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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가 아닌 누군가가 되지 않아도 괜찮다.

각자의 고유한 요가

처음 다리 찢기를 한 날을 기억한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에어로빅 교실에서였다. 친구들은 모두 일자로 다리를 찢는데 나의 최대 각도는 90도였다. 곧이어 친구들 모두 다리를 양옆으로 벌린 채 배를 바닥 가까이 내려놓는다. 또 양 옆으로 벌린 다리를 뒤로 모아 엎드리기도 한다. 나의 두 다리 사이 각도는 여전히 90도를 넘지 않았다. “난 유연한 사람이 아니구나” 그 후로 뻣뻣한 사람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특정한 자세를 취할 수 없는 것이 나만 그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특정 자세를 할 수 없을 때, 우리는 정말로 스스로에게 ‘뭔가 잘못된 것’이 있다고 믿는다. 인간 변이의 현실과 당신의 고유성을 이해하는 것은 이런 생각을 씻어내는 데 도움이 된다. 특정한 자세를 취할 수 없는 사람은 당신만이 아니다. 당신은 고유하고 그 고유성이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과 ‘당신’이 할 수 있는 것 사이의 차이를 만드는 것이다. 요가에는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자세란 없고 모든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책 <유어바디 유어요가>, 버니 클락



몇 해 전 요가를 시작하고 ‘동작을 못하면 뻣뻣한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깼다. 허리를 한쪽으로 회전 한 채 손을 천장으로 뻗는 파리브리타 트리코나사나(회전된 삼각자세)를 하는데, 위로 뻗어져야 하는 손이 어깨를 살짝 넘은 높이에서 멈췄다. 처음 두 다리를 옆으로 벌렸을 때처럼 아무리 낑낑거려도 팔이 올라가지 않았다.

파리브리따 트리코사나사 (회전된 삼각자세)

그때 선생님이 말했다. “지금 손을 뻗은 높이가 라희 님에게 맞는 자세예요.” 그리고 같은 자세에서 한 명 한 명 팔의 높이를 관찰하는 시간을 보냈다. 누군가는 나처럼 상체를 숙인 채 어깨 높이 정도로 팔을 들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보다 조금 위, 또 다른 누군가는 완전히 팔을 천장 쪽으로 뻗고 있었다. 그래도 난 답답했다. ‘나도 저렇게 하고 싶은데 왜 난 안되지’ 나의 속마음을 읽었는지 선생님이 설명을 이어갔다. “팔의 높이는 척추의 회전 각도에 따라 달라져요. 지금 할 수 있는 자세에서 머물러 보세요.”


시간이 흐르고 회전하는 동작을 여러 번 수련했다. 회전을 돕는 근육이 조금씩 부드러워졌고, 어느 날 너무나 편안하게 손이 천장을 향해 뻗어졌다. 그때 난 깨달았다. 나의 몸에 문제가 있어서 어떤 자세를 하지 못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동작에 나를 끼워 맞추는 건 안전하지 않다는 것도. 대신 어떤 목표 동작으로 가는 모든 과정을 즐겨보기로 했다.


그 후로 목표 동작을 할 때, 자세가 몸에 주는 혜택에 대해 알고 수련했다. 그러면 꼭 동작이 똑같지 않더라도 충분히 근육을 움직일 수 있었다. 그렇게 4년이 지났고, 어느 날은 두 다리를 모아 뻗고 상체를 숙이면 배와 허벅지가 닿기도 하고(파스치모타나사나), 머리를 땅에 내려두고 두 다리를 들어 올리는(시르사사나) 동작도 됐다. 두 다리를 양옆으로 벌리는 각도도 서서히 넓어졌다. 그러다가 문득, ‘꼭 두 다리를 일자로 벌려야 하나?’ 의문이 들었다. 그리고 목표를 정하지 않고 수련했다. 지금 다리 안쪽 근육이 스트레칭되는 것만 느껴도 충분했다.


누군가처럼 요가 동작을 똑같이 하지 않더라도 그저 나의 몸을 느끼고, 이 몸의 가능성과 한계를 알아주고, 때론 함께 나아가기도 멈춰 서기도 하면서 지내는 중이다. 나의 몸과 요가를 이해하면서 누군가의 고유한 요가도 함께 존중하게 된다.


요가에는 모든 사람들이 할 수 있는 자세란 없고 모든 자세를 취할 수 있는 사람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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