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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Mar 11. 2024

사람을 아는 것, 그것이 아는 것이다.

논어 안연 22장

1. 공부하기 싫어요!


"엄마, 수학 배우기 싫어요. 숫자만 봐도 어지러워요."

"엄마! 국어는 일상에서 쓰니까 배울필요 없잖아요? 왜 배워야하죠?"


우리집 두 아이는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이 정반대입니다. 자기가 싫어하는 과목은 왜 배워야하냐며 꼭 투정입니다. 좋아하는 과목에는 한없이 관대하면서 말이지요. 큰 아이는 수학을 좋아하고 국어와 영어는 싫어합니다. 작은 아이는 국어와 영어는 즐겁게 공부하면서 수학 공부만 하려하면 우울모드입니다. 


둘은 그래서 항상 말다툼을 합니다. 한 쪽이 '수학이 싫다'고 하면 다른 한 쪽은 '수학이 왜 싫냐'며 반론을 펼치고, 또 작은 애가 '국어와 영어가 재미있다'고 하면 큰애는 '뭐가 재미있냐'며 면박을 주지요. 


사실, 저도 그랬습니다. 좋아하는 과목과 싫어하는 과목이 명확하여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고 싫어하는 과목은 거들떠보지도 않아 수능실패까지 했지요. 심지어 우리 아이들의 할머니, 그러니까 나의 어머니마저 수학공부 하기 싫다는 둘째의 말에 공감을 합니다. 어머니 당신도 그러셨다면서요. 


반면에 남편의 생각은 다릅니다. 수학이야말로 '언어'영역이라며 우리의 세계를 '수'라는 언어로 대체하는 학문이기에 '국어'나 '영어'와 별차이가 없다고 하지요. 그러면서 수학을 어려워하는 저와 딸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합니다. 제게 있어서는 참으로 놀라운 발상이자, 참신한 태도였습니다. 수학이 어렵지 않다니요!


어쨌든 각자의 교과목마다 흥미와 재능에 차이가 있는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각자의 흥미와 적성에 맞는 공부를 하면 될텐데, 왜 우리는 이렇게 다양한 교과목을 공부해야할까요? 싫어하는 교과목을 보며 되지 않는 재능과 흥미를 끌어내느라 애쓰는 시간에 좋아하는 교과목을 깊게 파면 더 효율적이지 않을까요? 


이런 의문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었지만, 엄마가 된 지금에야 진지하게 고민해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해답을 <논어>를 읽으며 찾을 수 있었습니다.




2. 우리는 무엇을 알기 위해 공부하는가?




공부의 사전적인 의미는 '학문이나 기술을 배우고 익힌다'는 것입니다. 공부란 누군가에게 전해받은 내용을 연습하여 내 것으로 만드는 것이며, 우리는 이것을 '안다'고 표현합니다. 즉, 공부는 '알기 위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나보다 더 잘하는, 혹은 잘 아는 이에게 수업을 받습니다. 그러나 배우기만 해서는 아는 것이 될 수 없습니다. 수없는 연습을 통해 내 것으로 만든 후에야 안다고 할 수 있지요. 우리는 이 앎을 또 다른 이와 나누면서 지식과 실력을 더 공고히할 수 있지요. 그러므로 '공부'라는 것은 수업을 듣고 내 것으로 만들어 다른 이의 앎에 영향을 미치는 모든 과정을 뜻합니다.


여기에서 제가 가장 궁금한 것은 이것입니다. 우리는 궁극적으로 무엇을 알기 위해 공부를 하는가. 앎의 목적이 단순하고 단편적인 지식에만 그친다면 싫어하는 교과목이나 흥미가 가지 않는 교과목을 고생해서 들어야할 의미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지요. 그저 대학에 잘 가기 위해, 성적을 잘 내기 위해 습득하는 지식은 긴 인생에 대비해 보면 그 의미를 찾기가 상당히 궁색해지기 마련이니까요.


그래서 앎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을 정리해봅니다. 배움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는 단편적인 지식의 습득입니다. 우리는 이 단편의 경험을 지속하고 모아서 통합적 지식으로 확장할수 있고요. 또한 이러한 앎을 현실에 적용시켜 경험을 쌓아가면 실용적인 지식을 더할 수 있겠지요. 당장 눈앞에 당면한 것은 단편의 지식이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지식들을 통합하여 나자신에게 유의미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야합니다.


이, '유의미한 무언가'는 우리의 입장에서 다양한 내용들이 올 수 있습니다. 그런데 다음의 문장에서 공자는 이렇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번지가 '앎'에 대해 묻자, 공자께서 답하셨다. 

"사람을 아는 것이다."


問知, 子曰 "知人."


- 논어 안연 22 - 





공자에게는 '번지'라는 이름의 제자가 있었습니다. 공자는 당시의 큰 스승이라 아주 많은 제자가 있었습니다. 그 수만큼 공자의 제자들의 성향도 가지각색이었습니다. 논어에 종종 등장하는 '번지'라는 이름의 인물은, 조금쯤 둔한 인물로 그려집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한참 고민하지요. 그래서 때로는 공자께, 때로는 다른 동료 제자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하는 캐릭터입니다. 그 모습이 마치 나와 같아서 마음이 푸근해지는 인물이지요.


그런데 어느 날, 번지가 묻습니다. '앎'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공자는 질문을 한 제자의 수준에 맞추어 대답을 해주는 경향이 있습니다. 같은 질문에 모두 다른 대답을 하는 공자의 모습이 논어에 등장하거든요. 공자는 번지의 특성을 이해하고 자신의 제자의 눈높이에 맞추어 쉽게 대답해주셨던 것입니다.


공자의 말에 의하면 '안다'는 것은 '사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이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지식, 사회제도, 예절, 문화 등 모든 유산들을 포함하는 말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공부를 통해 가장 가까이로는 가족의을 알게 되고, 학교를 알게 되고, 사회와 인류의 모습들을 알아가게 됩니다. 이것들이 교과목으로 정리된 것이 바로 학교의 교육과정이지요.



3. 공부란, '타인'을 알고, '나'를 알기 위해 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공자는 '사람'이라는 이 한마디로 학교의 모든 교과를 아우르고 있습니다. 교과서에 수록된 내용들이 바로 인류 전반의 문화 유산을 끌어안아 타인을 이해할 수 있는 바탕을 만들어줍니다. 그러나 '타인'과 '타인이 만들어낸 것'들에만 집중하여 그 중심에 있는 '나'를 잊어버리면 안되겠지요. 타인에 대한 이해는 결국 '나'를 이해하기 위한 선행 과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얼키고 설킨 학문의 연결고리들을 연결하여 그 가운데에 서 있는 나 자신을 제대로 알아야 삶을 제대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학을 싫어하는 나, 음악을 좋아하는 나, 수학을 좋아하는 나, 영어를 싫어하는 나. 모든 교과 속에서 나의 모습은 조금씩 다릅니다. 교과속에서 서로 다른 내 모습을 인정하고 서로 다른 상황속에서도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나의 노력을 조절하고 방법을 찾아가는 일이 모두 '나와 만나는 지점'이 되는 것입니다. 공부는 결국 '나'를 제대로 알기위하여 필요한 과정인것입니다. 


우리의 긴 인생 중 여러 선택지 앞에서 시행착오를 그나마 덜 겪을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일까요. 내가 나 자신을 잘 알때, 선택 앞에서 조금쯤은 더 나 자신을 위한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는 다양한 교과 속에서 만나는 '나에 대한 체험'이 내 안에서 통합될 때 가능합니다. 잊지 말아야할 것은, 교과에 대한 체험이 '최선' 속에 있을 때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될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 이야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왜 다양한 교과목을 공부해야하는 지, 제대로 알려주고 싶어 고민하며 썼습니다. 하지만 결론은 역시 '최선을 다해 공부해라'라는 잔소리로 마무리되는 것 같아 마음이 무척 무겁습니다. 엄마라는 직업상 '잔소리 본능'은 어찌할 수 없나봅니다. 


번지와 공자의 멋진 문답, 다시 한번 소개시켜드리며 마무리합니다.






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람을 아는 것이란다.


- 논어 안연 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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