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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Jun 11. 2024

교화란 가능할까?

<13.67>을 다시 읽고 있다.

세 번째 사건에는 흉악범의 탈주가 등장한다.


경찰 조직에서는 누구나 그와 같은 인간쓰레기가 교화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복역 태도가 양호하다고 해서 마음을 놓았다는 것은 분명 징교서의 책임이다. (360쪽)


과연 그럴까?

이것이 교도소 측의 잘못이라고 단정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적어도 극악한 흉악범은 교화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는 사형 제도를 반대하지만, 악인이 교화될 수 있다는 믿음 때문이 아니라, 잘못된 판단으로 되돌릴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는 이유에서 반대한다.

교화될 수 있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많은 악인들이 교화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사람이라는 생명체가 자아를 유지하는 방식은 결국 자기동일성을 유지하는 방법을 통해서다.

뉴런의 연결에 불과한 시냅스가 자아의 정체라는 사실은 다소 아쉽지만, 그게 사실이다.


시냅스는 숲에 길이 생기는 것과 같은 원리로 유지된다.

계속 풀을 밟아 길을 만들어야 길이 유지되는 것이다.

시냅스는 수많은 발화를 통해 스스로를 유지하고, 그것이 소위 말하는 '성격'이 된다.


성격이란 것은 결국 반복과 습관의 결과지만,

그 반대 방향으로도 작용한다.


그렇게 형성된 성격이란 것은 자아의 대단히 중요한 일부이기 때문에,

자기 강화의 사이클을 다시 돌리는 것이다.


평생 불법적인 행위로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온 사람이, 과연 그 손쉬운 길을 포기할 수 있을까?

교도소라는 가혹한 환경에서 그는 과거를 후회하고, 밖에 나간 후에는 법을 지키며 착하게 살 것이라 다짐한다.


그러나 일단 밖에 나온 다음에는 생각이 바뀔 가능성이 크다.

교도소라는 가혹한 환경이 제거되었기 때문이다.


너무 긴 이야기가 되었지만,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꾸준히 악인들에게 노출된 경찰들이 악인의 교화를 믿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바로 이 지점에서 교도관들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할 수 있다는, 아니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교도관들은 그 악인들과 함께 생활해야 한다.

매일 부딪혀야 하는 그들이 교화될 수 없다고 믿는다면, 과연 그들이 그 직업을 유지할 수 있을까?

하루하루가 너무 힘겨울 것이다.


교화될 수 없다고 믿는 악인들을 매일 상대해야 한다면, 늘 분노 상태로 있어야 할까?

늘 긴장 상태에 있어야 한다면 언젠가는 미쳐버리고 말 것이다.


따라서, 교도관들은 자신들이 감호 중인 악인들이 교화될 수 있다고 믿어야 한다.

경찰들이 사건 해결을 위해서, 즉 자기 삶을 조금 더 쉽게 만들기 위해서 그 반대를 믿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 <13.67>을 보자.

교도관들이 과연 마음을 놓아 흉악범을 놓쳤는지, 즉 교도관 쪽에 과실이 있었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저 문장은 분명 문제가 있다.

자기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단정하기 때문이다.


소설에는 저 문장이 누구의 생각인지 분명히 나오지 않는다. (차이 독찰일 가능성이 제일 크기는 하지만.)

그러나 나는 저 문장이 유쾌한 관전둬의 머릿속에서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라 믿는다.


“조장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회의실에는 차이 독찰과 관전둬 두 사람만 남았다.  
“생각이라, 지금은 별거 없네.” 관전둬가 어깨를 으쓱했다. “의견이라면 하나 있지만.”  
“어떤 의견입니까?”  
“자네는 지금 점심을 먹는 게 좋겠어. 30분만 지나면 진술기록과 감시카메라 영상이 도착할 테니 그때가 되면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걸. 저녁까지 정신없이 바쁠 걸세.”  
관전둬가 슬쩍 웃으며 차이 독찰의 어깨를 두드렸다. (242쪽)


이게 관전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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