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 그리고 흔들리는 정체성
첫 번째 이직.
단순히 월급을 벌기 위해 입사한 곳은 경력을 무시당한 채 신입으로 시작해야 했다.
급여는 신입이었지만 업무 능숙도는 대리급보다 더 뛰어난 사무직 스킬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여기서 인정받고 새롭게 경력을 쌓으면 될 테니까.
하지만 그 꿈은 회사 내부 직원들 간의 마찰로 또다시 산산조각이 났다.
억울함이 가슴을 메웠다. 도대체 내가 뭘 그리 잘못했는데, 트러블 메이커라는 소리를 들어야 했을까.
어느 누구를 봐도, 직장 내에서 롤모델을 삼을 수 없었다.
결국 6개월 만에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고 또다시 월급을 밀리지 않고 제때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직했다.
그리고 그곳에서도 얼마 안 있어 구조조정으로 일을 할 수 없게 되었다.
받은 퇴직금도, 모아둔 돈은 이미 없어진 지 오래.
서른이 넘어서 엄마한테 다시 손을 벌려야 하는 처지가 된 나 스스로가 너무 한심했다.
또다시 노트북 앞에 앉아 자기소개서를 쓰기 시작했다.
"너는 누구야? 너가 잘하는 것은 뭐야? 그동안 경력을 통해 무엇을 얻었어?"
기업에서 혹할 만한 역할을 기반으로 글을 써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나를 찾지 못한 채, 나는 계속 역할로만 존재했다.
그렇게 어렵사리 들어간 4번째 직장에서 나는 역할로서 만족하며 일을 했다.
나름 성취감도 있었고, 인정도 받으면서 이대로 쭉 이렇게만 일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어디 그리 인생이 쉽던가.
35살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이틀 만에 아이의 청각장애 사실을 알았을 때,
세상이 무너지는 듯했다. 아이를 낳은 기쁨보다 엄마의 역할로 더 큰 책임감과 부채감에 짖눌려,
나는 그나마 있던 조그마한 '진짜 나'를 스스로 놓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끊임없이 흔들렸다.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 모든 질문들이 나를 괴롭혔다.
하지만 동시에 이 질문들이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매번의 이직은 나에게 새로운 도전이었고, 각각의 실패와 좌절은 나를 조금씩 단단하게 만들어갔다.
그리고 아이의 청각장애 진단은, 비록 그 순간에는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인생을 완전히 새로운 방향으로 이끄는 전환점이 되었다.
이 모든 경험들이 나를 '진짜 나'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때는 몰랐지만, 이 모든 순간들이 나의 진정한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이었다.
역할에 갇혀있던 나는 이제 서서히 깨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깨어남은 나를 완전히 새로운 세계로 인도하게 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