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점 5/5] 찬호께이, <13.67>
*** 강력한 스포일러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
오프닝 잡담
처음에는 <여포보다 관우>라는 제목으로 글을 쓸까 생각했다. 관전둬는 관씨, 뤄샤오밍은 뤄씨다. 뤄씨가 뤼(Lu)씨가 아닌 것은 아쉽지만, 뭐 억지 좀 쓴다고 누가 뭐라 하겠는가. 계급도, 머리도 관전둬가 뤄샤오밍보다 몇 수 위다. 2천 년 가까이 시간이 흐르고, 관우는 호로관의 굴욕을 되갚는다... 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하지 않다. 이 엄청난 소설을 이제야 알게 된 것이 원통할 뿐이다. 추리 소설도 스릴러도 쏟아지지만, 이런 책을 만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거꾸로 일대기
시간을 역순으로 달리는 구성은 종종 보인다. <메멘토>, <박하사탕> 등 영화가 그런 구성을 따른다. 플래시백이 아니라, 그냥 에피소드가 시간의 역순으로 나열되는 구성은 아무래도 뭔가 의도가 있다고 봐야 한다. <메멘토>의 경우 단기 기억 장애를 가진 주인공의 진실이 드러나야 하기 때문이고, <박하사탕>의 경우 세월의 침식에 잔뜩 오염된 주인공의 자아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조금씩 세탁되는 모습을 보여준다. 물론 <박하사탕>의 경우에도 주인공이 왜 그렇게 타락하게 되었는가라는 진실을 보여주려는 의도 역시 존재한다.
반면, <13.67>에는 시간을 거슬러 드러나야 할 진실 따위는 없다. 주인공 관전둬는 첫 번째 에피소드가 시작할 때 이미 혼수상태고, 에피소드가 끝나기 직전에 사망한다. 천재 형사 관전둬의 활약상이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며 소개되는 것이, 이 소설의 전개다. 시간을 거스르는 이 전개에 특별한 이유는 없다.
이유가 없을 뿐, 효과는 있다. 죽음에서 시작하여 관전둬의 파릇파릇 신입 시절까지 올라가는 이 여정은 <벤자민 버튼>을 연상시킨다. <벤자민 버튼>에서 우리는 시간이 지나며 젊음을 되찾는 주인공을 보며 흐뭇한 행복감을 느끼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안과 두려움을 느낀다. 몇 살이 되어야 삶이 끝나는지 알 수 없는 보통 사람들과 달리, 벤자민 버튼의 삶은 그가 0세에 도달하면 확실하게 끝난다. 그래서 우리는 점점 젊어지는 그를 보면서도 곧 그를 떠나보내야 한다는 사실에 불안하다.
<13.67>에서 시간을 거꾸로 달리는 관전둬를 보며 우리가 느끼는 감정도 이와 비슷하다.
반전 대폭주
이 소설은 6개의 독립적인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한 인물의 일대기이기 때문에, 에피소드를 넘어 연결되는 사람들과 사건들이 존재하지만, 모든 에피소드는 자체로 완결된다. 다시 말해, <셜록 홈즈의 모험>과 마찬가지로 이 소설은 단편 모음이다. 그리고 그 단편들의 제일 현저한 특징은 몇 겹의 반전이다.
첫 에피소드에서부터 반전과 반전이 이어진다. 사건의 진상 자체도 반전이지만, 첫 에피소드에서 가장 눈을 끄는 수사 기법 자체도 반전이다. 그리고 내게는 관전둬가 정말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나름 놀라웠다.
가장 마음에 드는 에피소드는 인간미가 넘치는 두 번째 에피소드 <죄수의 도의>, 그리고 스릴 넘치는 전개를 보여주는 네 번째 에피소드 <테미스의 천칭>이었다.
캐릭터 과잉
<셜록 홈즈> 시리즈가 추리소설 계의 왕좌를 아직까지도 차지하고 있는 이유가 뭘까? 나는 캐릭터성 때문이라 생각한다. 과학적 추리 방법도, 관찰을 통해 추리하는 기법도, 범죄자의 과거가 눈물샘을 자극하는 것도 <셜록 홈즈>가 처음은 아니다. 그러나 괴짜 천재와 모범생 사이드킥의 조합은 <셜록 홈즈>가 처음이다. 이 모든 특징은 이후의 수많은 추리 소설에서 마치 공식처럼 이어지고 있다. 심지어 레스트레이드 경감 역할도 대개의 추리 소설은 따라한다.
나는 피터 스왠슨의 소설을 대단히 좋아하는데, 그가 풀어내는 스토리가 흥미로워서가 아니다. 그의 캐릭터가 가지는 놀라운 흡인력 때문이다. 캐릭터 하나만 잘 만들어도, 소설을 살아 날뛰게 할 수 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릴리나 <사일런트 페이션트>의 테오가 바로 그런 사례다. 그런 살아 날뛰는 캐릭터가 <13.67>에는 차고 넘친다.
주인공 관전둬와 뤄샤오밍은 당연하고, <죄수의 도의>의 줘한창, <테미스의 천정>의 TT, 그리고 <빌려온 시간>의 화자(의 정체는 스포일러)까지 캐릭터의 입체감이 하늘을 찌른다. 주인공 두 사람이야 그렇다 해도, 에피소드 하나(또는 둘)에만 출연하는 캐릭터에게 이 정도의 완성도를 입혀줄 여유가 있을 정도로 작가의 재능은 차고 넘친다.
홍콩
소설 소개에도 나오듯이, 이 소설의 매력 포인트 중 하나는 배경이 되는 도시 홍콩이다. 1967년부터 2013년까지의 홍콩, 바로 이 시간과 공간이 아니라면 맛볼 수 없는 현장감이 이 소설을 휘감고 있다. 자본주의의 최첨단을 달리는 도시, 일부 산업을 마피아가 지배하는 도시, 여러 개의 언어가 공존하는 도시, 주권 반환이 예정된 불확실성의 도시, 그리고 제국주의의 마지막 증인으로 세계 최대 사회주의 국가의 끝자락에 위치한 도시.
그 도시의 번화한 거리와 뒷골목을 현지 친구의 가이드로 여행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