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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린 Oct 01. 2023

2. 직장인의 삶 그리고 마지막 퇴사

퇴사 전에 질문해야 봐야 하는 것들

"나린씨, 오늘 야근 담당인거 알죠?"

"네, 스케줄 확인 했습니다."

"그럼 수고해요."


직장인으로서 살아간 지 어느덧 2년이 지났다.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지나갔다. 결코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했던 정해진 시간에 눈을 뜨고  정해진 시간에 문을 나서서 정해진 시간에 전철을 타고, 정해진 시간에 다시 집으로 돌어오는 삶. 이런 루틴적인 삶은 생각했던 것보다 할만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피로했다.


당연히 입사를 하고 첫 1년간은 열정이 넘쳤다. 직장인으로서의 삶을 선택한 이유가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었고, 어느새  나의 일상에서는 ‘배움, 꿈, 성장, 목표’과 같은 단어들이 사라져 갔다. 처음 생각했던 '배움'의 자세는 길어야 고작 3개월. 그리고 초심으로 연명하려 애를 쓰던 나머지 9개월. 그 시간이 지나자마자 매달 꼬박꼬박 통장에 꽂히는 월급의 안정성에 급속도로 익숙해져 갔다.


8개월 정도 다녔던 첫 직장에서, 두번째 직장으로 운이 좋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더 좋은 조건으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고 이직을 했다. 처음이 어려웠지 두 번째는 더 쉬웠다. 어쩌면 그것이 나를 그 삶에 더 안주하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나아진 연봉만큼 삶의 질이 올라간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하지만 빠르게 적응한 몸과는 달리 정신은 그렇지 못했다. 이 말이 무슨 의미냐하면 삶의 대한 열정을 잃어버렸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당히 일하고 웬만큼 받는 월급은 생각보다 더 달콤했기에.


하지만 어느 날엔가 야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거울 속 비친 나의 얼굴을 보았을 때 무언가 아주 단단히 잘못되어 가고 있음을 느꼈다. 텅 빈 공허, 그리고 공백, 타성에 젖어 무언가를 잃어버린 삶. 거울 안에는 표정을 잃은 내가 서있었다.


아차 싶었다.


그제야 알았다. 월급의 안정감이 나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지 않는다는 것을. 모든 순간이 행복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다. 당연히 이 전보다 훨씬 더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삶을 살았기에 먹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을 걱정 없이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행복은 아주 잠시였다. 오히려 그런 행복에 취하면 취할수록 나는 더 회사에 목을 맸고 그럴수록 그만둘 수 없었다. 사실 월급은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쉽게 주어지는 보상이었다. 적당한 선에서 최선만 다하면 되었다. 그것은 나에게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 이상은 없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서야 퇴사할 때가 되었음을 느꼈다. 그러나 결심했다고 해서 바로 퇴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2년 반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지금의 씀씀이에 익숙해질 때로 익숙해져 있었고, 안정적인 월급을 담보 삼아 땡겨 쓴 카드값, 그리고 무엇보다 다시 전쟁터로 뛰어들 용기가 사라졌다. 2년 반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것은 내가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나는 내년에 서른이었다. 여러 사회의 기준들, 주변의 시선들이 내 발목을 잡았다. 더 이상 꿈만 쫓아 살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덜컥 겁이 났다. 내가 늘 꿈꾸던 이상을 현실로 옮길 수 있을까? 과연 지금 나에게는 어떤 선택이 가장 최선의 선택일까?


퇴사를 마음먹고 가장 중요하다 생각되는 두 가지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져 보기로 했다.


1. ‘나’로서 행복한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저마다 행복을 어떻게 정의 내리느냐에 따라 분명 달라질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확실했던 것은 월급의 안정감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나는 피폐해져 갔다. 나를 잃어갔다. 누군가 시키는 일들을 하며 주제성을 잃어갔고, 설령 그것이 내가 책임을 지고 해야 하는 업무였을지언정 나는 나에게 주어진 것만 잘 해내면 되는 거였다. 그것은 다른 의미에서 나의 한계를 지어놓고 적당히 하면 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 안에서 진정으로 흘러나오는 '열정', ‘자발성', '주체성'이 사라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진정한 행복과 거리가 멀어졌다는 것을 알아차리게 된 지점이었다. 분명 나는 '좋아하고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사는 삶을 꿈꾸던 사람이었다. 여기서 ‘좋아하는 일’은 단순히 ‘좋아하는 감정’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삶’에 대한 갈망이었다. ‘일’은 그저 그것을 실현하는 하나의 수단일 뿐. 그렇기에 더더욱 지금의 삶이 진정으로 행복한가? 에 대한 질문을 해야 했다.


2. ‘나의 것’이 있는가 그리고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가?

무턱대고 퇴사를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배우고 경험하고 도전해 보겠다는 이유로 무작정 퇴사를 하기에는 나는 이미 내 삶을 책임져야 하는 무게를 어깨에 한가득 짊어진 성인이었다. 그래서 더더욱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현실적으로 퇴사 후 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해, 그토록 내가 꿈꾸던 나의 일을 할 수 있는가 없는가에 대해 따져봐야 했다. 그리고 이 질문은 단순히 현실적인 가능성을 넘어서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가에 대한 질문과도 맞닿아있었다. 일시적으로 회사에 권태를 느껴 퇴사를 하려고 하는 것이라면 다시 한번 고려야 봐야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퇴사를 ‘회사가 싫다’는 이유로 선택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였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어야 했다. 다행이도 ‘나의 것’에 대한 확신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것을 간절히 원하는가’라는 질문에 'yes'라고 답한 순간 나는 직감적으로 알았다. 이것이 내 인생에서 처음이자 마지막 퇴사가 될 것이라는 것을.


이렇게 퇴사를 마음먹고 몇 개월간 이런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반복하고 반복했다. 마음의 결정은 이미 내린 상태였다. 단지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단단히 만들기 위한 준비 시간이.


확실한 것은 나는 지금과 같은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나의 심장이 반응하는 곳으로 향해 살고 싶었다. 무엇보다 나의 일, 그것을 너머 삶의 의미를 찾고 싶었다.


퇴사 처리는 빠르게 진행됐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 쬐는 한 여름날, 나는 직장인의 수식어를 2년 반 만에 벗어던졌다. 진짜 내 일을 시작할 때였다.


본능적으로 느꼈다. 이제는 진짜 뜨거움을 마주할 때라는 것을. 눈앞에 펼쳐질 새로운 삶의 질문에 답할 시간이 왔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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