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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whilelife May 10. 2024

어느새 푸르른 저 나무 좀 보소.

논어 학이 1, 학이 16, 이인 14


1. 내가 보아주지 않아도 너는 아름답구나.



"엄마, 응가 닦은 휴지처럼 생겼다."


아파트 단지를 거닐다 예닐곱 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한 말을 우연히 듣게 되었습니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목련 나무 밑을 지나던 중이었습니다. 아이의 시선을 따라가 보니, 바닥에 떨어진 목련 꽃잎이 아무렇게나 떨어져 있었습니다. 꽃잎은 군데군데 갈빛으로 변색되어 정말로 사용 후 버려진 휴지 같기도 합니다. 



올해 다시 마주한 새 봄은 그야말로 아름다웠습니다. 아파트 화단엔 벚꽃이 흐드러지고, 집 앞 백목련 나무에 목련꽃은 또 얼마나 탐스럽게 피었는지. 꽃구경을 실컷 하는 매일의 나날이 즐겁더랬지요.


그러나 올해도 순환의 법칙은 비껴가지 않았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오더니 벚꽃도 떨어지고, 가지마다 탐스럽도록 희게 피었던 목련도 생의 끝에 그 커다란 꽃잎을 바닥에 툭, 툭 떨구었습니다. 그리고 그날 아침엔 급기야 아이에게 그런 말을 듣고 말았습니다.



아이가 지나간 뒤 목련 나무를 바라보았습니다. 꽃이 떨어진 목련 나무는 가지도 얇고 앙상한 데다 작은 잎 몇 개가 듬성듬성할 뿐이라 꽃이 피었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볼품이 없었습니다. 주변엔 변색된 꽃잎이 어수선하게 널려있었습니다. 목련 나무는 마치 쓰레기 더미 사이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습니다.


그날 이후로는 꽃이 진 목련 나무를 볼 때마다 아이의 말이 생각나 마음이 좋지 않았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꽃이 한창일 땐 목을 빼어 목련을 찾던 제가, 그날 이후로는 목련 나무를 애써 외면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한동안 바쁘기도 했습니다. 정신없이 출근하고 퇴근하며 일상을 사는데 열중했습니다. 봄경치를 애써 찾던 풍류객의 마음은 사라진 지 오래, 평소와 같이 핸드폰 화면에 코를 묻은 채 주변에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며칠이 흘렀습니다.


다시 아침, 햇살이 참 밝은 날이었습니다. 출근을 위해 집을 나섰습니다. 그날도 어김없이 아파트 입구를 나와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려던 찰나, 우연히도 나의 시선이 저 멀리 앞에 서 있는 나무 위로 스칩니다.


'어라? 뭐지?'


나의 뇌는 순간적으로 예전과 다른 그 무엇을 감지했습니다. 이미 핸드폰 화면 위로 자리 잡았던 내 눈동자는 순식간에 아까의 그 나무로 되돌아갔습니다. 그렇게 내 눈길을 잡아끈 바로 그것은,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꽃이 떨어져 흉하기만 했던 바로 그 목련 나무였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그토록 보기 흉하던 목련나무가, 어느 사이 풍성하게 자라난 잎새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푸르게 빛나는 잎사귀 한 장 한 장마다 가득한 생명력으로 의기양양해 보였습니다. 


나무가 어찌나 아름답고 풍요로워 보이는지 한동안 넋을 잃고 섰습니다. 꽃이 졌다고 무심하게 지나쳤던 그 나무는 내가 보아주지 않았던 그 시간들 속에서도 홀로 잎을 키워내며 그토록 푸르게 성장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지나가는 아이의 뱉은 말에 서럽지도 않았는지. 꽃이 졌다고 별안간 외면해 버렸던 내게 서운하지 않았는지. 목련 나무는 그저 자기의 소명을 다하여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이리도 풍성한 잎을 자랑하며 당당히 서 있는 목련 나무 앞에 다시 서니, 한순간에 목련 나무를 외면해 버렸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게 느껴졌습니다.


"너, 백목련 나무야 말로 공자가 말했던 그 군자로구나!"


그렇습니다. 목련 나무는 내가 보아주지 않아도 서운해하지 않고, 그 시간 동안 애써 잎을 키워내어 결국에는 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공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것은 이 백목련의 모습이 아니었을지 생각하며, 저는 <논어>의 한 구절을 속으로 조용히 외워봅니다.




2. 남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화내지 않는다면







"남들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데도 화내지 않는다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느냐."


人不知而不慍, 乎.

인부지이불온, 불역군자호.


-논어(論語), 학이(學而) 편 1장-



<논어> 안에는 '알아줌'에 관한 내용이 참 많습니다. 공자의 제자들이 평소에 얼마나 '인정'을 갈구하였는지 공자는 이런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


"평소에 너희들은 각각 자기를 알아주지 않는다 불평하더구나. 
만약 너희를 인정해 준다면 너희는 무슨 일을 하겠느냐?"

-논어(論語), 선진(先進) 편, 11장-


이 질문을 보면 그 옛날 공자의 제자들이 '알아줌'에 대한 욕망을 평소에 거침없이 드러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의 질문을 받은 공자의 제자들은 '인정받음'을 가정하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무척 기뻐하며 대답하지요. 자기가 얼마나 정치를 잘하는지, 또 얼마나 외교를 잘하는지, 군대는 얼마나 잘 다스리는지 묘사하며 설렘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이렇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인정'과 '타인의 알아줌'에 대해서, 공자는 목메지 말라고 합니다. <논어>의 시작인 학이(學而) 편의 1장에서부터 쐐기를 박지요. 타인의 인정을 받지 못해도 화내지 말라고 말입니다. 


사실, 누군가가 나를 알아주기를 기대했다가 그 기대가 어긋나면 속상한 감정이 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러한 속상함과 서운함은 인간으로서 느끼는 당연한 감정, 즉 인지상정입니다. 그러나 공자는 이 '인지상정'을 뛰어넘어야 한다고 조언하고 있지요. 바로 백목련의 모습처럼 말입니다. 공자는 왜, 제자들에게 '타인의 인정'에 대해 이런 가르침을 전했을까요?




3. 분노는 성장을 멈추게 한다.




타인의 시선을 갈구하고, 타인의 인정을 욕망하는 것은 진화론적 관점으로 볼 때 매우 당연한 것이라고 합니다. 타인의 인정을 통해 사회적, 경제적 지위가 단단해져야 생존가능성 또한 높아질 수 있으니까요. 그리하여 우리의 무의식은 인정받지 못하다고 느낄 때 이를 '생존의 위협'으로 받아들입니다. 그리고 결국은 불안과 두려움,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지요.


'인정'과 '알아줌'을 중시하는 욕구가 아무리 인간의 진화의 산물이라고는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인정'과 '알아줌'에 목메는 것은 자신의 존재 가치를 타인의 판단에 맡기는 것과 같습니다.


공부와 성장은 내가 노력할 수 있는 부분이지만, 타인의 인정은 나의 노력과는 전혀 상관이 없습니다. 타인의 인정 여부는 그 순간, 나를 둘러싼 사람과 환경과 상황들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인정을 기대하며 노력에 힘썼다가 그 기대가 좌절되면 어떻게 될까요? 내게 가치를 부여하는 주체가 타인이 되므로, 인정받고 싶어 하는 내 기대에 어긋나게 되면 남 탓을 하게 됩니다. 공부건 일이건, 나의 노력이 '타인의 인정'을 목적으로 하는 순간, 타인은 곧 내게 지옥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나 자신을 지옥 속에 밀어 넣는 것은 바로 나 스스로 만들어내는 부정적인 감정입니다. 나를 알아주지 않는 타인과 사회에 대한 분노가 그것입니다. '분노'하는 자는 성장을 멈춥니다. 분노에 자기의 모든 것을 불사르고 나면 남는 것은 피폐해진 자신일 뿐입니다. 


만약에 백목련이 인간처럼 타인의 인정을 중시했다면 어땠을까요? 꽃이 만개하여 사람들이 자신을 보아주고 아름답다 칭찬해 주면 우쭐거리며 자랑스러워했을 것입니다. 자신의 외모를 한껏 뽐내며 의기양양해했겠지요.


그러나 비바람이 불어 꽃이 떨어진 뒤엔 어땠을까요?. 그렇지 않아도 꽃이 떨어져 흉물스럽게 변한 나 자신이 불만족스러운데, 이제는 보아주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 속으로 많은 불평과 불만이 생겨났겠지요. 그런 상태에서 지나가는 아이의 거친 말을 듣고 나의 외면까지 당했으니 얼마나 화가 났을까요. 


목련이 사람 마음과 같았다면 그렇게 온 세상을 향해 원망의 마음을 쌓다가 결국 시들시들 말라 병이 들어버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토록 푸르른 성장은 결국 이룰 수 없었겠지요. 바로, 이것이 공자가 제자들에게 '알아줌을 바라는 마음'에 대해 경계를 내린 이유일 것입니다.


남의 인정에 나의 가치를 종속시키지 않는 태도. 외부의 인정 여부와 상관없이 스스로 꾸준히 성장하는 태도. 이것이 공자가 우리에게 전하고 싶은 가르침이었을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야말로 공부의 완성이라는 것을 공자는 단호히 말하고 있습니다. 분노로 인해 성장을 멈추게 되는 것, 이것을 가장 염려하셨던 것이 아니었을까요?


그런데 이것, 알고 계신가요? 공자도 사실 '알아줌'을 간절히 바라셨던 분이라는 것을요. 그러나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일반적인 우리의 모습과는 아주 조금 다른, 그 무엇이 있지요. 제자들에게'알아줌에 대한 경계'를 했던 공자, 그 공자는 자신의 말을 일상에서 어떻게 실천했을까요?




4.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을 붙잡는 법






"아무도 나를 알아주지 않는구나."

"어찌하여 선생님을 알아주지 않는다 하십니까?"

"하늘을 원망하지 않으며 타인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고

아래에 있는 것을 배워서 위에 있는 것을 통달하니

나를 알아주는 존재는 아마 하늘일 것이다."


子曰 莫我知也夫

자왈 막아지야부

子貢曰 何爲其莫知子也

자공왈 하위기막지자야

子曰 不怨天 不尤人 下學而上達 知我者 其天乎

자왈 불원천 불우인 하학이상달 지아자 기천호


- 논어(論語), 헌문(憲問) 편, 37장 -



'아무도 나를 알아봐 주지 않는구나!'


이것이 공자의 탄식이었습니다. 평범한 우리들과 똑같이 고민하는 모습이 <논어> 속 공자의 매력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을 꾸미지 않고, 자신의 부족한 점을 가리지 않고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위의 문장을 보면 공자도 '알아줌'과 '인정'에 목말라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자신의 공부를 현실에 적용시키기 위해서는 '자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란 군주가 주는 것이기에, '인정'을 필요로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나 공자를 중요 직책에 등용한 군주는 없었습니다. 결국 공자는 자신의 학식을 현실에서 펼쳐보지 못하였지요. 


이런 상황에서 공자는 '알아줌'에 대한 고뇌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끊임없는 공부를 통해 쌓은 내공을 현실에 적용시켜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 공자의 꿈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회가 오질 않으니, 공자의 고뇌는 얼마나 깊었을까요. 그러나 공자는 끝내 운명 탓을 하거나 남 탓을 하지 않습니다.


더욱이 '하늘'만은 날 알아줄 것이라는 말로 자신의 삶에 대해 여전히 긍정적인 자세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자연이 부여한 자신의 생을 끝까지 긍정하는 태도입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려울지라도, 막다른 골목에서 앞이 보이지 않더라도 절망에 빠지지 않는 긍정의 사유, 이것이 바로 공자가 지금까지도 우리에게 주는 힘의 원천입니다.


이러한 공자의 자세는 곧 앞에서 보았던 목련 나무의 태도와 같아 보입니다. 목련 나무는 낙화 후에도 생명이 가진 소명을 잊지 않습니다. 꽃의 아름다움이 사라진 자리에는 푸르름을 채워 넣었습니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열심히 성장하고 또 성장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는 자신의 풍요를 원 없이 발산하며 결국 나의 시선을 끌었습니다. 


남이 보아주지 않아도, 알아주지 않아도 절망과 분노에 빠지지 않고 자신의 성장을 꾸준히 이루어나가는 삶의 태도. 이것이 목련 나무에서 발견할 수 있는 덕목이자 공자가 우리에게 전해주고자 했던 가르침입니다. 그리고 공자 스스로도 이러한 태도를 내면화하여 실천했습니다.


앞이 보이지 않는 터널에서 좌절하고 멈추어버리는 보통의 우리와는 다른 태도입니다. 살아있음의 기적을 소중히 여기며,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 안에 있는 생의 이치를 펼치는 자세, 이것이야 말로 어떤 상황에서건 우리가 힘을 내야 하는 이유입니다. 




5. 목련의 자세를 뛰어넘어




'알아줌'을 원하는 공자의 솔직한 마음을 통해, 공자가 '알아줌'을 원하는 인간의 그 마음 자체를 나무라고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습니다. 


공자는 인간이 '알아줌'을 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과 그 본능적 욕망을 인정합니다. 다만,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고 욕망이 꺾이는 순간에도 성장을 멈추지 않도록 독려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절망의 끝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방법을 제시하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공자의 가르침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습니다. 이보다 한 발 더 앞서 나가기를 주문하고 있지요.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남이 나를 알아주지 못할까 봐 근심하지 말고,

내가 남을 알아주지 못할까 봐 근심해야 한다."



 知, 患不知人也.

 자왈  불환인지불기지, 환불지인야.


- 논어 학이 16 -




공자는 이제는 더 나아가 '남에 대한 인정'으로 화두를 진행시킵니다. '나의 인정'에 대해 초점을 두지 말고 적극적으로 남을 인정해 주는 삶을 살라고 당부하지요. 


이것은 아부를 통해 나의 인정을 얻어내고자 하는 행위와는 결코 다릅니다. '남을 인정하는 태도'는 수단이 아닌, 순수한 목적이 됩니다. 이는 다른 이를 잘 살펴 그 사람의 장점을 발견하고 긍정적인 관점으로 타인을 바라보는 훈련을 하라는 이야기이지요. '타인을 인정하는 것'은 타인과 긍정적인 관계를 맺기 위한 가장 중요한 출발지점입니다. 


나 자신을 인정하는 풍요의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남을 인정할만한 부분들은 언제든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남을 인정할 줄 아는 따스한 눈으로 나 자신을 바라본다면, 내가 스스로를 인정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한 대상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훈련을 반복할수록 나와 타인에 대한 긍정적 태도의 선순환을 이룰 수 있습니다. 남이 나를 인정해주지 않을 때 분노하지 않는 것과 남의 장점을 찾아 알아주는 것은 모두 논의의 차원은 다르나 그 맥락은 같은 이유입니다. 


우리는 인간이기에 목련의 태도를 뛰어넘어 한 발 더 앞서나가야 합니다. 인간은 항상 '나'뿐 아니라 '남'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하는 사회적인 동물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남을 먼저 적극적으로 인정해 주는 태도는 남의 인정을 갈구도록 진화된 인간을 위한 긍정적인 해결방법을 제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동일 교수는 저서 <공부법 수업>에서 인간은 행운이 찾아오도록 늘 준비하고 노력하는 존재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또한 운이 좋은 사람은 우리 모르게 행운이 찾아오도록 준비하고 노력하는 사람이라고 말이지요. 그리고 자기의 노력과는 별개로 다른 사람들이 들인 노력까지 알아봐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도 했습니다.


한동일 교수의 전언(傳言)은 공자가 전하는 메시지와 참으로 닮아있습니다. 시대는 달라도 지성이 가닿는 그 참된 깨달음은 이렇게 닮아 있음을 볼 때, 삶의 궁극적 진리는 진실로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게 됩니다.



6. 나도 당신도 푸르게 성장하는 풍경





공자의 제자들이 꾸었던 이천 년 전의 꿈들이 떠오릅니다. 이천 년 전의 그들에게도 반짝이는 눈으로 스승님 앞에서 주저 없이 이야기고 싶었던, 이루고 싶은 그 무엇이 있었습니다. 


그네들 안에 숨 쉬고 있던 꿈들을 보고 저는 가슴이 저렸습니다. 이들 중에서 자신의 포부를 제대로 이루어낸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자신을 알아봐 주지 않는다며 꺾여버린 이들에겐 성장도 없었을 것이며 끝끝내 누군가의 시선도, 인정도 받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저 또한 남의 말 한마디에 마음자리가 좌지우지되는 사람입니다. 제가 한문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이런 흔들림이 더욱 심했습니다. 남들이 이루어 놓은 공부의 양은 크게만 보이고, 이제 막 시작한 나의 공부는 너무나 초라하게 느껴졌습니다. 


남의 공부를 훔치고 싶었을 정도로 안달이 났습니다. 공부는 조금 하고서 많은 공부를 한 것처럼 포장하고도 싶었습니다. 남의 평가와 시선을 살피느라 마음이 항상 분주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내가 하루 종일 느끼는 감정의 대부분이 불안과 두려움이었지요.


불안과 두려움 안에 있다 보니, 주변 사람들을 인정하고 장점을 칭찬해 주기보다는 마음으로 깎아내리기 일쑤였습니다. 남을 깎아내려야 내가 올라설 수 있으니까요. 다른 학우가 공부를 열심히 했다며 선생님들에게 칭찬을 받을 때도 축하해 줄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저 그 '알아줌'을 내가 받지 못해 서운하고 억울했지요.


주변의 눈치를 보는 나날들 속에 있다 보니 공부를 하려 해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습니다. 내 마음이 온통 다른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에 가 있는데 어떻게 공부에 집중할 수 있었겠어요. 이렇게 남의 시선을 위해 한번뿐인 내 삶의 시간들을 낭비했습니다. 공부하는 마음은 특히 남의 시선에 매달려 있으면 안 된다는 것을 그때는 몰랐습니다. 


부정적인 감정에 시달렸던 나의 시간들은 곧 나의 존재 가치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나의 존재가치는 남에게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 자신에게 달려있는 것인데 말이지요. 


남이 나를 어떻게 보든지 간에 나 스스로 나의 가능성을 믿고 성장해 나가야 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생명을 가진 이의 소명이라는 것을 한창 공부할 때가 지나서야 깨닫게 되어 아쉽습니다.


이제 벌써 5월을 넘어 여름으로 치달아가는 계절, 날이 갈수록 녹음이 짙어가는 나무들을 보면 그네들의 심성을 더욱더 닮고만 싶어 집니다. 누가 보아준다고 해서 잎을 내는 것도 아니고, 누가 보지 않는다고 해서 시들어버리는 것도 아닌, 매 순간, 자기만의 생명력만큼 성장해 나가는 그 뚝심이 대단합니다.


저도 나무를 닮고 싶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누가 잘한다 잘한다 칭찬하지 않아도 꾸준히 나의 생명력을 키워나가며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일구어 나가는 뚝심 있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타인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스스로 푸르게 성장하는 존재. 타인의 인정을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를 성장시키는 존재. 저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습니다. 남의 인정이 아닌 나의 인정에 춤을 추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끝내는 하늘만큼은 나를 알아줄 것이라는 생명에의 긍정을 나는 배우고 싶습니다.  


생명이란, '성장'이 목적이지 '인정'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마음에 되새겨 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다른 이의 성장도 진심으로 응원해 주고 축하해 주고 싶습니다. 


아주 작은 것이라도 다른 이의 성장을 보듬어 주는 것, 이것이 바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서로를 향한 지극한 긍정의 실천이겠지요. 그리하여 나도, 당신도, 푸르게 성장하는 풍경을 꿈꾸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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