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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론 Mar 23. 2024

백팩커스에서의 8일

삶을 위해 떠나온 여행

20대 초반도 아닌데 도미토리에서 잘 수 있는 건가?

호주 워킹홀리데이를 떠난 사람들의 수기를 한없이 읽다가 대부분이 임시 숙소로 백팩커스에서 머문 내용을 보며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야 20인실 혼성 방에서도 머물러본 적이 있지만 한껏 떨어진 체력과 나이와 함께 쌓인 예민함이 버텨줄지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돈을 좀 더 써서 4인실로 방을 정하고 체크인을 했다.

그리고 길다면 긴 8일의 시간을 놀랍도록 무사히 보냈다. 사실 무사히라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정도로 잘 지냈지. 고마운 추억이 많다.

첫날 저녁 옆침대에 한국인이 있었고, 마침 동갑에 워홀러여서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이 친구는 이미 호주에서 1년 머물며 다음 비자를 위해 입국한 상태라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다. 이 친구에게 '너 정말 대책 없구나!'라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정보 없이 온 내게 정말 빛과 소금 같은 인연이지 뭐야.


반가운 것은 한국인이지만, 사실 호스텔의 꽃은 외국인과의 교류가 아니겠는가.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스코틀랜드에서 온 분이었다. 내 침대의 1층에는 아마도 부모님 뻘은 되어 보이는 분이 자리를 잡고 계셨다. 그분은 딸을 보러 홀로 호주에 온 어머니로, 그 사이에 미국도 들르며 긴 여정을 소화하고 있는 상태였다. 세상에. 엄마 생각이 났다. 호주에 꼭 놀러 오라고 하면 혼자 비행기 타고 외국 가는 게 무섭다는 우리 엄마. 물론 국적을 고려할 때 이 분은 언어 장벽이 없어서 더욱 편했겠지만, 그래도 혼자 대륙을 휙휙 횡단하고 4인실 방에서 처음 보는 동양인 여자애에게 먼저 살갑게 말을 거는 장년 여성이라니.

동시에 내가 좀 부끄러워졌다. 겨우 서른 살 먹고 백팩커스와 나이를 연관 지어 걱정하다니 웃기는 짓이었다. 나도 커서 저렇게 돼야지.


그러다 보니 호스텔에서 지내는 동안 나는 외롭지 않았다.

남과 함께 쓰는 방이라는 게 참 장단점이 확실해서, 불편함을 감수하는 만큼 또 채워지는 것들이 있었던 거다. 방에는 늘 사람이 있고 그래도 외로우면 공용 주방에 내려가면 됐다. 거기에는 늘 따뜻한 음식 냄새와 이야기소리가 있으니까. 공용 공간에서 노트북을 켜서 이력서를 작성하면서, 카운터에서 틀어주는 올드 팝 플레이리스트를 속으로 따라 부르는 게 꽤 재밌기도 했다.

We travel not to escape life
But for life not to escape

잘 있다가도 문득, 너무 멀리 도망친 건지 의문이 드는 순간들이 있다.

그때마다 호스텔에서 배운 이 문장을 되새겨보려고 한다. 삶에서 도망치려고 여행을 하는 게 아니라 삶을 위해 여행을 한다는 것을 잊지 않는다면 앞으로 1년을 값지게 보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은 그런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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