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 에세이
멍게와 뇌에 관한 얘기는 참으로 흥미롭다. 멍게의 유충은 뇌가 있다. 하지만 성충이 된 멍게는 뇌가 없다고 한다. 일종의 퇴화인데 오랜 시간에 걸친 퇴화가 아닌 단기간에 필요에 의해 스스로 뇌를 없애버린 것이다. 필요라고 함은 뇌를 사용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이 부분은 움직임과 유관성이 깊다.
멍게의 유충은 생존을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이며 먹을 것을 찾아다녀야 하고 성충이 되면 바위에 붙어서 움직이지 않게 된다. 움직이지 않는 상태에서는 에너지의 사용량을 최적화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칼로리가 많이 소모되는 뇌의 크기를 점차 줄이고 종국에는 없애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는 동. 식물은 모두 뇌가 없다. 뇌는 결국 움직임을 통제하기 위해서 있다.
뇌는 감정을 만들어내는 변연계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대뇌피질로 구성된다. 대뇌피질은 감정을 통제한다. 감정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를 불러일으키는 것으로 행동 즉 움직임의 시초가 된다. 예를 들면 배가 고프다는 신체의 신호가 뇌에 도달하면 음식을 먹고 싶어 하는 식욕이 생기고 움직이게 된다. 만약 움직이지 않으면 굶주림의 고통 속에서 서서히 죽음을 맞이할 것이다.
즉 인간은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석기시대의 대표적인 움직임이 먹을 것을 구하기 위한 사냥과 채집이라고 한다면 현대인의 움직임은 경제활동을 위한 사회생활이라 하겠다.
그런데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일 중의 하나는 직업을 갖는 것이다. 사회에서 요구하는 지식과 기술을 배워야 하고 남들이 그것을 인정해 주어야 하며 지속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즉 학교를 졸업하고 공인 자격증도 취득하고 직장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이러한 일련의 활동들이 현대인의 움직임이다.
위에서 얘기한 현대인의 움직임은 숙련되면 전문가라는 칭송도 받지만 어느 순간에 매너리즘에 빠지기도 한다. 익숙한 움직임 속에서 서서히 수동적이 되고 습관화된다.
이는 곧 멍게가 바위에 안착해서 서서히 뇌를 갈아먹는 것과 흡사하다 할 것이다. 마치 '모던 타임지'라는 찰리 채플린의 무성영화에서 볼트처럼 보이는 것은 무조건 조이는 행동을 하듯 같은 일들이 습관처럼 반복된다.
한 직장에서 오랫동안 같은 업무를 하게 되면 조직에 완전히 융화되어 한 몸이 된다. 과거에 힘들었던 문제들도 척척 해결하고 사내의 네트워크를 활용하면 못할 일도 없다. 반면에 시간이 갈수록 마음 한구석은 불안해진다. 특히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선배들이 한두 명씩 자리를 떠나면 언젠가 내 차례가 오겠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음 단계로의 이직을 고민해보지만 동종업계는 너무나도 빤해서 만만치가 않다. 그리고 퇴사해서 정착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도 떠오르지 않는다. 바위에 붙어서 뇌가 작아져 버린 멍게처럼 바다를 헤엄치던 기억도 사냥을 하던 모습도 잊어버린다.
어떻게 하면 바위에서 떨어져 나가 능동성을 발휘할 수 있을까? 어떻게 야성을 되찾을 수 있을까? 물론 바위에서 떠나는 것이 능사는 아니지만 직장인들은 때가 되면 자의든 타의든 떠나야 하기에 헤엄치는 방법 사냥하는 방법을 다시 기억해야 한다.
해답은 스스로의 욕망과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찾을 수 있다.
우선 퇴사한다면 가장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 보아야 한다. 꼭 취업하는 것이 아닌 창업까지도 생각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어떤 일이든 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필자가 사용한 '욕망'이라는 단어는 보통 동기부여라고 달리 표현할 수도 있다. 스스로에게 동기부여를 해야 적극적으로 움직일 생각이 든다.
그리고 본인이 선택한 일을 하기 위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을 선정해 본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평소에 소원했던 사람일 경우도 있다. 또는 전혀 모르지만 꼭 만나야 할 사람도 있다.
하지만 미래를 위해서 선택한 사람들에게 내 시간을 투자해보자. 바위에 붙어서 생을 기다릴 것인가 아니면 헤어지고 사냥하는 야성을 되찾을 것인가는 스스로의 선택에 달려있다.
아무 생각 없이 하루를 보내고 내가 지금 뭘 하고 있는 걸까라고 의문을 가질 때가
바위에서 떠나야 할 시기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