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sparrow Oct 29. 2024

엄마의 밥



엄마 하면 떠오르는 것. 그냥 엄마의 밥. 자식 삼시세끼 굶지 않게 하는 밥상. 눈물부터 나려 하는 데 잠시 울음을 삼키고 생각하면 엄마의 굽은 마디마디 손가락이 떠오른다. 너무 감상적으로 쓰려고 이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우리 엄마는 팔 남매의 맏이로 전쟁이 끝나고 가난했던 1952년 전라북도 정읍. 정확히는 태인에서 태어났다. 4남 4녀의 첫째 딸로 태어나 궂은 집안일을 하며 동생들을 고등교육 시키고 대학도 보내고 본인은 가족이 밑거름이 되기로 작정하고 중학교까지 밖에 다니지 못했다. 엄마의 엄마인 외할머니는 아이를 여덟이나 낳고도 집안일에는 관심이 없고 마실 나가 수다 떨고 노는 것을 좋아해서 막내로 갈수록 엄마가 동생들을 업어 키워야 했다고 한다. 인순. 여성으로서 참고 인내하는 삶. 엄마의 이름대로 그렇게 한평생을 사셨을 것이다. 그 시절은 장남에게는 한 없이 퍼주고, 여자형제에게는 한없이 야박했던 시절이 아니었던가.      


한 명의 가난하고 재능 많고 똑똑했던 여자는 결혼까지 외할머니의 뜻을 거스를 수 없어서 본인은 원치 않는 남자와 1979년 결혼을 하게 된다. 그래서 삼 남매를 낳았고, 셋을 키우기 위해 손이 부서져라 정성스레 밥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사춘기가 될수록 딸들은 참고 인내하는 엄마팔자를 닮기 싫어했고, 엄마의 밥도 등한시했다. 우리가 요즘 돌봄 노동이라 부르는 무척이나 고생스럽고 값지고 고운 마음을 거부했다. 우리 1980년대 생들은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뭐든 빠르것, 알록달록한 신식물건, 그놈의 혀끝이 맛있고 하는 그런 자본주의와 돈으로 뭐든지 선택할 수 있는 자유의 달콤함에 빠져버렸다.      


혼란스러운 세월은 보낸 나는 지금 40대 중반이 되어 다시 엄마의 밥을 떠올린다. 엄마의 그 밥이 주는 온기와 자식을 위한 절절한 마음, 신을 향한 기도의 애틋함을 느끼며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식물을 기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