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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히말 Apr 05. 2023

칸트를 읽다

[책을 읽고] 김상환, <왜 칸트인가>

<시간여행>을 읽던 중이었다. 저자가 주장하는 새로운 3차원주의에 칸트가 필요하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저자의 새로운 개념은 뉴턴의 절대시공간에 라이프니츠 시공간의 관계성을 가미한 것이므로, 칸트가 불필요했다. 그러나 저자는 단호하게 말한다.


물자체와 현상계를 구분하는 칸트의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시간, 공간, 원자, 쿼크 등 모든 과학적 대상이 실재하는 것이냐 아니냐 하는 본질적인 물음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시간여행>, 438쪽)


물자체라는 것이 존재한다고 가정하면, 우리가 인지하는 우주가 물자체가 아니라는 것, 따라서 우리가 인지하는 우주에 뭔가 다른 이름을 붙여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단지 그것 때문에 칸트가 필요하다는 것은 조금 과해 보인다. 뭐라 이름을 붙이든, 칸트의 현상계에 대응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현대 인식론에서 당연하다. 주장하려는 것에 태양과 지구의 상대적 운동이 포함된다고 해서 코페르니쿠스라는 크레딧을 굳이 달아야 하나? 상식인데 말이다.


각설하고, 이 책을 읽다보니 내가 칸트 철학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리디에서 칸트를 검색하니 딱 한 권이 나왔다. 서가명강 시리즈의 <왜 칸트인가>라는 책이다. 서문에서부터 저자는 자신이 칸트 빠돌이이며, 칸트 전공은 아니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책은 매우 깔끔했다. 역시, 사람은 전공보다는 좋아하는 것을 더 잘하는 법이다.


책은 칸트의 3대 비판서를 순서대로 다루고 있다. 읽고 나니, 칸트 철학 체계를 잘 조망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3개 비판서를 진, 선, 미라는 3개의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칸트 철학이 왜 이 방향으로 진화했는가에 대한 논의는 많지 않다. 그러나 이 책을 읽고 나니, 칸트의 철학적 탐구가 하나의 잘 짜여진 구조물 같은 느낌이 든다. 칸트는 인식의 문제에서 출발하여 다른 길로 새버린 것 같은 느낌이 들지만, 사실 그는 그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해보자.



순수이성 비판 - 진


<순수이성 비판>은 진리에 관한 것이다. 인식론이다. 칸트는 인간의 인식 능력을 감성(sensibility), 지성(understanding), 상상(imagination), 이성(reasoning) 등 네 가지로 나눈다. 사족이지만 우리 철학계는 오랫동안 understanding을 오성이라는 괴랄한 단어로 번역해 왔다. 문제는 이게 너무 오래 돼서 이제는 당연해 보인다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지성이라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understanding을 떠올리느라 참 힘들었다.


감성은 감각 직관이다. 문제는 칸트가 시간과 공간에 대한 인식을 바로 이 차원에서 설명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시간과 공간은 감각 직관의 형식이다.


지성은 입력을 해석하는 우리의 시스템이다. 감성이 입력장치라면, 지성은 CPU 정도로 생각하면 될 것 같다.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10개 범주에 2개를 추가하여 지성의 12범주라는 것을 만들었는데, 그 당시 자연철학(과학) 수준에서는 이런 괴담이 말이 되었는지는 몰라도, 현대인인 우리가 신경 쓸 얘기는 아니라고 본다. 단지, 이렇게 생각하는 방법도 있구나, 하는 차원에서는 읽어볼 만하다.


상상력은 종합하는 능력이다. 칸트가 대표하는 철학을 독일 관념론이라고 말할 때, 그것이 대륙의 합리주의와 영국의 경험주의를 <종합>한다고 말할 때, 바로 그 종합이 상상력의 작용이다. 인간은 백지(타불라 라사) 상태가 아니라, 어떤 시스템을 가지고 입력 데이터를 받아들이는데, 그 중간에 매개가 필요하다는 것이 칸트의 판단이다.


상상력은 양쪽으로 작용한다. 감성에서 지성으로 이어지는 것이 종합(synthesis)이라면, 그 반대 방향으로 이어지는 길은 도식화(schematization)다.  즉 종합은 외부 입력을 해석하는 것이고, 도식화는 마음속에서 외부 현상계를 상상하는 것이다.


이성은 추론하는 능력이다. 추론하는 이유는 체계를 만들기 위해서다. 이성의 기능은 체계화이고, 그 구심점은 이념(idea)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이념이란 물론 플라톤이 말한 이데아의 연장선에서 생각해야 한다.


문제는 칸트가 이념, 즉 이데아의 종착점으로 영혼, 우주, 신이라는 3개의 개념을 제시했다는 점에 있다. 칸트가 살았던 시대를 생각하면, 신이나 영혼이라는 개념이 등장하는 것이 당연하다. (버클리의 창의적인 인식론조차도 그 종착점은 신 아니었던가.) 그러나 신이라는 개념은 <실천이성 비판>과 <판단력 비판>을 예고한다는 점에서 더 중요하다.


<순수이성 비판>에 등장하는 칸트의 천재성은 물론 물자체의 세계와 현상계를 분리한 점에 있다. 그러나 칸트는 또한 흄의 비관론을 극복하기도 했다. 흄은 인과성 결합에 대응하는 감각적 인상이 없으므로, 즉 인과개념이 객관적 실재성을 결여하므로 인과법칙의 보편타당성을 부정했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너무나 훌륭한 결론이다.) 칸트는 이에 대해, 인과 개념이 지성의 선험적 범주라고 지적한다.


물론 나는 이게 과연 극복인가 하는 생각이 든다. 흄이 말했던 것은 인과성이라는 것이 인간 지성의 환상이라는 점이다. 칸트도 같은 말을 했다. 흄이 부정적 뉘앙스로 말한 것을 칸트는 긍정적 뉘앙스로 말했을 뿐이다. 나는 칸트 철학의 허술함이 바로 이런 지점들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한다. 칸트가 인식론적 고뇌를 꽤 극단적인 지점까지 끌고 간 것은 사실이나, 풀기 어려운 수수께끼를 만나면 그는 그냥 어물쩍 넘어가버린다. 이 부분이 칸트와 후설의 차이점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칸트는 경험에 대한 자신의 시초적 분석이 철저하다는 가정에서 진행한다. 그러나 이는 물론 완벽하게 근거 없는 것이다. (<틸리 서양철학사>, 제16장, 1036쪽)



실천이성 비판 - 선


난 사실 <순수이성 비판> 외의 칸트 철학에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책을 일단 읽기 시작했으므로 끝까지 읽었다.


최근에 읽은 어떤 책에서, 현대 사회는 <의무>를 중심으로 하는 도덕 체계로 대처할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났고,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주장했던 <덕>을 중심으로 하는 도덕 체계로 회귀해야 한다는 주장을 본 적이 있다.


칸트는 그 반대의 주장을 했다. 덕이 아닌 의무 체계로 윤리학이 정립되어야 한다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주장이었다. <덕>을 중심으로 하는 윤리관은 말하자면 착한 사람이 <되자>라는 논리다. 반면, <의무>를 중심으로 하면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가 중심이 된다. 전자가 소규모 공동체 사회에 적합하다면, 후자는 근대 도시 사회에 적합하다.


그렇다면 왜 이런 논의가 필요한가? 즉 윤리학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하는 질문이 따라온다. 칸트는 그것이 자유를 위한 것이라고 답한다. 자유란, 순수이성이 선험적으로 알고 있는 유일한 이데아다. 자유는 자연의 인과성과 다른, 인간만이 개시할 수 있는 인과성의 시작점이다.


표현이 거창해서 그렇지, 이것은 사실 뻔한 얘기다. 자유 의지가 없다면 우리가 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가 하는 고전적 질문에 대한 답이기 때문이다. 칸트는 신이 존재함에도 우리가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 했다. 그래서 자유를 순수이성이 이미 품고 있는 유일한 선험적 이데아라고 말한 것이다. (자유라는 단어를 들으면, 도덕과는 담 쌓은 인물인 조르바가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나뿐인가?)


이런 내 생각은 칸트에 대한 저자의 설명에 의해 지지된다.


칸트는 <실천이성 비판>에서 자유의 객관적 실재성을 증명하려 하지 않는다. (137쪽)


다음은 그 유명한 정언명령이다. (정의론이라는 하위 카테고리를 제외하면) 윤리학의 양대 산맥은 벤담의 공리주의와 칸트 철학이다. (밀은 필요없다.) 전자가 윤리적 행동에 근거를 제공하려 한 반면, 칸트는 그냥 하라는 입장이다. 그것은 정언명법이 우리의 이성에 선험적 규칙으로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칸트에게는 미안하지만, 이건 순환논리다.


다만, 나는 이 책에서 <철학하기>의 정수를 보았고, 그래서 칸트를 존경한다. 정언명령이라는 것이 어떻게 옹호되는가를 살펴보자.


칸트의 용어로 하면 정의로운 법은 누구에게나 보편적이어야 한다. 그리고 보편적일수록 법은 어떤 내용을 가져서는 안 된다. (144쪽)


여기에서 딸려나오는 결론이 그 유명한 "오로지 선의(good will)만이 절대로 선하다"는 칸트의 명제다. 이제는 순환논리를 넘어 동어반복이다. 그러나 칸트가 왜 이렇게 주장해야 하는지는 알 것 같다. 보편적인 도덕법칙은 어떤 구체적인 내용을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의지는 관념에 불과한 표상을 현실적인 어떤 것으로 생산하되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으로 타당한 입법의 조건에 따라 생산하는 능력이다. 칸트가 말하는 정언명법이란 그런 의지를 규정하는 보편적 입법의 형식적 조건을 가리킨다. 거꾸로 의지는 그런 정언명법에 따를 때만 선하다는 자격을 얻는다. (145쪽)


궤변이기는 해도, 칸트의 정언명령은 이런 식으로 생각할 때, 적어도 말은 된다. 다시 말하지만, 이 책을 읽고 나서 칸트에 대한 나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 칸트 철학은 진리에 부합하지는 않으나 내적 정합성을 갖춘, 아름다운 소설에 불과하다. 다만, 그가 보여준 <철학하기>의 방법에 나는 존경을 보낼 뿐이다.



판단력 비판(1) - 미


판단에는 두 가지가 있다. 보편적인 것에서 구체적으로 나아가는 규정적 판단, 그리고 그 반대방향인 반성적 판단이 그것이다. 판사의 판단은 전자에 속하고,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수도 없이 행하는 어림짐작은 후자에 속한다. 


<순수이성 비판>의 지적 판단이나 <실천이성 비판>의 도덕적 판단은 모두 규정적 판단이다. 즉, 규칙을 사실에 적용한다. 반면, <판단력 비판>이 다루는 반성적 판단은 상향적이다. 사실에서 규칙을 추론한다. 반성적 판단을 칸트는 또 두 가지로 나누었다. 심미적 판단과 목적론적 판단이다. 이 둘이 <판단력 비판>의 주제다.


지적 관심을 추구하는 앎의 능력은 지성이, 실천적(윤리적) 관심을 추구하는 욕망의 능력은 이성이 주도한다. 향유적 관심, 즉 쾌-불쾌를 감지하는 능력은 판단력이 주도한다. 


그런데 판단력이 규칙을 제공하는 감정의 영역은 한편으로는 앎과 연결되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는 욕망과 이어진다. 감정은 앎과 욕망의 중간지대라 할 수 있다. (187쪽)


모든 판단은 쾌감을 동반한다. 규정적 판단, 즉 개별적 사실을 규칙에 맞추는 하향적 판단은 세계를 질서에 줄세운다. 반면, 반성적 판단, 즉 상향적 판단은 질서를 창조한다. 후자의 쾌감이 더 극적인 이유다.


심미적 판단, 즉 취미 판단은 주관적 합목적성을, 목적론적 판단은 객관적 합목적성을 추구한다. 그런데 심미적 판단이 추구하는 것은 결국 도덕적 관심이다. 내가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른 사람들의 의견과 일치할 때, 우리는 <공통감>이라는 것을 감각하는데, 바로 이것이 공동체를 이루는 핵심이기 때문이다. (결국 칸트도 아리스토텔레서의 <덕>으로 회귀한다.) 바로 이 공통감이 헤겔과 하이데거를 통해 발전해 나치를 도왔다는 사실은 기억해두자.


칸트 미학이 제시하는 흥미로운 개념은 바로 <숭고미>다. 숭고 체험을 이루는 것은 두 가지다. 객관적으로 압도적인 체험이어야 하고, 주관적으로는 그로 인해 무력감 또는 상실을 경험해야 한다. 대자연에서 숭고미가 느껴지는 이유다. 이렇게 되면 그 체험은 우리의 인식 범위를 넘어선다. 다시 말해, 기존의 인식 체계를 되돌아 보게 되는 상향적 판단, 즉 반성이 시작되는 것이다.


숭고는 우리 마음이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 (251쪽)


칸트는 숭고 체험을 두 가지로 나눈다. 수학적 숭고와 역학적 숭고다. 전자는 크기로, 후자는 극단성으로 우리를 압도한다. 전자의 사례가 대자연 또는 우주의 광활함이라면, 후자의 사례로는 전쟁을 들 수 있다. 수학적 숭고에서 결합하는 것은 상상력과 순수이성, 역학적 숭고에서 결합하는 것은 상상력과 실천이성이다. 칸트는 자연의 숭고가 서막에 불과하며, 진짜 중요한 것은 우리 안의 숭고, 즉 도덕법칙이 일으키는 숭고 체험이라고 말한다.



판단력 비판(2) - 다시, 진


<판단력 비판>의 후반부는 목적론적 판단에 관한 것이라 말했지만, 쉽게 말하면 유기체의 존재 의미에 관한 내용이다. 유기체에 관한 주요 입장으로는 관념론(idealism), 물활론(hylozoism), 유신론(theism)이 있다. 관념론은 생명과 목적론적 질서가 단지 인간의 관념에 있다는 입장으로, 에피쿠로스나 스피노자가 대표적 사례다. 물활론은 모든 것이 살아 있다는 입장이다. 유기체 논리가 극단에 이른 입장이라 할 수 있다. 유신론은 아리스토텔레스와 그를 이어 받은 스콜라 철학과 같이 세계 전체를 신을 정점으로 하는 목적-수단 관계로 보는 것이다. 말하자면 유기체의 존재 의미가 최종적으로 신에 있다는 이야기인데, 아쉽게도 칸트가 이 입장에 속한다.


칸트는 세계가 유기체적 질서에 의해 짜여 있다고 하면서도 물활론을 강력하게 비판했는데, 그것은 주객이 전도되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목적론적 판단의 원리는 객관적 진리 자체가 아니라 과학적 발견을 위한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해 놓고, 신을 정점에 가져다 놓는 칸트의 논리는 이해하기 어렵다. 저자에 따르면, 칸트가 신을 상정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논리적으로 지적 설계자가 필요했기 때문이라 한다. 이게 사실이라면 칸트는 아리스토텔레스에서 한 발짝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 것이다. 최초운동자(prime mover)라니, 현대인 입장에서 보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칸트는 유기체에서 발견되는 <내적 합목적성>이 필연적이라고 말하는데, 그가 주장하려는 것이 유신론이라면 더는 볼 필요도 없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어쨌든, 자연의 궁극 목적이 도덕적 인간이라는 것이 칸트의 결론이다. 이것이 그가 3대 비판서를 통해 다다른 결론이다.


저자는 칸트의 이러한 결론을 이해하기 위해 그가 살았던 시대를 고려하라고 주문한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해서 구원된 칸트 철학은 결국 그 시대에만 유효한 철학이 될 수밖에 없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은 오늘에도 유효하다. 과학을 부정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이비 종교가 넘쳐나는 세상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저자가 말하는 대로, 기계론적 세계관에 지쳐 어떤 목적이 부여된 세계를 갈구하는 것이다.


구글 수석 엔지니어 출신이라는 모 가댓이 쓴 <행복을 풀다>를 보면, 엔지니어는커녕 도대체 고등교육 받은 사람이 썼나 의심이 들 정도로 해괴한 논리가 난무한다. 개인사의 불행을 이해하려는 그의 시도는 십분 이해하며, 공감한다. 그러나 그런 해괴한 이야기를 일기장에 쓰는 대신 책으로 출판한 그의 테러적 행위는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칸트와 그 이후의 역사철학에서 역사의 목적은 이상적인 국가에 놓인다. 이때 국가는 개인이 가진 모든 소질을 가장 이상적으로 실현할 수 있는 질서를 가리킨다. (332쪽)


이러한 생각이 전체주의에 이르렀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소결


나는 칸트 원저를 읽을 생각이 없다. 이 책을 읽고 나서, <틸리 서양철학사>와 <철학 대 철학>의 칸트 부분을 찾아 읽었다. 이렇게 칸트 철학을 공부하고 나서, 나는 원점에 돌아온 느낌이다. 예전보다 칸트에 대해 아는 것이 아주 조금 늘어났지만, 칸트 철학에 대한 나의 소감은 마찬가지다.


그는 지식의 가능성과 타당성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즉 그는 독단론자이다. (<틸리 서양철학사>, 1026쪽)


칸트는 <순수이성 비판>을 통해 인식의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만족스러운 해답을 제시하지 못했다. 당시의 과학 수준 때문에 그가 활용할 수 있던 분석 도구가 제한되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다. 그의 인식론이 폄하될 이유는 없다. <실천이성 비판> 역시 윤리학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공적을 인정해야 한다. 다만, <실천이성 비판>의 종반부와 <판단력 비판>의 후반부에서 그가 신을 찾은 것은 실망스럽다.


그럼에도, 3대 비판서를 통해 그의 생각을 따라가본 것은 좋은 경험이었다. 왜냐 하면,


칸트는 앎으로서의 철학과 활동으로서의 철학하기를 구별했다. (344쪽)


앎으로서의 철학을 배우는 것도 즐겁지만, 철학하기는 더 즐겁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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