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김혜숙, <인식의 대전환> (3)
순수이성의 한계
칸트의 철학하기가 순수이성에서 실천이성으로 도약하는 데 있어, 이성이라는 개념의 정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오성이 규칙을 매개로 현상을 통일하는 능력이라고 한다면, 이성은 오성의 규칙들을 원리들 아래로 통일하는 능력이다. (순수이성비판 B359, <인식의 대전환> 238쪽에서 재인용)
오성의 개념을 범주라고 부르듯 이성의 개념을 이념이라 부르는데(253쪽), 이념이란 객관적 실재성과 전혀 관련이 없는, 지식의 체계성을 도모하기 위한 하나의 기능에 불과하다(255쪽). 그런데 이성은 사고를 계속 진행하여 끝까지 나아가 전체성에 도달하려는 경향을 갖는다(89쪽).
예를 들어보자. 숫자라는 것은 인간의 발명품이지만, '수'라는 것은 오성의 개념, 즉 범주에 존재한다. 즉, 우리가 세계를 인식하기 위한 도구로서 우리에게 선험적으로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인류는 이 수라는 것을 가지고 유희를 시작했고, 결국 수학이라는 것을 만들어 냈다. 피타고라스 학파는 무리수의 존재를 거부하며 무리수를 발견한 제자를 물에 빠뜨려 죽였고, 칸토어는 무한과 무한을 비교해서 어떤 무한은 다른 무한보다 더 크다는 것을 증명하기도 했다. 현상 인식의 도구 자체에 대해 생각을 이어나가, 어떤 전체성에 도달하려는 것이다. 대체 수란 무엇인가, 하는 질문이 그것이다.
오성이라는 질서 없이 현상 인식, 즉 감성의 종합이 불가능하듯, 이성 없이는 오성이 체계적으로 정리될 수 없다. 그래서 이성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오용되어서는 안 된다.
이성의 개념들, 곧 이념들이 우리의 인식에 대해 필연적인 역할을 하지만 적극적으로 사용되는 경우 모순과 불합리함에 빠지게 되기 때문에 특정한 역할, 즉 통제적 역할만을 갖는 것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234쪽)
수라는 것은 현상 인식에 반드시 필요한 범주로서 반드시 필요한 도구지만, 그 도구를 마치 물자체나 현상처럼 생각하여 탐구하는 것은 애초에 어불성설이라는 것이다. 그런데도 인간의 마음은 생각을 끝까지 밀고 가는 천성 때문에 그렇게 하려는 경향을 보인다. 마치 '수'라는 이데아가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칸트는 철학하기가 바로 이런 함정에 빠질 수 있음을 경고한 것이다.
그럼에도, 순수이성의 효용
칸트는 바로 이러한 이성의 한계가 현실적 장벽을 만났을 때 발생하는 개념을 세 가지로 정리한다. 생각하는 주관으로서의 자아, 현상 계열의 총괄로서의 세계, 그리고 모든 가능성의 총괄로서의 신이다(277쪽).
우리는 감성을 통해 현상을 감각하지만, 시간적, 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현상을 모두 총괄하는 경험을 할 수 없다. 그러나 우리는 '세계'라는 말을 사용한다. 그것이 물자체는커녕 현상의 총괄을 의미한다 해도 우리에게는 절대 닿을 수 없는 것인데도 말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이성의 주체로서 자아를 상정하고, 그 어떤 제약성도 없는 존재로서 신을 상정한다.
결국 이 개념들은 한갓 이성의 이념들이며, 실재성이 없다. 그럼에도,
이성이 절실히 추구하는 것이라면, 그것들의 중요성은 원래 오직 실천적인 것에 관계하는 것이다.(B828, 이 책 353쪽에서 재인용)
따라서 인간은 현상계와 분리되어 순수이성의 대양에서 헤엄칠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그 과정에서 결국 실천이성을 절절히 필요로 하게 되어버리고 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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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족 하나. 좋은 책 읽을 기회를 주신 21세기북스 출판사에 감사드립니다.
사족 둘. 몇 년 전 제가 칸트 해설서와 씨름한 (허접한) 결과를 다음 글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https://brunch.co.kr/@junatul/8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