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멋진 어른

지역언론, 사람을 기록하다 #어른 김장하

어른 김장하를 취재하기까지

by 김주완

세 번의 장면


#장면1

2022년 5월 말, 남성당한약방이 문을 닫는다는 소식을 들은 장학생 김종명(회사원) 씨가 김장하 선생을 찾아왔다.

“제가 선생님 장학금을 받고도 특별한 인물이 못 되어 죄송합니다.”

선생이 웃으며 말했다.

“내가 그런 걸 바란 게 아니야.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야.”


#장면2

다큐 <어른 김장하> 방영 직후 김장하 선생을 만난 자리에서 김현지 PD가 말했다.


“요즘 뉴스를 못 보겠어요. 묻지마 폭행, 살인 같은 끔찍한 사건이 워낙 많아서 세상에 온통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아요.”


그러자 김장하 선생은 양쪽 사돈 간에 있었던 일화를 꺼냈다. 예나 지금이나 사돈은 서로 참 어려운 관계다. 어떤 사람이 시장에서 우연히 만난 사돈을 극구 자기 집으로 모셔와 식사 대접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사돈이 밥을 먹던 중 돌을 ‘우두둑’ 씹었다. 대접하던 사돈이 당황하여 말했다.


“아이고! 밥에 돌이 많죠?”


돌을 씹은 사돈이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쌀이 훨씬 많습니다.”


얘기를 듣던 나와 김현지 PD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 자리에선 그렇게 웃고 말았는데, 나중 가만히 생각하니 그건 단순한 유머가 아니었다. 선생의 이야기에 앞서 김 PD가 했던 말이 떠올랐고, 거기서 ‘쌀’은 장면1의 ‘평범한 사람들’과 오버랩됐다. 즉 ‘자극적인 사건들만 뉴스가 되는 언론의 속성상 세상엔 나쁜 사람들만 있는 것 같지만, 실상은 각자의 자리에서 성실하고 착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이 훨씬 많다’라는 걸 ‘돌’과 ‘쌀’에 비유해 말씀하신 게 아닐까.


#장면3

<어른 김장하>가 전국적인 화제가 되자 MBC ‘뉴스하이킥’란 프로그램에서 PD와 나에게 출연요청이 왔다. 인터뷰 도중 “지역방송에서 (이런 다큐를) 만들었다는 게 정말 대단하다”라는 진행자의 칭찬에 김현지 PD가 말했다.


“새로운 이야기는 늘 변방에 숨어 있다, 그리고 그걸 찾는 건 누구보다 심마니처럼 다 훑고 다니는 저희(지역언론)가 제일 잘한다, 이걸 좀 알아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일본군‘위안부’ 훈 할머니 이야기


1990년 기자라는 직업을 시작한 후 내가 처음으로 어떤 인물의 살아온 이야기(Life Story)에 진지한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아마 1997년 ‘훈 할머니’ 취재 때였던 것 같다. ‘훈 할머니’는 일제 말기 일본군‘위안부’로 동남아 전선에 끌려갔다가 해방 후 반세기가 넘도록 돌아오지 못하고 캄보디아 프놈펜 인근 오지마을에 현지인처럼 살고 있던 중 한 젊은 한국인 사업가에 의해 발견됐다.


할머니의 존재를 국내에 알린 최초보도는 <한국일보>였으나 이후 이어진 혈육 찾기 취재 경쟁에 마침표를 찍은 곳은 <경남매일>이었고, 취재기자는 나였다. 54년 만에 ‘이남이’라는 한국이름을 되찾은 할머니의 생애사는 눈물 없이 들을 수 없었고, 이후 중국에 남아 있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 나서는 계기가 되었다. 지린·라오닝·헤이룽장 등 동북3성에서 일곱 분의 피해 할머니들을 찾아 생애사를 채록, 보도하는 과정에서 눈물을 아마 한 바가지는 흘렸던 것 같다.


훈(이남이) 할머니와 동생 이순이 할머니 상봉


사람 이야기가 딱딱하고 건조한 스트레이트 사건기사보다 훨씬 큰 공감과 분노를 일으킨다는 것을 절감한 게 그때였다. 이는 경남에 생존해 계시던 ‘위안부’ 피해자의 증언채록과 근현대사, 특히 지역사에 대한 공부로 이어졌다.


나쁜 사람을 고발한 <토호세력의 뿌리>


1999년 시민주주 신문 경남도민일보 창간과 함께 왜곡·은폐·누락된 지역현대사를 발굴하는 장기 기획취재를 시작했다.


100회에 걸쳐 보도하는 과정에서 해방 직후 우익단체 간부들의 일제강점기 행적, 3·15마산의거 가해자들의 실체,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가해자와 피해자 등을 규명하는데 주력했다. 이 연재물은 이후 <토호세력의 뿌리>(도서출판불휘, 2005)라는 책으로 출간됐다. 일제 때 친일하고 해방 직후엔 미군정과 반공단체, 정부 수립 후엔 자유당에 빌붙어 민간인학살에 협력하며 권력을 키운 김종신, 일본 헌병 출신으로 3·15의거 때는 경찰이 되어 시민을 총격하고 김주열 열사의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 마산 보도연맹 학살의 실질적 책임자였던 노양환(가수 노사연의 아버지) 등을 고발하는 한편 박정희 쿠데타 세력에 의해 용공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지역사에서 지워졌던 노동운동가이자 피학살자전국유족회장 노현섭의 재심 무죄를 받아내 복권시켰고, 학살되었던 독립운동가 안용봉·이교영 선생의 서훈을 받아낸 것도 그때의 성과였다.


취재 과정에서 온갖 자료를 뒤지면서 실감했던 것 역시 ‘사건보다 사람’에 대한 기록의 중요성이었다. 그래서 오늘 내가 쓰는 사람에 대한 기사가 후대의 역사가에게 소중한 기록물이 되리라는 자부심도 생겼다.


논리를 앞세운 비판기사보다는 평범한 사람의 구체적인 삶을 통해 우리 사회의 모순을 드러내는 게 훨씬 효과적임을 깨달은 건 2008년 혜영 씨 이야기를 쓰면서였다. ‘스물여섯 혜영 씨는 왜 숨졌나’라는 제목의 상·중·하 3편으로 연재된 기사는 당시 인터넷에서 100만 회가 넘는 조회수를 기록하며 독자들의 슬픔과 공분을 자아냈다. 이를 계기로 민간기업 노동자의 퇴근길 교통사고도 업무상 재해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회적 공감대를 확산할 수 있었다.


2010년 편집국장을 맡으면서 평범하지만 성실하고 바르게 살아가는 우리 이웃의 이야기를 담은 ‘동네사람’을 고정 코너로 만들었고, 이 과정에서 발굴된 ‘작지만 강한 여자 송미영 이야기’(11회 연재)에 대한 지역사회의 뜨거운 반응은 나에게 ‘인물 생애사 취재’에 대한 확신과 사명감을 만들어주었다.


기자의 삶에 지표가 된 어른


내가 김장하 선생을 알게 된 것은 1991년, 그가 설립해 운영하던 진주의 사립 명신고등학교를 국가에 무상헌납할 때였다. 땅과 건물로만 100억 원대 재산가치를 가진 학교를 설립 7년 만에 국가에 기증한다고? 드문 일이었다. 진주에 이런 분이 있었다고? 나는 당시 진주의 주간신문 기자로 일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해보고 싶었으나 나를 포함한 모든 언론사 기자들이 거절당했다.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실이 더 인상적이었다. 자신의 선행과 관련해 어떤 언론과도 인터뷰에 응한 적이 없다는 것, 오래전부터 수많은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해 왔다는 것, 그럼에도 자신은 자가용 승용차가 없고 허름한 한약방 건물 3층을 가정집으로 개조해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뷰는 거절당했지만, 호기심은 더 커졌다.



1992년 창원의 일간신문에 공채기자로 입사했다. 직장을 옮기고 난 뒤에도 그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그가 운영하던 명신고등학교는 타 학교에 비해 전교조 조합원이 많았다. 그러나 1989년 정권의 압력으로 전교조 해직 광풍이 전국을 휩쓸 때 명신고는 단 한 명의 조합원도 자르지 않았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을까?


1999년 경남도민일보를 창간할 때, 그리고 2011년 자매 월간지를 창간한 후에도 그에게 인터뷰 요청을 했으나 보기 좋게 거절당했다. 거듭된 거절에도 그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점점 커졌다. 승용차를 사지 않기로 한 것도, 당시 만연했던 ‘촌지’를 받지 않기로 한 것도 그의 영향이었다. 유혹에 부딪힐 때마다 그를 떠올렸다. ‘김장하 선생에게 부끄럽지는 않을까?’


<풍운아 채현국>으로 느낀 효능감


시간이 흘러 2015년 김장하 선생과는 결이 다르지만 ‘시대의 어른’이라 불릴 만한 채현국 선생을 취재해 <풍운아 채현국>(도서출판 피플파워)을 출간했다. 책에 대한 반응이 좋았고, 전국에서 채현국 선생 초청강연 요청이 쇄도했다. 기자로서, 글쓰는 사람으로서 효능감을 느꼈다. 그때 이런 생각을 했다.


‘나쁜 사람을 찾아내서 고발하는 것도 기자의 중요한 역할이긴 하지만, 좋은 분을 찾아 널리 알리는 것도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유용한 수단일 수 있겠다.’


내친김에 그동안 내가 만나온 사람들 가운데 널리 알리고 싶은 분들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당시 포털 다음에 ‘뉴스펀딩’이라는 서비스가 있었다. 유시민 작가도 거기에 글을 썼고, 셜록 박상규 기자도 ‘삼례 나라슈퍼 3인조 강도치사 사건’ 등 재심 3부작 기사로 히트를 쳤다.


나도 ‘풍운아 채현국과 시대의 어른들’이라는 제목으로 연재를 시작했다. 7회에 걸쳐 어른들을 소개했는데, 마지막 회가 김장하 선생 이야기였다. ‘“돈은 모아두면 똥이 된다” 김장하의 지론’이라는 제목의 글에는 공감 6200, 공유 2200회가 찍혔고, 댓글 103개가 달렸다. 후원금도 918만 원이 모였다.


2015년 다음 뉴스펀딩


사실 이 글을 쓰기 전까지만 해도 다음이나 네이버 등 포털에서 ‘김장하’를 검색하면 ‘김장하는 방법’ 따위의 블로그 포스트가 상단에 노출됐다. 그랬던 ‘김장하’가 인터넷에서 화제의 인물이 되니 비로소 사람 이름이 우선 노출되기 시작했다.


조회수가 올라가고 화제가 될수록 걱정도 커졌다. 김장하 선생이 불같이 화를 내진 않을까? 그도 그럴 것이 선생을 인터뷰하긴커녕 미리 양해도 구하지 않고 주변 취재를 통해 일방적으로 쓴 글이었기 때문이다. 미리 말씀드렸다간 못 쓰게 할 게 뻔했으니 그냥 저지른 일이었다.


드디어 맞닥뜨린 김장하 선생


진주에 찾아가 김장하 선생과 가깝게 지내는 세 분을 먼저 만났다. 지금은 고인이 된 박노정 시인, 홍창신 형평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여태훈 진주문고 사장이었다. 그들도 함께 걱정하면서 “선생님도 그 글을 읽었다더라”, “지금이라도 찾아가 직접 뵙고 양해를 구해라”, “원체 화를 잘 내시는 분이 아니니, 찾아오는 사람을 내치지는 않을 거다”는 조언을 해주었다. “오후 4시쯤 찾아가면 한약방에 손님이 뜸한 시간이니 그때가 좋겠다”는 귀뜸까지.


과연 그 시간에 맞춰 갔더니 혼자 계셨다. 2015년 3월 31일 화요일 오후 4시.


김장하 선생은 늘 저 자리에 앉아 있었다


“6년 전, 99년에 한 번 찾아뵈었던 김주완이라고 합니다. 허락도 없이 선생님 이야기를 썼습니다.”

“막 휘갈겨 놨데?”

“죄송합니다.”

“…….”

잠시 침묵하던 그가 말했다.


“이미 써버린 걸 어떡해. (다시 침묵) … 차 한 잔 할까요?”


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날 이후 앞서 만났던 세 분을 포함, 김장하 선생 주변 인물들이 취재를 적극 돕기 시작했다. 그들 역시 늦기 전에 김장하 선생에 대한 기록을 남겨야 한다는 의논을 해왔으나, 선생이 워낙 완강하여 엄두를 못 내고 있던 터였다. 그런 차에 김주완 기자가 사고(?)를 쳤고, 다행히 선생도 크게 화를 내지는 않았다는 말에 내 취재를 은밀히 돕기로 한 것이었다.


선생이 참석하는 지역사회 모임이나 지인들과 식사하는 자리에 나를 끼워주기 시작했다. 덕분에 자연스레 접점을 넓히며 선생과 대화하는 기회가 늘어났다. 아마도 선생은 그 시기 ‘왜 자꾸 내가 가는 자리마다 김주완 저 친구가 먼저 와 있는 거지?’라며 의아하게 생각했을 수도 있겠다.


2015년 5월 창원에서 만난 문형배 판사


그러나 선생으로부터 본인의 선행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듣는 건 난망했다. 그런 걸 물으면 그냥 먼 산을 보며 침묵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결국 선생의 도움을 받은 단체와 사람들을 수소문하여 퍼즐을 하나하나 끼워 맞출 수밖에 없었다. 문형배 전 헌법재판관도 그때 만난 장학생 중 한 명이었다. 그는 내 취재를 적극 지지해주었고 많은 도움도 줬다.


2021년 연말, 정년을 3년 앞당겨 신문사에서 퇴직했다. 김장하 취재를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MBC경남 김현지 PD의 제안을 받았다. 다큐를 함께 만들자는 거였다. 그렇게 공동취재가 시작됐고, 1년 후인 2023년 1월 1일 다큐 <어른 김장하>와 책 <줬으면 그만이지>는 동시에 나왔다.



간혹 “어떻게 김장하 선생을 그렇게 오랜 세월 취재할 수 있었나”라는 질문을 받는다. 좀 민망하지만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분에 대한 한결같은 존경심이 있어서 가능했고, 그분에게 부끄러운 기자가 되어서는 안 되겠다는 마음으로 살아왔기 때문에 감히 만용을 부릴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라고.


*계간 <비욘드로컬> 가을호, 2025년 9월, <기획회의> 통권 640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채현국 선생이 특별한 삶을 내려놓은 까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