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히말 Jun 13. 2024

니체가 비처럼 쏟아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니체를 좋아한다

밀리의 서재에서 니체를 검색하면 무려 190권의 책이 검색된다.

과연 니체답다. 매우 비범하다.


니체의 책은 아포리즘, 즉 함축적인 짧은 경구로 유명하다.

이런 문구를 하나 옮겨 적은 다음, 그걸 이리저리 굴려보면 글 한 꼭지는 비교적 수월하게 쓸 수 있다.


니체에 관한 책이 이렇게 많은 이유다.


- **의 나이에 다시 읽는 니체

- **도 알아야 하는 니체

- 니체에게 물어보는 **의 지혜

- 니체가 알려주는 *** 잘 하는 법


그러나 니체는 독서를 혐오한다고 말한 적이 있다. 


나는 독서에 열중하는 한가로운 사람을 증오한다. 우리의 한 세기가 독서로 물들었더라면 정신이란 단어의 뜻은 악취였을지도 모른다. 우리 시대의 유행어인 누구나 독서를 생활화할 수 있다는 말은 결국 어느 시기가 되면 누구나 쓸 수 있다는 말로 바뀔 것이고, 그때부터 인간의 생각은 엉망이 될 것이다. (<혼자일 수 없다면 아갈 수 없다>, 221쪽)


니체의 독설은 적절히 걸러 들어야 한다.

요는, 책만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는 말이고, 즉 다독뿐 아니라 다상량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그러나 니체가 ('누구나 쓰는') 양산형 책을 혐오했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지금 쏟아져 나오는 니체 팔이 책들을 본인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명확하다.


좀 덜 못돼 보이는 사진으로 골라봤다



***


양산형이라는 점을 제외하더라도, 이런 식의 책은 좀 위험하다.

오해 때문이다. (사르트르-하이데거 식으로 오해의 결과가 멋지게 나올 수도 있겠지만.)


어떤 문장을 해석하는 데 있어 문맥이 중요한 것은 당연하다.

그런데 니체는 아포리즘의 대가다.

문맥이란 것이 근처에 있지 않다.

따라서 니체의 텍스트 전체를 보면서 그 의미를 생각해야 한다.


그런데 양산형 니체 팔이 책들은 대개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게다가 니체는 그다지 체계적인 철학자가 아니다.

자기 모순이 많다.


***


간단한 테스트를 하나 해보자.


니체 사상의 핵심은 초인이고, 초인은 범인과 다르게 행동한다.

그래서 그는 혼자다, 내지 혼자가 되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1. 우리는 초인이 되어야 또는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2. 초인은 혼자다, 내지 혼자가 되어야 한다.


이걸 엮으면, "우리는 혼자가 되어야 한다"라는 명제가 성립한다.


이는 물론 니체만 주장한 것이 아니다.

불교 철학이 내세우는 대표적인 주장도 이것이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걸 두고 니체가 불교 철학과 상통한다는 식으로 말한다면 크나큰 오해다.

적어도 내가 이해하는 차원에서, 둘은 그 의미가 전혀 다르다.


니체는 고통으로 가득한 삶으로부터의 구원으로 초월을 제시했지만,

그것은 "대중으로부터 거리두기"에 가깝다.

아라한의 자비심과는 약 300만 광년 정도 떨어져 있는 얘기다.


다시 말해, 불교 철학에서 혼자 되기는 깨달음을 얻은 후 대중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라면,

니체의 혼자 되기는 오염원으로부터 떨어져 스스로를 정화하기 위한 것이다.


초인(비범인)과 범인의 구별이라는 명제에 너무 집착하여 과오를 저지른 유명한 인물이 바로 라스콜리니코프 아니던가. (과오를 저질렀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비슷한 사례가 비질란테다.)


잘못된 해석을 실행으로 옮긴 더 무서운 인물로는 히틀러도 있다.



***


니체는 위험한 철학자다.

이해든 오해든, 나치는 니체 철학의 냄새를 강하게 풍긴다.

직접 만나봤다면 혐오했을 것이 분명한 쇼펜하워를, 니체는 빠돌이처럼 숭배했다.

(독서를 혐오한 니체가 쇼펜하워 책을 제대로 읽었는지도 의심스럽다.)


니체 사상은 모순되는 점도 많고 체계적이지 않다.

아폴론적 이성 제일주의에 대항하여 디오니소스를 숭배한 것은 나쁘지 않지만, 

정교한 사고에 비해 직관이 우월하다는 생각은 얕은 생각의 결론일 뿐이다.


AI 과학이 알아낸 중요한 결론 중 하나는,

인간의 직관이라는 것이 사실은 그저 패턴 인식이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니체는 생각하기 귀찮아서 정교한 사고 대신 직관을 선택한 것이다.

아니, 귀찮아서라기보다는, 아파서 그렇게 못 한 것이다.


나는 니체를 좋아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멋있어 보이는 현상과 큰 관계가 있다.

불교의 화두와 선문답이 멋있어 보이는 것과 같은 이치다.

강신주의 무문관 강의, <매달린 절벽에서 손을 뗄 수 있는가>를 읽고 나서 그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교화란 가능할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