, 술취한 한국 아재의 이야기를 끝까지 귀 기울여주며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확실히 아시아인들끼리 모여 앉는 건 문제가 있다. 다음 세미나부터 우리가 나서서 테이블을 섞어버리자"며 제안해주기까지 했다. 알딸딸하게 취해있던 나는 뭔가 불공정 타파에 일조하고 있다는 엄청난 착각을 했고, 후반기부터는 세미나가 훨씬 알차지리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었다.
2. 그러나 문제는 나였고
그렇게 시작된 후반기의 첫 세미나. 소셜 파티에서 내 잔소리를 열심히 들어주던 영국 친구 두 녀석이 자기 테이블에 앉으라고 손짓한다. 냉큼가서 그들 사이에 섞여 앉은 나, 이제야 비로소 세계를 무대로 활약하는 상상 속의 멋진 나로 거듭나는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근자감 뿐만 아니라 몇 가지 대답들을 영어로 준비해오기도 했기 때문에 전반기처럼 무기력하게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것이란 나름 합리적 자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세미나는 늘 상상과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는 법. 그날은 분명히 하버마스라는 학자의 이론에 대해 이야기하기로 했는데 어느새 토론은 지난 시간에 배운 전혀 다른 학자의 전혀 다른 이론으로 뻗혀져 나가고 있었다. 내가 준비한 예상 답안지를 그대로 읊었다간 분위기가 순식 간에 곱창날 것이 불보듯 뻔해진 상황.
이윽고 지난 소셜파티에서 술에 취해 아시아인의 발언권을 보장하라고 진상을 부렸던 나를 똑똑히 기억하고 있던 착한 서양친구들은 "헤이, 제이콥! 니 의견은 어때?"라고 물어왔다. 그들의 표정은 정말이지 '니가 어떤 개소리를 해도 우린 진지하게 듣겠다'는 의지가 느껴질 정도로 결연하고 적극적이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상황에서 정말이지 간신히 "너네의 관점이 매우 흥미롭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이런 것들도 한 번 생각해보면 어떨까?"라며 내가 준비해온 완전 쌩뚱맞은 답변들을 속사포처럼 내뱉았다. 아니, 속사포처럼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그 쌩뚱맞은 의견을 말하고 있는 내 자신이 너무너무 쪽팔렸기 때문이다 ㅠㅠ 10분처럼 느껴졌던 30초 정도의 짧은 스피치가 끝나고, 아니나 다를까 모두의 얼굴에 '아니, 저 이야기를 왜 지금?'이라는 표정이 잠시 스쳐갔지만 누구도 그 얘기를 밖으로 끄집어내진 않았다.
3. 토종 한국인을 위한 몇 가지 세미나 팁
정말 이불킥을 하고 싶은 몇 가지 순간들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끝끝내 세미나 시간에 있는듯 없는듯 조용히 짱박히는 방식을 택하진 않았다. 우선 퇴직금으로 밀어넣은 학비가 너무 아까웠고 소셜 파티에서 질러놓은 게 너무 쪽팔리기도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토론에 쓸모가 없는 사람으로 평가되어 배척되는 것이 너무너무도 서러웠다. 그렇다고 단기간에 영어로 유창하게 말할 수 있게 될리도 없었기에 결국 나는 나만의 몇 가지 생존전략들을 개발하기에 이른다. 세미나로 고통받을 나 같은 토종 유학생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길 바라며 이 전략들을 공개한다. (참고로 이 전략들은 학식이 풍부해지는 것과는 전혀 거리가 멀다).
첫째, 먼저 발표하는 것. 내가 준비한 답변이 나가리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가장 확실하고도 유일한 방법이다. 앞서 말했듯, 토론이 진행되다보면 결국 태초의 질문과 전혀 다른 내용들로 확장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것은 보통은 한국어로 반박하기에도 벅찬 주제가 대부분이기도 하다. (애들이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듣기라도 하면 다행). 그러니 괜히 변수가 많은 중후반부가 아닌 극초반, 아예 1등으로 발표를 해버리는 것이 가장 확실하다. 그러면 우선 매우 의욕적인 학생으로 보여지고, 내 발표가 첫 의견이기 때문에 맥락에 어긋날 일이 없으며, 무엇보다 이미 발표를 했기 때문에 이후로 매우 편안한 마인드로 상대방의 의견에 경청 + 리액션 할 수 있게 된다.
둘째, 남들이 모를만한 한국의 일화를 준비하는 것. 아무리 먼저 발표를 했기로서니 그냥 "That makes sense" 따위의 영혼리스 리액션만 하고 앉아있을 수만은 없다. 적당히 입에서 단내가 날 때 쯤, 타인의 발표 직후 한국에서 벌어진 비슷한 사건들을 소개해주며 맞장구 쳐주면 나의 진정성과 적극성을 표현하기 더할 나위 없이 좋다. 논리적으로 복잡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그냥 "한국에 이런이런 사건이 있었는데 이것도 너가 얘기하는 방향과 비슷하게 분석되어질 수 있을 것 같아" 따위로 슬쩍 말하기만 하면 된다. 물론 이를 위해 사전에 해당 이론과 작게라도 연결될만한 한국의 최신 이슈들을 영어로 간략하게 정리해둘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것은 그 테이블에서 오직 나만 낼 수 있는 의견이기 때문에 타인들에게 매우 큰 흥미를 유발시키며, 무엇보다 한국인으로서의 내 존재가치를 무한히 높여주기도 한다.
셋째, 사회자 역할을 하는 것. 이건 조금 인싸력이 필요한 기술이긴 하지만, 영 할 말이 없는 날 최고의 가성비로 쓸 수 있는 전략이기도 하다. 보통 세 가지 질문이 토론 주제로 던져지는데, 개별 토론이 시작된 이후 교수님이나 세미나 리더는 여러 테이블을 돌아다니기 때문에 각 테이블에서는 토론이 과열되거나 산으로 가는 경우가 왕왕 발생한다. 이때, 오늘 내 존재감이 좀 미미했다고 생각된다면 조심스레 "니가 방금 얘기한 건 두 번째 질문과 좀 연결될 수 있을 거 같은데? 우리 시간이 없는데 두 번째 질문도 한 번 얘기해볼까?"라는 식으로 사회자의 롤을 자청해보는 것도 좋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1번 전략, 즉 해당 주제에 대해 먼저 발표하는 전략을 다시 한 번 활용해 내 의견을 발표해볼 수도 있다.
4. 결론
이렇게 쓰고 보니 내가 무척 한 학기를 잘 보낸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대부분의 세미나에서 숱한 좌절을 맛봤으며 준비해간 답변의 퀄리티가 너무 처참해서 보이지 않는 비웃음을 산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날도 있었다. 그럴때면 또 만만한 한국, 중국, 일본 친구들을 모아서 펍에 가서 술을 마시며 신세한탄을 하기다가도, 또 그러다가 가끔 괜히 맹활약한 기분이 드는 날에 마치 대단한 석학이라도 된 양 의기양양해지기도 했다. 이런 일희일비가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되는 첫 학기였다. 쉴 틈이 없는 영국 석사. 뭘 제대로 배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어느덧 한 달이라는 매우 짧은 봄방학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